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43

※ 18일, 19일은 작업 분량이 없을 예정입니다. ※


표독스런 얼굴을 한 개는 커다란 우리에 갇혀있었다.
『그게 말이죠... 고객님.』
수의사도 아니면서 왜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편이 고객에게 신뢰를 얻기 쉽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하긴, 헝클어진 곱슬머리에 보풀이 일어난 싸구려 스웨터, 그리고 갈색 듀코로이 바지 차림새로는 고등학교를 갗 졸업한 풋내기로밖에 안 보였을 거다. 리스는 남자의 턱에 난 여드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노란 고름이 차오른 잘 익은 염증은 면봉으로 건드리면 톡 소리를 내고 터져버릴게 분명했다. 손톱으로 누르고 싶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뒷말을 흐리며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리스는 그제야 여드름에서 시선을 돌려 두꺼운 쇠창살 틈새에 갇힌 개를 쳐다보았다. 익숙한 리스의 체취를 알아차리고 친근감을 표현할 법도 하건만, 베어는 이를 드려내며 위협 중이다. 손을 대면 고기 물어뜯는 요령으로 가차 없이 이빨을 박아 넣을 기세다. 어찌나 살기등등한지 우리의 자물쇠가 튼튼했음에도 하얀 가운을 걸친 동물병원 직원은 1미터 이상 접근을 못 했다.

『우리 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리스의 질문에 대답한 건 직원이 아니고 입원 중인 동물 쪽이었다.
케이지 속의 개들은 저마다 울부짖었고, 고양이들은 발톱을 세워댔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리스는 허리를 구부려 우리 속에 갇힌 얼굴 검은 개에게 의문을 표현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베어.』
사실 개는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다. 음... 그러니까 접시를 깬다거나, 쓰레기통을 뒤엎는 식의 소동은 없었다. 다만... 뭐랄까. 비협조적이었다고 할까. 아니면 개가 내뿜은 분노의 오라가 주변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할까. 이글거리는 갈색의 눈동자가 리스를 노려보았다. 개는 흡사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그래.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을 것 같냐? 앙?!」머쓱해진 리스는 손바닥으로 뒷통수를 문질렀다. 동시에 개의 으르렁거림이 심해졌다.「네놈이 날 감옥에 가뒀냐?! 그런 거냐?! 야! 입이 뚫렸으면 말해봐!」컹컹 외침에 병원 직원이 겁을 먹고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이 녀석, 화가 단단히 났네요.』
리스의 말에 직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병원 탓은 아닙니다. 베어는 자존심 강한 개더군요.』
그리고 끔찍스러울 정도로 비협조적이에요 - 라고 자괴심 어린 말투로 투덜거렸다.
앉으라고 해도 노려보고, 저리로 가자고 해도 노려봤단다.
리스는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거야 당신이 네덜란드 어로 명령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거고.

