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2-04

『누가 내 책상을 건드렸어.』
『설마.』
『나는 서랍 열쇠를 꽂아둔 채로 두지 않아요. 열쇠는 항상 보관 통에 따로 넣어둡니다.』
이곳에서 도둑을 염려한 적은 없다. 열쇠는 그저 상징적이다.
하지만 꼼꼼한 성격의 조스 카터는 부재시 책상 서랍을 반드시 잠그고 그 열쇠를 나무로 만든 보관통 - 사실은 기존 양념통에 넣어두었다.
부엌에서 쓰던 양념통을 깨끗이 닦아 사용하고 있는 만큼 딸각 소리를 내며 열리고 닫기는게 가지고 있는 기능의 전부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든 열쇠를 끄집어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간도 크게 관리사문관의 책상 서랍을 멋대로 열고 뒤져볼 용자는 마을에 없다.
그녀가 작정하고 구둣발로 밟으면 엄청 아프다.

『요즘 신경을 써야 할 일들이 많았잖습니까. 열쇠를 구멍에 꽂고 잊어버리신 걸 거예요.』
크리스티나는 올해 열일곱이다. 3월 중순부터 행정 건물의 청소 업무를 시작했다. 한창 머리 모양에 신경을 쓰고 외모를 꾸밀 나이에 걸레나 빨고 유리창을 닦는 허드레 일을 해야 하느냐 불만이 많을 것도 같은데 의외로 밝은 표정으로 싹싹하게 잘 지내고 있다.
1년 정도 뒤에는 각종 문서를 정리하고 작성하는 법을 가르칠 생각이다.
크리스티나도 그걸 희망하고 있다.

『누군가 몰래 열쇠를 꺼내 관리사문관님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면 증거를 남기지 않았을 겁니다. 서랍에 열쇠를 꽂아둔 채로 그대로 뒤돌아 도망갈 바보가 있을까요.』
듣고 보니 그 이야기가 맞다.
카터는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게 아닐까 자책하며 의자에 푹 파묻히듯 앉았다.
『나이가 들면 없던 건망증이 생기는 걸까.』
『나이 탓이 아니고 스트레스 탓이죠.』
범인이 스트레스라고 지적한 크리스티나는 창틀에 내려앉은 먼지를 물걸레로 닦아냈다.

- 진짜로 내가 열쇠를 구멍에 꽂아둔 채로 잊어버린 거라고?

반짝거리는 작은 열쇠를 눈앞으로 흔들어대며 이마를 찡그렸다.
『혹시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방문한 사람은 없었나요, 크리스티나.』
『시멘스키 아저씨가 - 아니. 시멘스키 경비병님이 잠시 들리셨습니다. 하지만 관리사문관님이 안 계시다는 걸 알고 5분 뒤에 바로 나가셨어요. 급한 용건은 아니니까 나중에 다시 들린다고 하셨고요.』
시멘스키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는 올곧은 사내다.
그 즉시 표정이 풀어진 카터는「나에게 건망증이 생겼어, 이제 나도 늙었어」생각을 곱씹으며 밀렸던 서류 작업으로 눈을 돌렸다. 교역 세금을 납부할 시기가 한 달 뒤로 다가왔다. 하기 싫다고 미뤄두면 나중에 수면 시간까지 쪼개면서 매달려야 한다.

『우웈』
이상한 소리를 내며 넙죽 엎드린 장본인은 후스코다.
현장에서 범죄행위가 발각되었으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게 당연하긴 하다만, 후스코가 자지러진 까닭은 남의 집 주방에서 꿀단지를 탐내다가 그 현장을 들켜서가 아니었다.「이 녀석 봐라?」이러고 허리춤에 손을 올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존 리스였고, 그는 후스코의 코앞에서 - 그 간격은 겨우 2cm - 사람 머리통을 날려버린 전적을 가진 사내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줬다는 감사함보다 얼굴 가득히 뒤집어쓴 피의 냄새가 더 생생했기에 소년은 리스의 얼굴만 봐도 오금이 저렸다.

