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가장 높은 위치는 보통 성당의 종루이거나, 마을 제일 갑부의 거실, 내지는 마을회관의 지붕인 경우가 다수이다.
회장님 거실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번의 경우는 다행히 마을회관 옥탑이었다.
『어여차.』
고소공포증이 없는 입장에서 밧줄 하나 없이 지붕 꼭대기로 기어올라가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내 경우는 실족하여 아래로 굴러떨어진다고 해도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감도 전혀 없다. 머리통에 구멍이 뚫리겠어, 대퇴골이 절단나길 하겠어. 고양이처럼 사뿐 내려앉아 어디서 낙엽이 굴러갔나 보다 하고 딴청만 피우면 된다.
다만 짜증나는 건 걸레로 닦아낸게 100년은 지난 듯한 더러운 기왓장과, 더하기 강풍이다. 검정색 신관 바지를 기어코 쥐색으로 만들고야 마는 비둘기의 배설물은 그렇다치고 높은 곳으로 부는 바람은 정말로 장난이 아니다.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치고, 망토 자락은 활짝 편 배트맨의 날개가 되어버린다. 눈을 뜰 수가 없다. 때로는 커다란 우산을 든 메리 포핀스처럼 몸이 훌쩍 위로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이런데도 높은 곳이 좋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얼간이지.』
높은 곳이 뭐가 좋냐. 눈을 가늘게 뜨고 쳇 소리를 냈다.
오늘의 날씨는「때때로 돌풍이 불 것으로 예상되니 각별히 주의할 것」. 재수 옴 붙었다.
『따뜻한 온돌방에서 귤이나 까먹고 뒹굴거렸으면 소원이 없겠구먼.』
정말은 그따위가 소원일 리 없다. 그래도 일종의 입버릇이 되어버린 푸념을 읊어대며 마을회관 옥탑 꼭대기에서 포지션을 잡았다.
자, 그럼 어디... 손가락 마디를 뚝뚝 꺾으면서 크게 호흡해봤다.
내가 소환한 렛셔 데몬은 모두 셋.
그러나 두 마리는 현재 본부(?)에서 머리에 수건 한 장 걸친 채 대기 중이고 본 무대로 올라온 건 한 마리다. 필요 이상으로 소동이 커지는 건 싫다고 리나가 미리 얘기해둔 것도 있겠다, 나 역시 그건 반대다. 하여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카드 전부를 꺼내어놓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일단은 분위기 파악부터.
인적이 드문 장소에 소환의 마법진을 떠오르게 한 뒤에 딱 소리나도록 손가락을 튕겼다.
검은 오라와 함께 마법진 속에서 척 보기에도 무섭게 생긴 털복숭이 데몬이 떠올랐다. 빠직거리며 사방으로 음전기가 방전되었다. 데몬이 두 팔을 벌리며 어금니를 드러냈다.
마계로부터 온 터미네이터여! 출동, 렛셔 데몬!
『셔터가 내려진 꽃집 앞에서 올 누드로 시위하라!』
말해놓고 보니 영 이상하군.
바람에 날려 눈가를 콕콕 찔러대고 있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가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머리 핀 하나를 가지고 올 걸 그랬다. 아니면 헤어 밴드라도...
순간 담벼락이 무너지는 쾅 소리가 나면서 비둘기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최초의 난동질은 사람이 없는 가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점포 세 놓습니다」라고 푯말이 붙어있거나「금일 휴업」안내가 붙은 장소여야 했다. 나로선 상당히 재미 없는 일이다. 그래도 사전에 리나는 반드시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두 명 정도 사상자가 나는게 모양이 좋지 않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어봤더니 그녀는 펄쩍 뛰며「돌았냐!」라고 했다.
그래. 돌았다고 하지, 뭐.
『돌아라.』
내 지시에 따라 주먹을 불끈 쥔 렛셔 데몬이 빙글빙글 돌며 벽을 후려쳤다. 파편이 고속으로 튕겨나갔다. 세 번 돌고, 네 번 돌고, 다섯 번 돌고... 배경 음악은 프린세스 츄츄다.
