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25

오랫동안 글쓰기 작업을 하지 않았더니 스타일이 변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개그버전으로 나가다 갑자기 유혈사태가 나는, 양극단의 첨단을 달리는게 제 스타일인데 지금은 심심하다고... 그런가?
어쨌든 취미생활인데 뭘 따져.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짭짤한 소금기가 섞여있다. 바다가 가까운 탓이다.
그래서인지 시원하다는 느낌 이전에 투명한 알갱이들이 얼굴에 달라붙고 있다는 불쾌감이 들 때가 있다.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뜀박질을 즐기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지만 후각이 예민한 개는 연신 혀를 길게 빼내어 콧잔등을 핥았다.
왼쪽 다리 상태가 좋지 않은 관계로 천천히 걷던 핀치도 손수건으로 뺨을 닦았다.
『조금 쉬었다 갈까?』
핀치의 제안에 베어는 가까운 벤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영악한 녀석이라 이제는 네덜란드어가 아니라 영어도 잘 알아듣는다. 줄을 잡고 있는 주인이 피곤해하는 걸 깨닫자 여기에 앉으라며 에스코트까지 했다. 개는 짙은 갈색의 눈으로 핀치가 앉는 걸 전부 지켜보고서야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아아, 좋은 날씨구나.』
뉴욕의 사람들은 늘 활기차다. 그들의 걸음은 느리지 않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회색빛깔의 구름만큼 빠르게 지나간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귀로 음악을 들으며, 아이의 손을 잡고, 때로는 격렬하게 손짓하며, 웃고, 떠들고, 음료수를 마시고... 환등기의 불빛처럼 사람들의 모습이 휙휙 지나간다.

내가 유령인지, 아니면 저들이 유령인 건지.

피식 웃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어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무언가를 조사하려는 건 아니고, 무선 인터넷으로 특정 인물의 트위터에 접속했다.
수단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윌리엄은 한 달에 두 어번 꼴로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올린다. 그쪽 동네가 워낙에 불안정한 탓에 국경없는의사회 센터에서도 인터넷 연결은 쉽지 않은 눈치다. 게다가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혼자 독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윌리엄의 최근 게시물은 20일 전에야 올라왔었다.

《야호~!! 다들 건강하죠? 사랑해요~!!》
바짝 마른 새카만 피부색의 소년을 끌어안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본인은 동료로 여겨지는 안경 쓴 남자에게 껴안긴 상태다. 언뜻 보기엔 술에 취한 난장판 분위기지만 그 동네에서 파티를 했을 리는 만무하고. 윌리엄의 설명으로는 지난 18일 무렵에 신의 저항군(LRA)을 피해 고향에서 도망쳐 나온 난민 무리들에게 진료 활동을 했다고 한다.
《여긴 수인성 질병 발생이 많아. 임시 거처를 만들기 위한 방수천도 부족해. 의류, 이불, 개인위생물품 전부 모자라. 그러니까 제임스, 아서, 스티브, 캐서린, 내가 뭔 말을 하려는지 잘 알렸다?》
윌리엄의 친구들이 메시지를 보고 아우성을 쳐놨다.
《네놈이 우리보다 부자잖냐! 카아악, 퉤. 그래도 일단 동참.》
《언제 돌아와?》
《그 안경 쓴 사람은 누구야? 소개시켜줘. 그리고 제니퍼 약혼함. 알고 있었음?》
《남수단과 북수단이 전쟁을 한다는데 거긴 괜찮니?》

오늘은 친구들의 요청을 받고 티에리 마스탱을 소개했다. 프랑스인이고 윌리엄보다 두 살 연상이라고 한다. 코가 뾰족하고, 안경을 썼고, 그 땡볕 아래서도 묘하게 창백한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윌리엄은 장난스럽게 이렇게 적어놓았다.
《여자에게도 인기가 없고, 남자에게도 인기가 없는 사람.》
반어법적인 표현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윌리엄이 그 옆에서 활짝 웃고 있을 리 없다. 둘이 매우 친한 사이인가 보다. 아, 그렇다고 서로 사귄다는 건 아니고... 티에리는 이성애자라고 못을 박았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서로 땟국 줄줄 흐르는 속옷을 빌려 입을 정도는 된다」고 윌리엄은 그들의 돈독한 우정을 정의했다.
이쯤해서 핀치는 두 눈을 꿈뻑거렸다.
『굉장히 친하잖아. 부러운데.』
처한 상황이 달라서인 까닭도 있겠지만 네이슨은 핀치에게 속옷을 빌려준 적이 없다. 반대로 핀치 또한 네이슨에게 속옷을 빌려주지 않았다. 아, 청바지는 서로 같이 입은 적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핀치가 구입한 청바지를 네이슨이 멋대로 가져가 입고 깨끗하게 세탁을 해놓는 걸 잊곤 했다. 거듭되는 핀치의 잔소리에도 네이슨의 건망증은 영 치유가 되지 않았다.

『여어, 핀치. 한참 찾았습니다.』
흠칫 놀라 보고 있던 노트북을 얼른 닫았다.
『미스터 리스?』
『베어를 산책시키러 나가 길을 잃어버린 건가 걱정했어요.』
그의 손에는 테이크아웃 종이컵이 두 개 들려 있었다. 하나는 녹차이고 하나는 설탕조차 넣지 않은 커피이다. 음료가 담긴 컵을 보자마자 핀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길을 잃어버렸을까봐 걱정했다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여유만만이다. 표정 역시 그러해서 차이나타운의 공원에서 장님 친구와 장기를 두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존은 옆에 앉아도 되느냐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꽤나 무례한 것도 같은데 핀치의 몫으로 가져온 녹차를 내밀면서「아직 뜨거우니 조심해요」주의를 주는 걸 봐선 자상하다. 이러한 이중성은 늘 핀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베어의 목줄에 위치 추적기라도 달아놓은 거예요?』
마침 목이 말랐다며 두 손으로 공손하게 녹차를 건네받은 핀치는 뚜껑을 열고 녹색의 맑은 액체를 입에 담았다. 후룩 마시자 목에 달라붙은 짠 기가 그 즉시 가라앉았다.

『노트북으로 뭘 보고 있었어요? 핀치.』
『별 거 아닙니다.』
『야한 거?』
『이 사람이!』
『방금 전 당신 표정이 좋아하는 블루베리 크림 도넛을 먹고 있을 때와 비슷해 보여서요. 그리고 핀치, 성인 남성이 여성의 수영복 사진을 보며 좋아하는 건 부끄러운게 아니에요.』
『수영복 사진이 아닙니다.』
『정말? 그럼 보여줘봐요.』
CIA 전직요원의 사람 구슬리는 화법에 또 당했다.
핀치는 쓰게 웃으며 노트북 화면을 들어 리스가 볼 수 있게끔 했다.
자, 소개합니다. 수단에서 봉사활동 중인 착한 사람들입니다.

『티에리라는 사람, 묘하게 당신을 닮았네요. 쓰고 있는 안경 모양도 그렇고.』
길게 말하는 걸 싫어하는 리스는 사진 속 인물을 보곤 딱 한 마디만 했다.
「으아악, 윌?! 설마.」
그 즉시 핀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 되어 모니터 화면으로 두 눈을 가깝게 들이밀었다.

Posted by 미야

2012/11/16 11:59 2012/11/16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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