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장이 아닌 평복 차림새를 하고 있던 그는 옷깃을 엉망으로 풀어헤친 채 소금꽃이 핀 머리 꼭대기로 목을 축일 물을 붓고 있었다. 그래봤자 불쾌감을 주는 더위는 가시지 않아 눈빛이 난폭했다. 체온은 시원하게 내려가지 않고 그저 습도만 높아졌을 뿐으로 피부에 물 먹은 옷감이 진득하게 달라붙자 더 못 참아 했다.
누가 저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데다 옷차림도 흐트러진) 남자를 위대하신 황제의 고귀한 핏줄이라 여기겠는가. 금관을 쓰고 높은 가마에 앉은 것도 아닌데.
머리카락에서 물방울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한결 더 야수 같았다.
그런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옆에서도 병사들은 다행스럽게도 그럭저럭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추측하자면 시체더미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자들이니 더위를 잡순 야수 정도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무리 중 그나마 지위가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자가 공손히 아뢰었다.
『자손. 이곳에서 지체하시면... 일정이 지체되옵니다.』
『닥쳐. 네가 감히 나에게 설교를 할 작정이냐.』
언젠가 땀투성이가 되어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 요구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이런 식으로 모두로부터 강요를 받아가며 바둑판 모습의 도시를 죽어라 걷고 있었던 걸까.
이것이 꽃으로 장식을 한 화동이 모두의 환호를 받아가며 마을 한 바퀴를 돌아 제대로 죽지 못한 것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결계를 만든다는 의례의 재현이라면 나는 그냥 배를 잡고 웃어버릴 테다. 여기엔 꽃도 없고 환호하는 인파도 없다. 당연히 화동도 없다. 입이 찢어진다 해도 스물 셋이나 먹은 사내더러 미동이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리 잘 생겼어도 겨드랑이에 털이 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미동이라 부를 수 없다고, 나는 그렇게...
『이 머리에 구멍 뚫린 놈. 네가 지금 날 측은한 시선으로 쳐다볼 입장이라 생각하느냐?! 응?!』
기시감이 휩쓸었다. 자손은 나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나를 한 팔로 붙잡아 허공에 대고 마구 털었다.
대롱대롱 흔들리며 나는 산산조각 나 보이지 않는 구멍을 통해 발밑으로 빠져나가려 하는 영혼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그래도 차이라면 먼젓번에는 독기를 뿜어대던 그가 이번엔 엄청난 짜증을 퍼부어댔다는 점이랄까, 둘 중에 뭐가 더 괜찮고 낫고의 차이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 아무튼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사내는 눈이 반쯤 뒤집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화가 나.』
『그거 참 황송하옵게도.』
『더워!』
『불평하신들... 날씨는 제 힘으로는.』
『신경질 난다!』
『항의는 돌아가셔서 내전관들에게 하심이.』
『했다고했다고했다고! 그것도 한 두번 했을 줄 아느냐! 하지만 녀석들 귓구멍은 꽉 막혔단 말이다! 창리궁 마마에게도 자식이 둘이나 있잖아! 그 녀석들을 시키란 말이다. 귀찮은 일까지 전부 나에게 떠넘기고 이게 무슨 짓거리야! 좌로 걸었다, 우로 걸었다, 방향을 정해 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만 하는 건 재미가 없엇! 피곤한 건 둘째고 지루해서 기절할 것 같다고! 악령이 나와? 그럼 제령을 해! 요괴가 나와? 그럼 단칼에 베어버려! 그러는 편이 간단하고 좋잖아! 차라리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하라고 시켯! 적병의 머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잘라다 바치겠다! 제발~ 이렇게 빌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매년 이러는 거 진짜 싫어, 싫다곳!』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지른 그는 숨을 크게 내쉬고는 들고 있던 내 몸뚱이를 예고도 없이 뚝 떨어뜨렸다.
『후아! 소리를 질렀더니 조금은 풀리는군.』
대신 내던져진 이쪽은 엉덩이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파 열심히 궁둥이를 문질렀다.

