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24

리스에게 있어 수면은 생물학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전직 CIA 요원은 그것에 별개의 개념을 투입한 적이 없다. 따라서 꿈도 꾸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꿈은 꾸었다. 휴식을 취하는 뇌는 느리게 활동하며 총천연색의 알록달록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속칭 개꿈이라 말하는 그런 종류들이었다.
이게 최근에는 살짝 달라졌다.

그가 누운 1인용 침대 옆으로 다른 사람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현실적으로 그럴 공간따윈 요만큼도 없지만 꿈이니까 상관없다.
당신 누구야 소스라치게 놀라는 대신 리스는 침입자의 몸으로 친밀하게 팔을 둘렀다. 그게 무척이나 폭신한 감촉이어서 만족감에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의 친구. 나의 소중한 사람. 나의 은인. 내 인생을 온전히 바꿔놓은 사람.

핀치는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똑바로 누워 코를 비벼오는 리스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언제나처럼 잠잖고, 교양 넘치고, 예의바른 인상이다. 답답할 정도로 목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졸라매었다. 그래서 손가락을 뻗어 귀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가볍게 눌렀다. 따스한 피부 건너로 규칙적인 맥박이 느껴졌다. 피부를 타고 전달되는 리듬이 기분 좋았다. 멈추지 않고 그곳으로 입을 맞추고 부드러운 살을 오목하게 입속으로 빨아들였다. 그리고 이를 세우고 물었다.

《당신의 잠재의식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미스터 리스.》
「오 - 미안해요. 아팠어요?」
너무 심하게 깨물었나 싶어 얼른 입을 떼었다. 하지만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건 멈추지 않았다. 짧지만 양털처럼 보드라웠다.
《그럴 리가. 저는 당신의 꿈에 등장하고 있어요. 육체적 아픔은 느끼지 않습니다.》
핀치가 안경을 벗고 가만히 눈을 맞춰왔다.
「뭐라고요? 이게 전부 꿈이라고요?」
《허어! 참 나쁜 사람일세. 꿈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잠에서 깨어나는 대신 즐겁게 통제하고 있으면서 지금 시치미를 떼는 겁니까.》
「그런 건가요.」
《그렇다니까요. 그 증거로 방금 전까지 전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매고 있었는데 지금은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군요. 내 양복 겉옷을 어떻게 했나요? 미스터 리스.》
「없애버렸죠. 침대에 양복을 입고 눕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렇게 말하며 커다란 손바닥으로 핀치의 배를 덮었다.

안경을 도로 콧잔등 위로 돌려놓은 핀치가 혀를 끌끌 찼다. 배를 덮은 손바닥은 조용히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에 셔츠가 위로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피부가 드러나자 리스의 손이 슬그머니 셔츠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재차 말하지만 당신의 잠재의식엔 문제가 있다니까요, 존.》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요?」
《그럼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흉부를 가로질러 작게 솟아오른 돌기를 집착적으로 찾고 있는 움직임에 핀치가 항의했다.
《당신, 지금 내 젖꼭지를 만지고 있어요.》
「오, 그래요. 이거 정말 기분 좋네요. 그리고 당신도 기분 좋아 보여요.」
《그렇게 보여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썩 좋진 않답니다. 그러니 꼬집지 말아요.》
「미안해요. 아파요?」
「내가 아팠으면 좋겠어요?」
「그런 건 아니고.」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는 거군요. 흐음.......... 난처하군.》

꿈이지만 핀치는 핀치다. 끌어안긴 상황에서도 그 사내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사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당신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정상일 수도 있어요. 많은 십대 청소년들이 아이돌 배우나 가수와 성관계를 하는 꿈을 꾸죠. 그리고 직장 상사나 그들의 심리 상담사와 섹스하는 꿈을 꾸기도 해요. 새롭게 형성된 심리적 유대감이 무의식에서 떠올라 꿈속에서 그런 방식으로 표현되는 거죠. 심지어 대통령과 관계하는 꿈을 꾸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재수가 좋을 거라며 복권을 사죠.》
핀치의 셔츠 단추를 허겁지겁 잡아뜯다 말고 리스가 비명을 질러댔다.
「맙소사! 난 오바마와 섹스하지 않을 거예요!」
《알아요. 그리고 복권도 구입하지 않을 거구요.》
여기서 중요한 건 따로 있다며 핀치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다음의 질문을 잘 생각해 보아요. 나는 해롤드 핀치와 성관계를 가지고 싶어하는가.》

호흡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상태에서 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핀치와 섹스를 하고 싶으냐고?
침대에는 반라의 고용주가 누워있다. 옷은 잔뜩 흐트러졌지만 표정은 정갈하다.
그러자 돌연 혼란스러워졌다.
「어.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럴 거라 생각해요.》
핀치가 리스의 손을 잡고 자신의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리스는 깜짝 놀랐다.
꿈속의 핀치에게는 성기가 없었다.

『젠장.』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눈이 번쩍 뜨였다.
눈만 뜨였던가, 튕겨나가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네요, 미스터 리스. 옆집 아기가 또 밤새 울었나요?』
스트로베리 크림 도넛을 입에 물고 핀치가 질문을 던져왔다.
커피중독자 사내는 오늘따라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며 우왕좌왕하고 있다.
멋쩍게 웃던 리스는「별 거 아니에요」라고 답하며 핀치를 피해 애꿎은 벽을 쳐다보았다.

Posted by 미야

2012/11/15 10:24 2012/11/15 10:24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730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revious : 1 : ... 491 : 492 : 493 : 494 : 495 : 496 : 497 : 498 : 499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4648
Today:
16
Yesterday:
135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