한숨을 내쉰 그가 사무실로 가자며 복도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럼 저쪽으로 가셔서 요금 정산을 하도록 합시다.』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위치를 옮기는 와중에도 리스는 틈틈이 우리 쪽을 흘끔거렸다.
늠름한 자세로 버티고 선 개는 그 동안「죽어! 죽어!」이러고 외쳐댔다.
『여기서 데리고 나가려면 진정제를 놓아야 하는 겁니까?』
『어. 진정제를 맞추고 싶어요?』
개를 좋아하는 사람인 건 분명해서 남자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약물 남용은 사람에게도 안 좋지만 동물에게도 나빠요. 그러지 말고 꽃향기가 나는 스프레이를 구입하셔서 개의 발잔등에 소량 뿌려주세요. 그 편이 약물보다 더 좋습니다. 사람도 기분이 언짢으면 뜨거운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들어가 긴장을 풀잖아요?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는 것보다 그 편이 더 좋죠. 건전하기도 하고.』
시험 삼아 써보라며 갈색의 작은 병을 하나 내밀었다.「진정효과」라고 적혀진 병에는 보라색 꽃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모르긴 해도 아로마 오일의 일종인 듯하다. 리스는 어정쩡한 자세로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꽃향기는 제법 강렬해서 뚜껑을 열기도 전에 코가 간질거렸다. 리스는 에취, 이러고 장렬하게 재채기했다.
『농축액을 그대로 쓰라는게 아녜요.』
코를 닦고 있는데 대략적인 사용법을 설명해주겠다며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리스는 얌전히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런데 막상 의자로 가서 앉자 동물병원 직원은 리스가 기대했던 아로마 오일 사용법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양손을 손깍지를 낀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을 드리는 건 주제넘을 수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말이죠. 벨기안 말라노이즈는 군견이나 양몰이견으로 적합하지 장애인 안내견으로는 추천하지 않아요. 사람 머리 꼭대기로 올라탈 정도로 영리한데다 친화력이 리트리버 종류보다 낮거든요. 그리고 힘도 세고 덩치가 커서... 다리가 많이 불편한 사람이 키우기엔 벅찰 거라고 봅니다. 듣자하니 베어의 주인은 그쪽이고, 실제로 개를 보살핀 쪽은 해롤드 버틀렛 씨라고 하셨죠?』
리스는 대놓고 불쾌한 얼굴을 했다.
『무슨 의미입니까.』
유령의 집에서 스산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차가운 공기와 땅바닥에 깔리는 연무에 기겁하고 뒤돌아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화형대 위로 올라갈지언정 할 말은 하고 죽을 각오였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버틀렛 씨가 베어를 키우는 건 체력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베어의 주인인 선생이 개를 도로 데려가야 한다고 봐요.』
『해롤드가 허리를 다쳐 입원한 건 베어 탓이 아니고 안톤 체호프 때문이었는데요.』
『어. 댁에 다른 강아지가 또 있습니까?』
리스는 입술을 앙 다문 채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주인이나 개나 똥고집이 끝내준다 - 동물병원 직원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개는 여전히 심술이 가득했다.
목줄에 줄을 채워 끌고 나오려는데 다른 방향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딴청만 부렸던가. 일부러 네 다리에 힘을 주고 안 움직이려 했다.
『베어.』
그래봤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개들도 삐진다. 그거 참.
『핀치가 안 와서 섭섭해?』
베어의 갈색 눈동자가 리스에게로 향했다가 슬그머니 출입구 방향으로 돌아갔다. 섭섭한 정도가 아니다. 개는 뒤뚱거리며 걷는 양반이 출구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를 무식할 정도의 집착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자기 주인을 리스로 각인했음에도 목을 빼고 기다리는 존재가 따로 있다니, 답답한 노릇이다.
이제 가야 한다며 줄을 다시 잡아당겼다.
『핀치는 퇴원 준비 중이야. 이곳엔 직접 못 와.』
인상을 쓴 개가 끄응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잖니.』
제발 봐 줘라 - 리스가 두 팔을 벌리자 개는 몸을 굽혀 소중히 품고 있던 장난감을 입으로 물었다. 삐약삐약 소리가 나던 뼈다귀 모양의 장난감이다. 그 소리를 소름끼쳐하던 핀치가 바람 소리를 내던 튜브를 꺼내고 다시 바느질한 탓에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베어는 여전히 그 장난감을 가장 좋아한다. 그걸 입에 물자 마치 핸드백을 옆구리에 찬 숙녀처럼 보였다. 물론 베어는 수컷이었지만 - 아무래도 좋았다. 리스의 입장에서는 베어가 자발적으로 밖으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는게 중요했다.
『자, 그럼 도서관으로 돌아가자.』
그 제안에 베어의 꼬리가 빳빳하게 섰다.
『그런데 너, 일부러 골탕 먹으라며 장난감이며 사료봉지며 구분 안 하고 물어뜯은 거니? 병원에서 이건 물어줘야 한다면서 나에게 영수증을 잔뜩 떠밀던데.』
개가 곁눈질로 흘끔 쳐다보았다.
리스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총총 걸음으로 집을 향해 바쁘게 나아갈 뿐이었다.

Posted by 미야

2012/12/17 11:35 2012/12/1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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