『빙빙 도는 것도 나쁘진 않아. 끝내주잖아?』
돌 무더기 박살나는 굉음에 놀라 달려나온 사람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광경을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지켜보며 만족감에 젖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도는 것이다. 가게 유리창을 박살내고, 간판을 갈가리 찢고, 진열된 상품을 후리고, 양념으로 쿠오오~ 하고 크게 울어 사람들의 귀를 터지게 만드는 것이다. 보너스로 철제 금고를 들어 땅에다 패대기 쳐라. 여기서 금고와 연결된 비상벨이 시끄럽게 울리면 효과는 더욱 극적으로 변할 것이다.
『드디어 나타났군! 이 괴물!』
3류 연극 무대에서나 나올 법한 진부한 대사를 읊으며 자칭 정의의 용사들이 때 맞추어 등장했다.
『얌전히 오라를 받아라!』
암행어사 출두인가? 급조한 티가 팍팍 나서 조금 웃겼다.
『너의 악행을 이 정의의 용사가 용서하지 않겠다!』
에이. 그건 아멜리아 공주의 18번이잖아요.
어쨌거나 그 금발의 검사 옆으로는「그 금고, 부탁이니까 나에게 던져줘~♡」라는 마법사가 찰싹 붙어 있었다.
던지면 뭐요. 그 무거운 걸 등에다 지고 달아날 것도 아니잖습니까.
시큰둥하게 웃으며 렛셔 데몬에게 명령을 내렸다.
공격하라.
가짜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멋지게 날려봐라.
『카아악~!!』
렛셔 데몬이 아구를 벌리고 지옥의 불길을 토해 땅을 녹였다. 제법 가까이 접근했던 가우리는 깜짝 놀라 한쪽 다리를 들고 겅중 뛰었다. 그리고는 어디엔가 있을 나를 향해 항의했다.
『이봐! 세게 나오잖아!』
그럼 약하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설렁설렁 굴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게 들통날 수 있다. 하여 나는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대응하기로 하고 마을회관 지붕 위에서 저주의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순간 렛셔 데몬의 눈이 시뻘겋게 변하면서 털을 부풀렸다. 감춰진 손톱을 꺼내 칼처럼 휘두르면서 간단하게 은행나무 가로수를 두짝냈다.
모쪼록 잘 피하십시오, 두 분. 전 사정 봐주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아요.
『에그머니나!』
옆으로 굴러오는 통나무를 피해 재주넘기를 해낸 리나는 가쁜 숨을 참아가며 담벼락 쪽으로 잠시 몸을 기댔다. 그걸 놓치지 않고 렛셔 데몬이 긴 손톱을 가로로 휘둘렀다. 간발의 차이로 리나는 목이 잘릴 뻔한 위기를 넘긴 그녀는 손으로 마력을 모은 뒤 허겁지겁 모듬뛰기 했다.
『라이팅!』
화이어볼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녀가 대단히 가여워지려 했다.
『슬리핑!』
마음 같아선 실제로 던지고 싶었던 건 뒷면으로 강철판을 덧댄 전용「응징의 슬리퍼」가 아니었을까.
『비키니 언더웨어!』
아주 발악이다.
이렇게 마나님이 생 쇼를 벌이는 동안 가우리는 검으로 무장한 채 뒤편에서 분위기만 살폈다. 공격에 가담하지 말라고 미리 언질을 단단히 받은지라 거리를 가까이 좁힐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렛셔 데몬이 그를 있어도 없는 척하는「깍두기」취급을 할 거라고 기대하면 곤란하다. 데몬은 입을 벌렸고 화이어볼에 버금가는 어둠의 에너지를 들입다 토해냈다.
『꺄아아!』
가우리만 놀란게 아니다. 리나도 많이 놀랐던 것 같다.「정말로 우릴 죽이려는 거냐!」라며 악을 쓰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화염은 그녀의 머리를 그슬렸고, 가우리의 싸구려 철검을 2/3 가량 녹였다.
다섯 번 정도 구른 뒤, 리나는 벌떡 일어나 종주먹을 쥐었다.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거냐?!』
모릅니다. 이왕 하려면 철저히 합니다, 이 제로스는.
『이거 미치겠네!』
마구 날뛰라고 한 건 리나님이 먼저잖수. 분부대로 날뛰고 있을 뿐입니다.
『생각 같아선 데모나 크리스탈이라도 날리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고! @#(#*@~!!』
저 뒤에 생략된 의미불명의 외침이「메로우 형제들은 언제나 도착하는 거야~」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으, 썅~!!』
바나나 껍질을 밟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주룩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무너진 벽돌이 탄환처럼 날아들었다.
