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23

사흘 기간으로 비즈니스 호텔을 예약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번호가 나온다면 아마도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 도서관에서 죽치고 있게 될 것이 뻔하니까. 개와 같이 입실할 수 있는 호텔을 찾느라 고생을 했다. 그나마 반려동물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취한 호텔에서도 베어의 커다란 덩치를 보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흡, 이러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개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훑어보고는「젠장, 크잖아!」작게 중얼거렸다. 핀치는 마치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화병을 깨뜨린 죄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저어, 고양이를 공격한 적은 없겠지요?』
『없습니다.』
베어는 사람을 공격하도록 훈련받은 군사견이다. 성인 남자의 불알을 맛있다고 물어뜯던 녀석이니 아마 작고 귀여운 고양이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을 거다.
『죄송하오나 개를 복도로 데리고 나오실 적에도 반드시 목줄을 착용시켜 주세요. 이동장에 넣지 않은 고양이를 품에 끌어안고 로비로 나오는 고객 분들이 제법 있으십니다.』
호텔 직원은 유혈사태를 걱정하는 눈치다. 난폭한 사냥개가 고양이를 물어죽이면 개의 주인인 핀치만 골치 아프게 되는게 아니다. 미국은 소송의 나라다.

집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다.
끈이 달린 가방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새로운 장비의 성능을 테스트해본 겁니다.」
리스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실전에서 제대로 써먹으려면 어느 상황에서 어느 제품을 어떻게 사용하는게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하거든요. 아, 당신이 지금 잡아올린 그건 러시아에서 개발한 신형 도청기인데 머리카락 굵기의 미세한 센서가 달려있지요. 무게감이 거의 없죠? 바지 주머니나 양복 안감에 붙이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한계 거리가 좀 짧다는게 흠이지만 쩝쩝 이러고 입맛을 다시는 소리까지 잘 잡아주더군요. 마음에 들어요.」
나에게 입맛을 다시는 버릇이 있었단 말이야?! 핀치는 속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고용주가 패닉에 빠지자 리스는 다시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핀치? 테스트는 끝났어요.」
과연 그럴까.
편집증이 있는 핀치는 속옷부터 넥타이까지 전부 벗어 욕조에 집어넣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드라이크리닝을 해야 하는 종류는 이것으로 못쓰게 되었다. 평범한 샐러리맨의 한 달치 급여가 그렇게 해서 사라졌다.
『망할.』
욕을 퍼붓고 태그가 그대로 붙어있는, 가게에서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었다.

케이블 TV로 전원을 넣자 정치 칼럼니스트들이 저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토론 중인 화면이 떠올랐다. 민주당과 공화당 유권자 분포도 그림이 자료로 등장했다. 지겹다. 정치따윈 질색이다. 리모컨을 조작해 오래된 드라마를 재탕해주는 채널로 바꾸고 엉금엉금 기어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시트에서 세제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역설적으로 강렬한 비누 냄새는 상대적인 불결함을 연상시켜 핀치의 기분을 한층 우울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낯선 사람들이 이 위에 누웠을지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그러니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배꼽 위로 모았다. 잡음처럼 꾸며낸 웃음소리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다. 모자를 눌러쓴 신사가 술주정을 하고 있다.「3루수에서 던진 공이 포수의 엉덩이를 공격했단 말일세.」그게 왜 웃긴 건지 모르겠다. 배경으로 다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웃음소리가 깔렸다. 이히히히. 사람들이 작위적으로 웃고 있다.

남자는 땀투성이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졌고 눈빛은 거칠다. 오랫동안 고문을 당한 탓에 기이할 정도로 눈자위가 붉었고, 반면 안색은 유령처럼 창백하다. 이른바 팔레스타인식 매달기라는 건데 밧줄로 두 팔을 잡아당겨 발끝으로만 서게 만든 뒤 머리로 베갯잇을 뒤집어씌워 일종의 산소 부족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몽롱하고, 어지럽고, 고통스럽고... 시야가 가리워져 몸의 균형을 잡기는 더욱 어렵다. 어쩔 수 없이 비틀거리면 밧줄이 손목을 죄어든다. 그 상태로 몇 시간이고 매달리면 머리는 온전히 한 가지 생각만 하게 된다. 어서 빨리 편안해지고 싶다는 - 심문관이 원하는 건 뭐든지 척척 대답하게 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어쩌라고! 나는 백악관의 변호사에 불과해!」
「듣고 싶은 대답은 그게 아닙니다.」
「무슨 대답을 원하나. 나에게 원하는게 뭔가.」
「기계에 대해 말해주세요.」
「무슨 기계?」
「제가 만들고, 네이슨이 당신네 사람에게 1달러 가격으로 판 기계 말입니다.」
순간 위크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뱀의 미소.
이제 역할이 바뀌어 밧줄에 매달린 사람은 핀치가 되었다.
위크스는 어느새 깔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기계는 당신이 희망했던 것과 달리 보호될 수 없었소.」
「그까짓 사슬로 묶어둘 수 없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었을텐데. 기계는 이제 자유롭게 풀려났소.」
「전부 뒤바뀔 거요.」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두 당신이 잘난 탓이오. 왜 그딴 기계를 만든 거요? 우린 그 책임을 묻고 싶소.」
「마침내 당신을 만나 영광이라 생각하오. 그러니 지옥에서 날 기다리시오.」
그리고 그는 핀치에게 천천히 총구를 겨누었다.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

머리를 망가뜨리는 고속의 회전력. 새카만 빛깔. 온전히 내던져지는 뇌의 잔해.
슬로우모션으로 쓰러지는 자시 자신을 쳐다보며 핀치는 어둠에 삼켜지는 기분을 느꼈다. 무섭다고 느끼기 이전에 쓰나미처럼 덥쳐오는 존재가 압도적이다. 신경이 뚝 하고 끊어지려 한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쥐어보려 했지만 두 팔은 허공을 갈퀴질할 뿐이었다. 순간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위험하다.

구식으로 생긴 전화가 시끄럽게 소리를 냈다.
울리는 전화통을 향해 베어가 거칠게 짖어댔다.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베..........어?』
개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전화벨이 그쳤다.

『401호로 걸려온 내선 전화, 외선 전화 모두 없었습니다. 어쩌면 혼선이 된 모양입니다. 낮이 되면 기술자를 불러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그게 아니면 꿈을 꾼 거라며 호텔 직원이 눈을 가늘게 떠보였다. 이 손님은 어딘지 모르게 밉상이다.
『것보다 늦은 시각에 공포 영화를 큰 소리로 틀지 마세요. 갑자기 비명소리가 무섭게 들렸다고 옆방에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아, 네. 네.』
『괜찮으신 것 같으니 저는 그럼 가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방문을 닫다 말고 핀치는 퍼득 고개를 들고 복도 가장자리를 쳐다보았다.
CCTV 카메라 렌즈는 어디에나 있다.
『.......... 지금도 내가 보이니?』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핀치가 속삭였다.

Posted by 미야

2012/11/14 12:45 2012/11/14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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