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이 차원이동물이면 주인공은 김태영이 되겠지만 정체는 괴기물이에요... ※


몇 년 전, 차가운 바다로 떨어진 충격으로 이후 태영의 기억은 뒤죽박죽으로 섞인데다 일부가 누락되어 버렸다.
자신에게 연년생 누이가 있다는 건 기억한다. 그런데 그 얼굴을 떠올리면 눈과 코가 없었다. 달걀형인 하얀 얼굴에 입술만 이물질처럼 떠올랐는데 특이하게 윗입술에 검게 점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 여동생이 섹시하게 보인다며 자랑하던게 기억난다. 그런데 태영이 기억하는 동생의 얼굴은 섹시함과는 거리가 먼 달걀귀신이어서 유감이었다.
나머지도 죄다 흐릿했다. 이런 상황인지라 가족의 이름이 뭐였느냐 질문하면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가 중소기업 회사원이었다는 건 안다. 특허가 있는 정밀기계를 제작하는 회사였다.
어머니는 요리를 잘 못했다. 생일은 8월 12일, 당신이 태어난 날에 집중호우가 쏟아져 부근으로 하수가 역류하여 홍수가 났었노라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엄청 고생을 하셨다고... 그런데 어머니 이름 석 자가 기억 안 난다.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언젠가 전부 기억이 날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태영.」
「그 말을 들은지 벌써 4년이나 흘렀어.」
「평생이 흐른 건 아니잖니. 이제 겨우 4년이야.」
「...... 말 하는 꼬락서니하곤. 저주하는 놈 아니랄까봐.」

간혹 꿈을 꾸는 것처럼 단편적인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전철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풍경과 지루하다 싶은 네모난 건물들, 교복을 입은 학생들, 편의점에서 먹던 컵라면의 맛... 그리고 동시에 가루가 되어 산산히 부서졌다. 알고 있는 것들이면서 동시에 생소하다. 전부 착각인 것 같고, 찰흙으로 빚어진 가짜처럼 느껴지고, 과거에 그러한 풍경을 정말로 보았는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알고 있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태영은 머리를 휘젓고 다니는 이러한 단편적인 기억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 아니고 흡사 책을 읽어서 습득한 지식처럼 느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함.

『미인대회라는 걸 구경해본 적 있어? 텐.』
허리를 똑바로 펴고 걷던 오남이 어둡게 그늘진 태영의 안색을 깨닫고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응. 본 적 있어.』
이번에도 기억이면서 동시에 지식처럼 느껴지는 파편들을 접한 태영은 가볍게 두통을 느꼈다.
그의 고향에서는 매년 미인대회를 열었다. 이미 대중적인 인기는 식었고 다들 식상해 하는 행사였다. 그 또한 흥미가 동하지 않아 그다지 관심 있게 보지 않았는데 늘씬한 몸매의 후보들이 포즈를 취한 수영복 심사 사진만큼은 챙겨 본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한창나이인지라 훤히 드러난 가슴 굴곡이나 골반 라인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왕관을 쓴 드레스 차림새의 사진은 별로였다. 그보다는 단연코 수영복이 최고였다.

『수영복 심사?』
각지를 떠도는 장사치인 만큼 아는 지식은 많았지만 오남은 환상대륙에서 쓰이는 용어엔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태영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서 그의 궁금증은 말 그대로 궁금증으로 끝났다.
대신 태영은 눈을 가늘게 한 채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동대륙의 여성들이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속옷과도 같은 의상을 입고 과연 무대 위로 오를 것인가.
글쎄다. 이곳은 수영복이라는 개념이 없는 세계다. 헤엄을 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사람은 없다. 이들은 물에 들어갔다가, 허겁지겁 도로 나와서, 젖은 옷을 벗고 새 걸로 갈아입었다.
「물속에 무서운 것들이 있으니까 물놀이라는 걸 모르는 거지.」
그렇다면 물놀이를 안 해도 좋으니 손바닥 크기의 천을 건네주며 입어보라 해보면 어떨까.
십중팔구 뺨을 맞을 것이다. 더러는 이런 남부끄러운 걸 몸에 걸치도록 요구하기 전에 가족에게 결혼 허락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며 강한 어조로 항의할 것이다.
「수영복 심사는 무리군.」
실망하며 지나가는 마을 여인들의 옷차림으로 눈을 주었다.
허리를 조이고, 주름을 잔뜩 넣어 땅에 끌리도록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보자 왠지 모르게「르네상스」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은 났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태영은 알 수 없었다. 뇌에는 저장이 되어 있는데 회로들이 다들 엉키고 꼬여 부르는 응답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남. 르네상스라는게 뭔지 알아?』
『르네상스? 아까 말했던 수영복 심사를 말하는 건가.』
두 사람은 멀뚱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이건 아니잖아」속으로 중얼거렸다.

