유리컵이 저절로 움직여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사람이 만지지도 않았는데 유리컵이 움직인 건 오래된 테이블의 다리가 손을 보지 못해 한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쯧, 하고 혀를 차고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찾았다.
하지만 청소도구를 가지고 돌아왔을 적에 그는 산산조각 난 유리파편 대신 금도 가지 않은 멀쩡한 상태의 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컵이 박살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영문을 몰라 하며 먼지 묻은 유리컵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생각보다 테이블 상태가 양호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서 바람이라도 불었던 걸까. 이상하다 생각하며 빗자루를 치웠다.
어느 순간부터 TV를 꺼두게 되었다. 맨날 똑같은 말만 들려왔기 때문이다.
몸을 카메라 앞으로 내민 아나운서들은 오늘에 이르러 미국은 멸망에 이르렀다며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부어댔다. 그들은 3년 전에도 나라가 망했다고 떠들어댔고, 2년 전에도 나라가 망했다고 이빨을 까더니 2038년이 다 지나갈 즈음인 11월에 이르러선 블랙 프라이데이 찬양 대신「나라 망했송」을 불러댔다.
그래서 어쩌라고.
포장봉지에서 커피가루를 꺼내던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2월에 출산율이 0.01%를 기록했고 10월에는 공식 집계 실업률이 3.37%를 넘어섰다.
북극에서는 이권 문제로 러시아와 대치중이고 누가 먼저 미사일을 발사하느냐 기 싸움 중이다.
그런데 그게 뭐. 나더러 어쩌라고.
커피 기계에 여과지와 물을 올리고 경건한 자세로 작동 버튼을 눌렀다.
그는 예전 방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발품을 팔아 구입한 20년 된 골동품 커피머신은 그 흔한 음성인식 기능이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커피를 만들려면 손가락으로 버튼을 하나하나 눌러야 했다. 그래도 온도 센서는 달려 있어서 맛있는 커피를 만들기 위한 최적 온도 80℃를 자동으로 맞춰주기는 했으니 제임스의 기준으로는 나름 신박한 기계였다.
붉게 빛나는 버튼이 파란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찬장에서 머그컵을 꺼냈다.
오늘은 2038년 11월 13일 토요일.
신자들아 믿어라. 카페인은 피가 되고 살이 될지니.
눈보라는 그쳤으나 여전히 디트로이트 시의 기온은 평년치보다 낮았다.
환기를 위해 잠시 창문을 열었다가 진저리를 치고 도로 닫았다. 거짓말처럼 금방 유리창에 성에가 껴서 뿌옇게 얼어붙은 을씨년스런 바깥 풍경이 동화에 나올법한 마법의 왕국처럼 느껴졌다.
시력이 약한 제임스는 버릇처럼 눈을 가늘게 떠보였다.
저 높게 솟은 건물 어딘가에 저주에 걸린 공주님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용감한 기사님이 사악한 용을 무찌르기 위해 깃발을 들었다. 왕국은 외쳤다. 용을 무찌르자!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용이라는 존재는 먼 나라의 왕자님이었고, 저주를 건 존재는 마탑의 마법사더라... 뭐 대충 그렇고 그런 진부한 사연을 가진 마법의 왕국 말이다.
오늘로서 당국의 통행금지 조처가 시행된 지 나흘째다.
덕분에 모든 일상생활이 멈춘 대도시는 비현실적인 적막감에 휩싸였다. 자동차 엔진 음이 사라진 주택가는 정말로 마법사가 내린 저주에 걸린 듯했다. 간혹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오면 겁에 질린 개들이 짧게 우는 소리를 내었지만 주인이 무슨 재주를 부려서인지 개들은 이내 침묵했다.
지난밤엔 상점가에서 폭발음도 들려왔다.
