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 of interest (45)

인간은 추잡하고, 나태하고, 거짓말하고,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가식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슨 잉그램 가라사대, 재앙 뒤에 희망 있다. 진정한 죄악이란 불의에 순응하고 더 나아지길 포기하는 것이다.


남자는 제대로 된 양복을 입고, 근사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렇다면 멋진 신사로 보였느냐, 점수를 매기자면 그건 아니었다. 키가 작다거나, 배가 올챙이처럼 나왔다던가, 대머리가 번들거린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뭐랄까, 무슨 편집증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속된 말로 뽀대가 나지 않았다. 그는 좌우를 병적으로 힐끔거렸고, 새똥이 떨어지면 큰일 난다는 투로 가끔씩 위를 쳐다보았다. 아니면 추락하는 화분을 겁내어 하는 것도 같았다.
『요즘 고층 건물들 창문은 열리지도 않는다고.』
뉴욕엔 워낙에 정신병자가 많은지라 행인들은 그 남자의 동작을 그리 신기해하지 않았다. 깡통을 스틱으로 두드리며 푼돈을 구걸하던 에브라힘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면 은박지로 포장한 헬맷만 착용한 채 나체로 도로를 전력질주 해줘야 한다.「나는 지금 키아누 리브스와 텔레파시로 교신하고 있다고요」외쳐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뒤집어 말해 그 정도 미치광이 짓을 하지 않는 이상 평범해 보인다.

폴 앵카의 다이애나 노래를 멋대로 어레인지하여 재즈 풍으로 흥얼거리던 에브라힘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사내를 응시했다.
『쯧쯧. 주의가 산만하니 저렇게 되지.』
키가 큰 남자와 정면으로 부딪친 양복쟁이가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떨어뜨렸다. 키가 더 큰 쪽이 조심하라 쏘아붙였다. 안경을 쓴 사내는 미안하다 사과하며 비틀거리는 자세로 떨어뜨린 물건을 주웠다. 그는 다리가 불편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노력을 하고 나서야 서류봉투 두 개를 다시 품에 안았다.
음... 그런데 원래부터 떨어뜨린게 두 개가 맞던가?
잘 모르겠다. 에브라힘은 콧노래와 같이하여 발 박자를 맞췄다.
내 사랑, 나를 안아 주세요, 꼭 안아 주세요. 오, 다이애나 내 곁에 있어주세요.
절름발이 사내는 마침내 2차선 도로를 횡단하여 그의 시야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후스코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리스로부터 부탁받고 로버트 닐슨의 뒷 이야기를 설렁설렁 캐볼까 했는데 HR의 시몬스가 몸소 납시어「너,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자빠졌어」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시몬스는 마른 체격임에도 뼈가 단단한 몸집이다. 키도 크다. 뚱뚱보 후스코는 몸무게로는 그를 이겨도 맷집으로 따져선 명함을 못 내민다. 시몬스가 주먹으로 때리면 철판이 움푹 휘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게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아는 까닭은 상납을 거절한 풋내기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걸 몸소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꽉 잠긴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를 빌며 후스코가 말했다.
『당신은 51번서 소속이잖아요.』
『그러는 너는 8번서 소속이냐?』
『그건 아니지만요...』
이럴 적에야말로 헤실 웃으며 농담을 꺼내야 하는데 더위 먹은 사람처럼 숨이 턱 막혔다. 시몬스는「계속해, 터놓고 전부 다 말해봐」표정을 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3초간 침묵했다. 후스코는 날렵하게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본 한 마리 생쥐가 되어 쫄았다. 그는 겁쟁이다. 다치거나 얻어맞는 걸 싫어한다.

『어흠, 그러니까... 밑천 좋은 얘기가 있다고 들어서요.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무슨 밑천.』
『애들 장난감 놀이인데... 어, 음. 그게 거시기... 뭐랄까. 댁도 알잖아요.』
『하여간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군.』
『어이없다는 표정 짓지 마쇼. 혼자서 아이를 키우려면 돈이 들어요.』
후스코는 발끈한 얼굴이 되었지만 남의 이목을 염두에 두고 목소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들이 속한 세계는 융통성은 요~만큼도 없는 곳이다. 소문이 돌면 좋을게 없다. 시몬스도 그 점을 잘 알기에 눈짓으로 인사하는 동료들을 향해 목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끼워달란 말은 하지 않아요. 난 그저 물어보려고 했을 뿐이라고요.』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 흥분하지 말게.』
『흥분하지 않았어요. 얼굴에 땀만 났지. 그런데 문제가 있는 겁니까. 제독(*별명)은 어디로 가고 댁이 왜 등장하는 건데요.』
시몬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럴 일이 있어. 닐슨은 병가를 냈어.』
『엉? 병가라뇨. 어디 아프대요?』
『글세. 병명은 맹장염이라고 했는데 아픈 곳이라면서 머리를 움켜쥐었으니 진짜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건 아닐게야.』
거기까지 말한 시몬스는 주먹을 쥔 손으로 후스코의 가슴팍을 가볍게 툭툭 쳤다.
『자네도 귀찮아지기 싫으면 사나흘 정도 맹장염에 걸려두라고. 그게 싫음 상한 도넛이라도 주워먹고 설사병에 걸리던지.』
후스코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런 건 상당히 안 좋다.

『교수, 교수!』
《나는 교수가 아닙니다, 형사님. 휠체어를 타고 있지도 않아요.(* 엑스맨을 비꼬은 말)》
『하여간요. 원더보이에게 경고를 하시라고요!』
《무슨 일입니까.》
바늘로 찌르면 상처에서 피가 아니라 수은이 흘러내릴 것 같은 상대방은 왜 그렇게 당황하고 있느냐며 반문했다. 후스코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다 말고 손바닥을 마구 흔들어댔다.
『일라이어스요!』
그런데도 교수는 침착했다.
《압니다.》
『뭘 알아요.』
《일라이어스 쪽에서 킬링 체크-인 게임 관련자들을 거리에서 치워버리려고 하고 있지요. 우리에게 명단도 줬어요. 정리해서 곧 그쪽으로 자료를 넘기겠습니다.》
『아이고, 이 병신아. 명단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후스코가 같잖게 욕설을 지분거렸다.
『당신네 원더보이가 함정에 빠질 겁니다. 똑같이 귀찮고 싫은 존재가 둘 있어요. 그런데 일라이어스가 하나만 살려두고 나머지 하나만 목숨을 끊을 것 같수? 개 두 마리를 같은 우리에 가둬두고 불을 지를 겁니다. 내 말이 뭔지 아시겠어요?!』
그러자 핸드폰 저편에서 숨소리가 멈췄다.

Posted by 미야

2012/08/01 14:47 2012/08/0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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