그런 사람 앞에서.
병신처럼 꿀을 훔쳐 먹다 멋지게 들키고.

『아, 그, 저는. 교, 교수요?』
『교수?』
『아으, 아니오. 핀치요. 항상 이 시간엔 집에.』
『그게 핀치는 집에 없는데. 버섯을 따러 간다며 나갔거든.』
『죄, 그렁요?』
『괜찮아. 꿀을 먹은 것 정도로는 화내지 않아. 그나저나 무슨 용건이라도?』
곱슬머리 소년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순서가 엉켰다.
『아버버버지가 감사의 두 분을 식사초대가 인사를 드릴 겸 하셔서.』
『그거 정말 고맙구나.』
리스의 두 손이 어깨에 누르자 소년의 안색은 훨씬 더 파리하게 변했다.
그 행동이 친밀감의 표현인지, 아님 위협인지 후스코의 입장에선 구분이 불가능했다.
『우리가 몇 시까지 가면 되겠니, 후스코.』
『일곱일곱일곱.』
『그렇구나.』
『그럼 전 여기서 이만.』
『현관까지 배웅해주마.』
피식 웃는 리스의 얼굴이 어쩐지 저승사자를 닮은 것 같아 염통이 쫄깃거렸다.

아이를 내보내고 - 사실은 거의 내쫓다시피 한 뒤, 리스는 문단속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리가 성치 않은 양반이 숲으로 들어가 버섯을 캐오겠다는 말을 꺼냈을 적에 리스는 같이 가자는 말을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물론 염려되는 점은 많았다. 그래도 핀치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버섯 어쩌고는 일종의 핑계임이 분명했다. 그 정도는 단번에 눈치챘다. 그래서 흔쾌히 그러라고 말했다.

「해질 무렵에는 돌아옵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요. 너무 늦는다 싶으면 찾으러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미스터 리스.」

빈 바구니 하나 들고 집을 나선 핀치의 뒷모습은 두 귀를 축 늘어뜨린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땅바닥만 쳐다보며 터벅터벅 걷는데「너는 오늘부로 해고야」통보를 들은 직장인의 비애가 느껴졌다. 물론 버섯은 땅바닥에서 자라긴 한다. 그래도 그건 흡사 죽으러 가는 모습이었다.
『내 문제로 고민하는 거라면 그냥 내 앞에서 고민할 것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핀치가 사라졌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는 여전히 높은 곳에 걸려있었지만「이제 곧 땅거미가 몰려올 것이다」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괜찮은 핑계가 하나 생겼다. 후스코의 가족이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러니 버섯 따는 일을 중단시키고 그만 집으로 데려와야 하지 않겠는가. 초대에 응하려면 사전에 머리를 빗고, 수염도 깎고, 옷도 갈아입어야 한다. 리스는 속으로 핀치에게 할 말을 연습했다. 그만 궁상떨어요 - 이건 아니고.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 - 이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런데 처음 짐작했던 장소에선 핀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놀란 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어.』
아마도 출구를 찾아, 그러니까 핀치가 리스를 처음 만났던 지하 장소로 내려갈 방법을 찾아 아마도 여기쯤이겠거니 하는 부근을 서성이고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탈출용 해치가 있던 곳으로부터 반경 100미터를 빠르게 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섯을 따는 사람의 인영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핀치! 어디에 있어요?! 핀치!』
누가 잡아갔나. 아님 발을 헛디디고 굴렀나.
그의 이름을 부르는 리스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마지막에는 고함이 아니라 거의 천둥 수준이었다.
『해롤드!』
완전히 헛짚었다.
그는 움무의 시신이 발견된 벼랑 부근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를 의식했기에 금줄 안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금줄 바로 앞에서 바구니를 무슨 양동이처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렇게 시야를 차단하고는 한숨을 푹푹.

Posted by 미야

2012/09/28 10:08 2012/09/2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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