이불을 뒤집어 쓴 제임스는 멀리서 천둥번개가 쳤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곰이재주를부린다 : 다들 무사해?》
《응급실당번은너 : 먹을 게 떨어졌어. 난 지금 쿠션을 뜯어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어. 냉장고에 시든 시금치 쪼가리만 달랑 남았다. 살려줘!》
《워렌버핏의손자 : 어제 중앙공원 방향에서 또 총성이 들렸어. 대통령이 군인들을 철수시킬 거라 발표했는데 거짓말을 한 것일지도...》
《응급실당번은너 : 뉴스는 믿을 게 못 돼.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도시를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아. 명예의전당-행크그린버그 말로는 버스를 타고 캐나다로 탈출할 방법이 있다고 했어.》
《바나나를털어라 : 그거 헛소문일 확률이 높음. 도시 봉쇄령 아직 해제 안 됐음.》
《바나나를털어라 : 크랜브룩 대피소로 이동하라고 계속 보이스 방송이 나온다. 진짜 귀 막고 죽고 싶어질 정도로 떠들어댄다. 다행히 아직까진 강제 상황은 아니고 원하는 사람만 가라고 함.》
《곰이재주를부린다 : 그래서 갈 겨?》
《바나나를털어라 : 춥고 더럽고 개밥 준다던데?》
전원을 끄지 않은 구형 휴대용 텍스트 단말기에서 단체대화방 메시지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사라졌다.
평소에도 웨인주립대학교 서버를 교수들 몰래 사적으로 이용하던 친구들은 국가 비상시에도 범법행위를 저지름에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학교 행정보안 팀에게 들켜 금방 막힐 거라더니 자그마치 5년이나 묵은 뒷구멍이었다.
그들은 이 뒷구멍을 엔니나르(eninaR)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누가 만든 건지는 몰라도 5년이나 무사했으면 앞으로도 영원히 무사할 터였다.
《곰이재주를부린다 : 웃긴 게 뭔지 알아? 크랜브룩 대피소에서 사람들에게 밥 주고 화장실 청소하는 거 Ap560 모델이래.》
《바나나를털어라 : 어처구니가 없네. 위험하니까 우리더러 안드로이드 쓰지 말라면서 정부 새끼들 지금 뭐 하자는 거임? 안드로이드는 무조건 해체해야 한다며.》
《곰이재주를부린다 : 내 말이.》
《응급실당번은너 : 이 마당에 국방부에서 군용 안드로이드를 발주한다는 소문이...》
《바나나를털어라 : 백퍼 방산비리다!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평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불만이 많았던 이들은 곧바로 화면 가득히 정부를 비난하는 글을 쏟아냈다.
방산 비리, 인사 비리, 검은 돈, 정경유착... 워렌 대통령은 레즈비언이다!
제임스는 날개 달린 글자를 읽어볼 생각도 않고 손가락으로 밀어 페이지를 슥슥 넘겼다.
시위 현장에 직접 나가본 적도 없으면서 신나게 떠들어대는 방구석 여포에겐 관심이 없다.
그가 아까부터 웨인주립대학교 서버 뒷구멍에 접속한 까닭은 닉네임 명예의전당-행크그린버그, 본명 캐머런 건이 혹시라도 대화방에 나타나주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흘 전부터 무슨 까닭에서인지 명예의전당-행크그린버그는 잠수를 탔고, 제임스는 「버스를 타고 안전하게 캐나다로 가는 방법」에 대해 그녀에게 질문을 해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뭔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어쩌면 이미 캐나다로 도망친 건지도.
캐머런의 집은 부유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부를 거머쥔 0.4%의 상류층과 비교하자면 감히 비빌 수준은 아니지만 많은 부동산과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건물 임대업을 했고,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자기 명의의 15층짜리 빌딩이 있었다. 제임스가 자신의 보물 1호로 1978년에 만들어진 수동식 타자기를 소유한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오죽하면 대학생 시절부터 그녀에게는 경호원이 붙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보안 안드로이드가 마중을 나와 건물 입구에 서 있곤 했다.
이름은 조슈였다. 어쩌면... 조시였을 수도 있다. 제임스는 버릇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시가 맞나?
그와 간단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있다. 날씨나 인디밴드, 점심식사 메뉴처럼 시답잖은 주제로 한 두 마디 나눈 게 전부이기는 해도 세팅된 억양이 보스턴 쪽이라는 걸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근엄한 표정과는 달리 말투가 구수해서 자신도 모르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쯤해서 제임스는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올해 8월, 불량품 안드로이드가 소유자를 살해하고 아이와 같이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던 걸 특수진압부대가 처치했다는 뉴스가 올라왔었다.
제조사 사이버라이프의 입김이 닿았는지 반나절 만에 범인은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해고에 앙심을 품은 고용인으로 슬쩍 바뀌었지만 – 아무튼 안드로이드가 사람을 총으로 쐈다.
말투 구수하던 보안 안드로이드가 미쳐서 캐머런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는 장면을 상상했다.
순간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제임스는 마시던 커피 전부를 개수대에 쏟아 부었다.
Posted by 미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