앗! 조금은 위기상황?
『션! 엄호해!』
『알았어, 형!』
렛셔 데몬이 집어던진 벽돌에 맞아 리나의 머리통이 깨지는 건 아닌가 걱정하던 찰나, 희뿌연 먼지 구름 속에서 두 개의 실루엣이 마침내 나타났다.
덩치가 큰 쪽이 장총을 들고 들입다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하는 화약 터지는 굉음에 맞추어 디크가 리나의 팔을 세게 끌어당겼다.
『엎드려! 베이비!』
『지금 누구더러 베이비라는 거야! 콜록...』
『그럼 그냥 팔 놓는다.』
『놓지마! 놓지 말라고!』
연약한 척 한게 아니라 정말로 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잘 갈아댄 도끼날 같은 렛셔 데몬의 손톱이 코앞에서 붕붕 소리를 내고 있음이다. 균형을 잃고 상체를 비틀거리는 순간, 썩독~ 하고 앞머리가 한 웅큼이나 잘려나갔다. 동시에 리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아차... 높은 곳에서 구경하고 있던 나는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이건 실수다. 내일 아침이면 날 죽여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겠군.
『뒤로 물러서!』
리나를 뒤로 밀치고 디크가 장총을 꺼내들었다.
『거치적거리며 돌아다니며 방해하지 말고.』
헤에~ 저 친구, 쌓인게 있었군. 리나에게 싫은 소리 들었던 걸 고스란히 되돌려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총알을 장전했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다시금 움직여 방아쇠를 당겼다.
「장전과 동시에 발포」가 결코 쉽지 않다는 건 제르가디스의 설명으로 이미 잘 알고 있다. 허구헌날 밥 먹고 총 쏘는 훈련만 해도 장전까지 10초가 넘어간댄다. 그런데 저 친구는 5초를 약간 넘기고 있다. 자는 시간에도 총 쏘는 연습을 했나 보다. 한 방 갈겼다 싶었는데 눈을 번득거리며 벌써 철컥 소리를 내고 있다.
『칫, 은탄환이 별 효과가 없군. 션! 결계부터 만들어라!』
『이미 하고 있어!』
『그럼 서둘러! 녀석이 불을 대포처럼 토하려 하고 있다!』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도구만으로 데몬을 진압하는 걸 구경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리나는 멀직히 물러서서「오늘 괜찮은 거 본다」식으로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렛셔 데몬을 조정하는 일도 잠시 잊고 그들의 움직임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동생 션이 주머니에서 눈부시게 하얀 가루를 그집어냈다. 밀가루는 아니고... 폭약 가루의 색은 검정이니까 화약은 아니다. 소금? 그걸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이쪽 저쪽 몇 군데 분산하여 뿌렸다.
리나나 가우리의 위치에선 저게 뭘 뜻하는 것인지 잘 안 보일 것이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내 입장에선 그게 어떤 것이고 어떤 모양인지가 훤히 보였다.
데몬을 둘러싼 다섯 개의 꼭지점... 펜타클럼 리클러다.
호오, 이거 깜찍하다. 감탄하여 턱을 어루만졌다.
『생각을 잘 하는데. 완전 봉쇄는 불가능해도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 수는 있지.』
탕탕, 하고 은탄환이 다시 날아갔다. 동생이 결계를 만드는 동안 형은 렛셔 데몬이 동생에게 덤벼들지 못하도록 산발적인 공격에 들어갔다.
『뭐 하냐, 동생! 계속 꾸물거릴 거냐!』
『이제 됐어!』
『오냐!』
기다리던 신호가 떨어지자 디크가 부싯돌을 꺼냈다.
팟- 하고 작은 불똥이 튀었다.
순간 다섯 개의 하얀 가루 더미에도 불이 붙었다.
렛셔 데몬이 주춤거리는 걸 확인하자 디크는 품속에서 40cm 가량의 은색의 길죽한 파이프 같은 걸 꺼내들었다. 순식간에 달음박질, 그걸 데몬의 턱 아래서부터 위 방향으로 힘껏 찔러 올렸다.
『어둠은 어둠으로, 먼지는 먼지로.』
저주의 주문을 읊조리며 손을 놓았다.
퍼엉 하고 눈부신 빛이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렛셔 데몬의 머리가 몸통에서부터 깨끗하게 분리되었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