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04

핀치가 요즘 냉장고에 집착하고 있다.
새 모델이 필요해졌나 - 쓰던 냉장고가 갑자기 고장이라도 났나 - 생각했다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3초밖에 안 걸렸다.
핀치는 부자다. 그것도 신분의 발각이라던가 골치 아픈 법률 문제만 없으면 인공위성이니 우주왕복선이니 하는 걸 현금으로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부자라서 냉장고 카달로그를 뒤적거리며 무이자 할부 기간이 어떻게 되는지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부자는 물건을 고르지 않는다. 부자는 사람을 고르는 법이다.

어쨌거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리스는 모르는 척했지만 핀치는 자신이 가진 마법의 능력을 사용해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냉장고 사진을 있는대로 긁어모았다. 그리고 무엇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사진들을 감상했다.
「자기 집 냉장고 모습을 찍어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보여주고자 하는 건 무슨 심리일까.」
리스가 가진 상식으로는 판단이 불가능했지만, 아무튼.
전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짓을 저질렀다. 일본에서, 독일에서, 그리고 영국에서「지금부터 공개하겠습니다. 쨔잔~」이랬다.
아마 무의식적인 행동이었겠지만 그의 고용주가 안경을 고쳐 썼다.
얼핏 보면 엄한 포르노 사진을 다운로드 받고 있다고 착각하겠다.

『재밌는 거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건 거짓말이다. 리스는 병풍처럼 핀치의 등 뒤로 가서 팔짱을 꼈다.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전에 취하는 사전 포석으로서 포로를 심문할 적에 써먹으면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다. 주먹을 코앞에서 흔드는 것보다 살기를 띄우고 상대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것이 공포감을 곱절로 자극하게 된다. 리스가 그렇게 했을 적마다 포로들은 펄쩍펄쩍 뛰었고, 총으로 쏘지 말라 애원했으며, 더러는 순교를 예감하고 코란을 암송했다.
목덜미가 시원해지자 핀치는 상체를 비틀어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가 눈빛으로 질문했다.
「거기서 내 목이라도 조르려고요?」
리스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신뢰 앞에선 협박을 가장한 행동이 안 먹힌다.

『이 친구는 칠칠맞은 성격이겠군요. 쓰레기통이 따로 없군.』
그래서 핀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남들 냉장고 사진을 감상하며 촌평을 늘어놓는 편을 선택했다.
음... 그런데 그게 은근히 재밌었다.
『바퀴벌레가 춤을 추겠구먼. 여기 이 사람은 냉장고 청소라는게 뭔지 모르는 눈치입니다. 대단히 지저분하군요. 하지만 이런게 어쩌면 일반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꾸역꾸역 비닐봉지 채 식품을 처넣는다. 나중엔 그게 뭐였는지 잊어먹는다. 하여 밑에서부터 야채가 썩어간다. 그래봤자 냉장고 주인은 문을 열고 치즈와 맥주만 꺼내어 먹는다.
『인스턴트 식품 찬미론자도 있군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전부 냉동 피자...』
『와우, 이걸 봐요. 이 남자는 연어 한 마리를 통째로 넣어뒀어요.』
『그걸 어떻게 넣었지.』
『것보다 어떻게 먹으려는 걸까요.』
『음... 구워서?』
『그럼 그걸 날로 먹겠습니까, 미스터 리스.』
당연한 거지만 광고지에 나오는 이미지 사진처럼 깨끗하게 정돈된 냉장고들도 있었다. 핀치가 속도가 붙은 손가락 움직임으로 이미지들을 클릭했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냥 텅 비어있는 냉장고도 나왔다. 사진을 올린 사람은 자기를 가난한 샐러리맨이라고 소개했다. 남자는 물가가 비싼 도쿄에 거주한다고 서툰 영어로 적었다. 그가 가진 건 미네랄 워터가 세 병.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이 전부여서 보고 있자니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리스 씨의 냉장고를 닮았네요.』
『네?』
『아닙니다.』
『우리 집 냉장고요?』
『아이, 깜짝이야. 몹쓸 장난을 쳤네요. 포장지에 인쇄된 사람 얼굴이 귀신처럼 보여서...』
핀치가 딴청을 부렸다.
리스는 다시 팔짱을 끼고 핀치의 뒤통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물론 효과는 눈꼽만치도 없어서 그의 고용주는 펄쩍펄쩍 뛰지도 않았고, 총으로 쏘지 말라 애원하는 법도 없었으며, 순교를 예감하고 눈을 감지도 않았다.

『일본에서 파는 편의점 도시락 같은게 내 냉장고 속에 들어가 있을 리가 없잖아.』
투덜거리긴 했어도 생수병과 맛이 없어 먹다 남긴 즉석식품이 냉장고 속에 보관된 음식물 전부이다.
아, 틀리다. 먹기 싫어 방치한 사과 한 알이 있었다.
오른쪽에서 왼편으로 눈으로 한 번 훑고 끙 소리를 내었다.
『비슷하긴 한가?』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이번에는 왼편에서 다시 오른쪽 방향으로 훑어보았다.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군.』
순간 잔소리를 닮은 핀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제가 주는 월급으로 수류탄은 그만 사고 영양가 높은 음식들을 섭취해봐요. 건강이 곧 자산이라고요.

사과는 절반이 썩어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괜찮아 보였다.
리스는 흠 하고 숨을 들이마신 뒤, 서랍에서 과도를 꺼내 썩은 부분을 도려냈다.
서걱.
어? 하는 사이에 엄지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2/10/18 09:32 2012/10/1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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