소리를 질렀더니 개운해졌다는 건 빈 말이 아니었나 보다. 한층 표정이 편안했다.
『좋다, 그럼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네가 왜 내재원이 아닌 여기에 있는 거냐, 좁쌀?』
좁쌀? 그건 도토리보다 더 작잖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말이죠. 본국에서 증서가 도착해 이곳 상은에서 돈으로 바꾸려고 했는데요.』
『호오, 이제 거지 신세 면했군. 그랬는데?』
『갑자기 손님 오셨다 소리를 지르더니 식칼을 들고 덤벼들더라고요.』
『얘네들이?』
너희가 그랬어? - 라고 지적당한 포박된 무리들은 부리나케 도리질했다.
『아닙니다아닙니다우리가아닙니다!우리는강도가아녜요!우리도피해자라고요진짭니다믿어주세요!』
그들의 합창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던 자손은 뒤편으로 신호해 또 물을 요구했다. 도대체 얼마나 마시려는 건지. 것보다 체력이 보통이 아닌 자가 심한 갈증을 느낄 정도로 걸었다면 그 거리가 얼마나 될지 돌연 궁금해졌다. 상상 외로 엄청난 강행군이었을 수도 있다. 혼자서 루은의 여덟 대문을 기준점으로 정방돌음(오른쪽)과 정외걸음(왼쪽)을 말을 타지 않고 순전히 걸어서 돌려 했다면 살인적이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된다. 성문 안 면적만 무려 2,750란호립에 이르기 때문이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황족인 남성이 그런 걸 몸소 하려 했을 리가...
추측하기를 그만두고 다시 좁은 계단에서의 타평과의 싸움을 설명할 단어를 골랐다.
에, 하고 입을 여는 것과 동시였다. 갑자기 생각도 못한 물벼락이 나에게로 좌악 떨어졌다.

『어?!』
벌써 심문 들어간 거에요? 물고문인 거에요? 그러니까 설명하려고 했다니까요!
자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나를 쳐다봤다.
『생각처럼 깨끗해지질 않는 군. 끼얹은 물이 부족했던 걸까.』
영문을 몰라 입만 뻥긋 벌리고 있자니 보다 못한 이라벽치가 헛기침과 함께 끼어들었다.
『어험! 그래선 안 됩니다, 자손. 더러워진 옷은 벗어서 세탁을 해야 하는 겁니다. 사람이 옷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물을 끼얹어봤자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피 얼룩은 원래 잘 안 지워지는 것이고... 그리고 저어, 당하는 사람 기분도 그다지... 이건 선의를 보여주는게 아니고 모욕을 주는 거라고요.』
뭐?! 이게 다 내 옷의 더러움을 지우려는 의도에서 나온 거였어?!
선무당식 세탁 방법을 지적당한 자손의 동공이 흔들렸다.
오늘의 교훈 하나. 물을 끼얹는다고 옷은 깨끗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원래 이 남자는 뻔뻔하다.
『그렇군, 물을 끼얹어봤자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군. 허나 팥알의 기분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내 의도는 모욕을 주려던게 아니니. 그러니 이라벽치, 네가 이 녀석을 책임지고 세탁해.』
좁쌀에서 팥알로 격상되었으나 하나도 안 기쁘다.
나를 깨끗하게 만들라는 주문에 이라벽치 또한 눈을 가늘게 떴다.
또 접니까. 이 애를 책임져야 하는 건 또 저인 거에요? 그의 표정이 그리 묻고 있었다.
반복하여 말하게 만들지 마. 이에 대응하는 자손의 눈빛은 엄격했다.

그제야 나는 포박된 무리에서 떨어져 이라벽치의 손에 이끌려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돌아보니 이미 어디론가 치워져 락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할 말이 있다며 이라벽치의 두꺼운 손을 힘주어 잡아당겼지만 그 또한 민간인이 아닌 군인, 내가 보내는 신호는 일절 무시한 채 다른 병사더러 자신이 탈 말을 가져오라 명령했다.
『에휴. 단순히 강도를 당한 건지, 아니면 네 나라에서 암살자를 보내온 건지 아직은 모르겠다만.』
그래도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걱정해주었다.
『이렇게 소동이 크면 이사실에서 널 사친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본국으로 돌려보내려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을 듣고서야 줄곧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한꺼풀 벗겨져 나갔다는 기분이 들었다.

「빈사국으로 돌려보내질 수도 있다고?」
얼마나 사람이 이기적이면 그 즉시 락연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앞으로의 내 처우다.
물에 젖은 발잔등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니, 뭐. 본국으로 돌려보내진다고 해도 딱히 지금과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긴 하니까 땅이 무너졌다는 식의 기분은 들지 않지만... 그러는 수가 있었군.」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왕위계승 다툼에 휩쓸린 타국의 왕족이 사친으로 왔는데 내재원에서 떡~ 하고 암살당하면 이사실에서도 책임 문제가 불거지니까 제국 입장에선 사단이 나기 전에 반품 - 돌려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50동을 쓰지 않았다고 한 번 가정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그 정체가 누구든 어지간히 내가 이사실에 머무는게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음대로 하라지. 상관없어. 차라리 잘 되었지. 나라고 여기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아니야.」

분위기가 어두컴컴해졌다고 느낀 이라벽치가 내 어깨를 가볍게 툭 밀었다.
딴에는 위로를 해보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덩치가 남산이라는 걸 고려했어야만 했다.
힘에 밀쳐져 벌러덩 넘어지는 입장에선 그건 결코 위로가 아니었다.

Posted by 미야

2015/08/01 21:06 2015/08/0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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