『에이... 뭐야, 결론은 미인대회라는 걸 잘 모르는구먼.』
『안다니까 자꾸 그러네.』
『좋아. 그럼 텐, 자네가 아는 미인대회라는 걸 나에게 한 번 설명해보게.』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몸매 죽이는 예쁜 여자를 뽑는 거지 뭐. 그보다 오남. 너, 말투 바뀌었어.』
순간적으로 태영의 머릿속으로 다시「카멜레온」이라는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진짜지 성가시다. 이런 식으로 환상대륙에서 쓰던 단어라던가 이미지 같은 것들이 예고도 없이 툭툭 치고 나갈 적마다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리고 그 또한 형태가 불분명한 유령이 된 느낌이다. 이곳에 속해 있으되 속해 있지 않다. 눈이 하나 뿐인 주민들 속에서 눈 두 개를 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정상이지만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눈 하나를 뽑아 남들처럼 외눈박이가 되어야 할까. 쓸데없이 초조해진다.

돌아와서.
오남은 카멜레온 같은 자다. 빨간 나뭇잎 사이에선 자신의 빛깔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사내다. 파랗게 칠해진 모래밭에선 새파랗게 빛날 것이다. 말투라던가 표정,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주변 색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한다.
『그야 난 뼛속까지 장사꾼이니까.』
원래 그런 거라며 오남은 그런 자신의 버릇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태영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았던 장사꾼들 중 이런 식으로 휙휙 변하는 자를 본 적이 없다.
때로는 성격도 변하는 것 같다. 더하여 가끔은 외모도 달라진다 싶었다. 란데가스 제국의 황궁 안에서의 그는 자비심이라는 걸 모르는 냉혹한 귀족처럼 보였는데 그때의 그의 얼굴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하품하는 평소의 얼굴과는 많이 달라서 딴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그랬어?』
『그랬다니까.』
『그보다 카멜레온이라는 걸 보고 싶군. 피부의 색이 자유자재로 바뀐다고? 어떤 동물일지 궁금해.』
『실제로 보면 실망할 걸? 눈이 빙글빙글, 이상하게 생겼거든. 게다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따로 놀아.』
『뭐야. 그건.』
상상해보니 웃겼던 것 같다. 오남이 큭큭 소리를 내어 웃었다.
듣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부드러운 웃음소리여서 지나가는 행인들이 덩달아 엄마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태영 역시 마주보고 서서 웃었다.
『양쪽 눈이 짝짝이로 돈다고? 어쩐지 더 마음에 들었어. 진짜야. 기회가 닿으면 정말 보고 싶어.』
『무리야. 나도 텔레비전을 통해 본게 전부니까. 탄냐파나 코카처럼 길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텔레비전?』
『그런게 있어.』

또 돌아와서.
광장에는 미인대회 우승 후보자에 대한 선전물이 어지럽게 사방에 걸려 있었다.
전신 초상화는 헉 소리 나올 정도로 고가인 관계로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자비를 들여 얼굴 초상화를 그려온 후보자는 몇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은「꾀꼬리와도 같은 목소리의 소유자」라느니,「겨울의 눈송이를 연상시키는 무결점 하얀 피부」식의 내용을 글로 적어 선전을 꾀하고 있었다.
태영은 턱을 괴고 생각했다. 말로 하는 건 그다지 효과가 없을텐데.
그래서 후보들은 높은 가마 위에 올라타 군중들 사이로 다니며 자신을 뽐내는 것으로 인지도를 높이려 했다.
『물어보니 아직 행렬 시간이 아니라고 하는군.』
『보통 몇 시에 하는데.』
『오전 11시, 그리고 오후 3시. 하루에 두 번. 오늘은 좀 늦을 수도 있다고 했어.』
고개를 끄덕거린 태영은 벽에 덕지덕지 붙은 선전 문구에 다시 집중했다.
비단과도 같은 머리카락. 사슴과도 같은 눈동자. 치유의 힘을 가졌어요, 감기 정도는 치료할 수 있어요. 2개 국어 자유자재로 사용. 사과와도 같은 뺨. 앙증맞은 발. 다섯 자리 숫자의 암산 가능.
이래서는 미인대회가 아니라 흡사 취업 박람회 같다는 것이 그 첫인상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5/09/18 15:22 2015/09/1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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