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 부를 장소가 있다면 그곳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세계 어디에도 내 고향이라 부를 곳이 존재하지 않으니
정을 붙이고 안식을 취할 집 역시 허락될 일 없겠구나
창을 열면 푸른 벼이삭 보일 풍요로울 그곳을
꿈에라도 그리워하며 흐느끼며 팔베개할 뿐

눈을 감으니 벼가 자란 들판이 아닌, 새카맣게 타버린 하늘 아래 만물의 죽음이 깃든 민둥산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사방을 둘러봐도 살아있는 생물은 나를 제외하곤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삭막함이 어쩐지 뼈에 사무쳐 나는 용신의 모습을 찾아 계속하여 흐느꼈다. 하지만 있을 리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소중한 이는 내게 불리울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떠났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가슴이 조이는 듯한 격한 통증이...
- 꼬르륵 -
그게 아니라 단순히 배가 고파 눈앞이 캄캄해진 거였나.
배고픔인지 울분인지 구분되지 않는 감각에 치를 떨며 쪼그리고 앉았다.
단순히 허기 탓이라면 무언가로 배를 채우는 즉시 불쾌감이 진정되겠지만 먹는 행위가 금지된 지금으로선 이 둘을 구분할 재주가 없다.

작은 돌 하나를 주워 눈치껏 입안에 넣고 굴렸다.
저것이 돌았구나 탄식하며 옆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물론 나는 인간이라서 돌을 씹어 소화시키는 재주는 없다. 그래도 자극을 받아 침이 나오니 목마름이 약간 가셨다.

『그렇게 앉아 계시면 안 됩니다.』
『압니다.』
『아시면 일어나십시오.』
『죄송합니다.』
『일어나라 하였습니다.』

편돌을 깐 제보전 앞에 일단 줄을 맞추어 서게 되면 아무리 급해도 무리에서 이탈하여 화장실에 가는 행위가 일절 허락되지 않는다. 설사병이 나도 제례는 제례, 그래서 제보전에서 중요한 의식이 열리는 날엔 의례히 단체 금식이 행해진다.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없으면 똥구멍으로 배출되어 나오는 것들도 없는 법, 하여 깔끔하게 하루나 이틀 정도 식사를 거부한 채 몸의 상태와 기분을 조절한다.
말은 쉽지만 몸은 힘들다. 어른들도 버거운데 하물며 우리들은 성장기 어린이다.
뿐만 아니라 배례 의식에서 하여야 할 몸동작도 사전에 연습해 두어야 한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진이 빠질 노릇인데 타 라는 이름의 악기가 내는 소리에 맞춰 팔을 올렸다 내렸다,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이게 또 별 것 아닌 것 같은 동작임에도 박자 맞추기는 은근히 까다롭다. 더하여 배가 고프니 주의력이 떨어진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따라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뭍으로 나온 오징어 몸짓을 해보일 수밖에 없다.

『참을성이 부족하군요. 옛날에는 이렇게 축 늘어지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힘들단 말예요!』
『폐하 앞에서도 힘들어 죽겠다 어디 나불거려 보시던지. 하여간 요즘 어린 것들은... 쯧쯧.』
『부탁입니다. 조금만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자꾸 쉬려고만 하니 팔을 올려야 할 때에 다리를 올리는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쉬기는 뭘 쉽니까!』
그걸 아니꼬워하며 의전관들은 아이들을 혼내고 야단치며 반강제로 일으켜 세우기를 반복했다.
협박하듯 타의 막대기를 아이의 코앞에서 따악 소리가 나게 부딪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전관이면서 하는 짓은 완전 깡패다. 50년 전에도 그랬으니 앞으로 100년 후에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칠배례 의식에서 적룡신님도 뵐 수 있나요?』
그리고 이쯤하여 꼭 나오는게 바로 이것이다.
더위에 지쳐 다소 힘을 잃었지만 질문하는 아이의 눈빛은 반짝 빛을 냈다. 용신이 내려오시는 건가? 하늘님이나 마찬가지인데 우리 같은 애들의 춤을 직접 봐주시는 건가?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웃었다.
칠배례는 일곱 가지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일곱 번 반복하여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원래는 이곳 서대륙이 아닌 북대륙의 전통 풍년 기원 의식이다. 친선사절로 배를 타고 남-기스가르트로 갔던 문교가 이를 구경하다 홀딱 반해서 우리도 해봅시다, 이러고 그 형식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 사람 눈에는 보기에 매우 좋을지 몰라도 적룡신이 보기엔 완전 짝퉁에 국적불명의 의식인 셈이다. 노랫가락에 등장하는 흑룡을 이쪽에서 멋대로 적룡으로 가사를 살짝 바꿔봤자 근본부터가 짝퉁인 건 어쩔 수 없어「니들 참 애쓴다, 애써. 쯧쯧...」반응밖엔 안 나왔다. 최초에는 문무신관 전원이 모여 거창하게 행하던 예식이 오늘에 이르러 어린아이들의 봉납의 춤으로 격하된 것도 다 그런 까닭에서다.
「적룡신이 칠배례 의식을 시큰둥히 여긴다는 걸 애들은 전혀 모르지. 이쪽은 물도 못 마셔가며 힘들게 노력하는데 말이야.」
이래서야 완전 헛발질이다.
분명 저승에서 문교가 황송하다며 스스로 자기 목을 밧줄로 메다는 시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무엇이 우습다는 건지요.』
『아.』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백발의 주름 가득한 노인의 얼굴이 나를 차갑게 쏘아보고 있었다.
놀라 허겁지겁 거짓말 했다.
『그게! 적룡신님을 뵐 수 있구나 생각하니 기뻐서...!! 네, 기뻐서 웃었습니다.』
내 설명을 듣고도 노인의 파란 눈동자가 조금 어두워졌다. 백발이라 미처 몰랐는데 그는 색목인, 그러니까 동대륙 먼 이국의 출신이었다. 머리카락도 젊어서는 아마 밝은 빛깔의 갈색이었을 거다. 물론 추측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눈썹에까지 하얗게 눈이 내려 예전 빛깔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다만 과거에는 그 외모가 무척이나 눈에 띄고 화려했을 것이다.
『다른 생각에 웃었던 것이 결코 아니옵고...』
노인은 내가 하는 변명을 채 듣지 않고 콧방귀부터 뀌었다.
『적룡신님은 바쁘십니다. 제국의 하늘과 땅을 온전히 다스리시니 얼마나 바쁘시겠습니까.』
그 작자 취미가 낚시인데 그 무슨 얼어 죽을.

어쨌거나 아이들은「용신님은 오지 않으신다.」라는 말에 크게 실망하고 한숨을 쉬었다.
지분대는 웅성거림을 베어내고자 벽안의 노인이 타를 마주쳐 큼직한 따악 소리를 냈다.
『그래도 용전 앞입니다. 황제 폐하 앞인데 실수를 하면 안 되겠지요. 그랬다간 대를 이어 망신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더 연습해봅시다. 제 일보부터 이보까지의 동작입니다. 하나, 둘. 저를 보고 따라 하십시오. 이렇게 팔을 들어서 손목을 이리 구부려...』
소매를 슬쩍 흔들기만 했는데도 박력 넘치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맨 뒷줄로 가십시오.』
나름 벌을 주려던 의도였던 것 같은데 나야 제일 눈에 띄지 않는 구석이 좋다.
『왜 머뭇거리고 있는 겁니까. 어서 움직이지 않고 뭐 하고 있습니까!』
『예.』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마자 부리나케 구석으로 도망쳤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그게 무척 한심하게 보였나 보다.
킥킥 낮게 웃는 소리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 의도적으로 영어식 표기를 피하다보니 갑자기 막히는 경우가 자주 생기네요. 컨디션... 커튼... 스트레스... 이걸 무어라 하면 좋단 말입니까?

Posted by 미야

2015/05/15 11:49 2015/05/1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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