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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후작님.』
아들 역할도 오케이, 딸 역할도 오케이.

이제 그들은「아들도 인버스, 딸도 인버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일어선 그녀는 평상복에 가까운 단순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풀거리는 레이스 장식과 갖은 꽃장식으로 치장한 귀족 처녀들과는 거리가 멀다. 색상은 단아한 감청색. 치맛단과 허리 부위로 금색의 선이 들어간 걸 제외하고는 장식이라는게 아예 붙어있질 않다. 옷차림만 봐서는 슬레진 제국에서도 손가락을 꼽는 부잣집 딸네미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소매 모양새조차 대도시 유행 스타일이 아니다. 아니, 아니. 그 이전에... 죠르프는 무의식중에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뭐랄까, 치마는 치마인데 치마로 안 보인다. 소녀라기 보다는 소년의 느낌이다. 작지만 무지 단단해 보인다. 선이 분명한 얼굴, 대단히 총명해 보이는 두 눈동자. 끝내준다.
그러다 퍼득 느꼈다.
여자라고? 아니다. 저건 남자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죽는 연약한 온실의 꽃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식의 눈빛은 가질 수 없다. 선술집에서 술도 마셔봤고, 한량답게 계집을 껴안고 농탕질도 해본 얼굴이다. 돈 맛을 알고 권력의 맛을 안다. 자긍심으로 심장을 단단하게 하고 간계로 적들을 우롱한다. 화관으로 머리를 장식한게 아니라 튼튼한 철로 관을 만들어 썼다. 사자를 단칼에 찔러 죽이고 온 몸에 뜨거운 짐승의 피를 뒤집어 썼다.
그런데도 호적상으로 열 여섯의 소녀라는 건가. 이건 실수가 분명하다. 뭔가 잘못되었다.

후작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던 것 같다.
무어라 말 한마디 없이 덥썩 손부터 올리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말이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숨을 멈춘 채 기절했다.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구애도 생략한 채 가슴부터 만지깁니까?!

『이봐요!』
반응은 리나 인버스가 더 빨랐다.
가슴을 향해 올라오던 후작의 손을 찰싹 소리내어 후려쳤다.
『댁의 조카분처럼 실수하려는 거라면 진작에 정신 차리세요.』
『하?』
『정말이지 한 핏줄 아니랠까봐.「신이 정해놓은 운명을 부정하고 남자가 치마를 입어, 보는 이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하며, 남의 마음을 농락하는 은밀한 즐거움에 빠져들어 스스로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건가」우짠가 식의 이상한 대사를 늘어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말로 여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답시고 남의 가슴을 막 주물러대는 건 이제 사절이라고요. 척 보면 몰라요? 도대체 세상의 어느 남자가 나처럼 아름답고, 우아하며, 사랑스럽냐고. 새삼 깨닫는 거지만 당신네 가문 사람들은 시력이 나빠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후작은 얼얼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헷갈린다. 저 연령대의 소년이라는 건 때로 소녀들보다 더 섹시한 법이다. 세이렌들은 높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바다 저 깊은 곳으로 배를 침몰시킨다. 본인은 고약한 취미라고 생각하지만 미령의 소년에게 홀려 스캔들을 일으키는 작자도 없지 않다. 뺨에 분칠을 하고, 수컷을 함락시키는 페로몬을 발산하는, 이른바 소년 꿀벌에게 당해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료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귀부인들의 단골 입방아 주제다. 실제로 여장을 한 유명한 남창으로는 마젠다라는 이도 있다. 슬레진 제국의 왕족 중 하나가 마젠다에게 홀려 가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들 쉬쉬하고 있어도 후작은 그 문제의 멍청이가 크리스토퍼 왕자의 아들 알프레드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다. 알프레드는 분노한 아버지에게 의절당하고 지금은 빈털터리 신세로 외국으로 쫓겨난 상태다.
『아앗?!』
그러니 최후까지 확인하는 것이다.
한 번 실패했다고 뒷짐 지고 퇴각할까보냐. 오른손이 아니면 왼손이 있다.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덮었다.
이건가 싶자 후작의 표정이 답지 않게 살짝 흔들렸다.
『가슴이... 저런. 작군요.』
『이게 뭔 짓이야~!!』

- 찰싹.

로머디스는 깨달았다. 그네들 얼음 도련님이 뺨 맞은 사연이라는게 과연 무엇인지를.
그 숙부라는 자가 거짓말처럼 고스란히 그 실수라는 걸 반복하고 있는데야, 뭐.

『이이이이이잇~! 다시 말해두지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그쪽이 잘못한 거예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뭐예요! 잘못을 인정한다면서 왜 그놈의 손은 아직도 원위치로 돌아가지 않는 거죠.』
확실히 원위치로 안 돌아가고 있다. 손가락 끝이 아슬아슬하게 가슴섶에 닿아 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가슴 굴곡을 스치게 된다. 아니, 이미 스치고 있다. 그 당연한 결과로 리나 인버스의 얼굴색은 불타는 석탄 비슷하게 되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화가 치밀어 새빨간 색이다.
그런데도 얄미운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희희락락.
『꽃이 피어난 곳에서 나비는 잠시 날개를 접고 쉬어가는 법이지요.』
『하지만 꽃도 징그러운 송충이는 질색할 겁니다. 자! 장난은 그만하시지요.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저 두 사람은 서로 제대로 된 통성명도 안 했다는 걸 알고는 있나.
뭐, 둘 다 그런 세세한 곳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으니 감히 지적할 의무감을 못 느낀다.
리나는 능구렁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레이워즈 후작을 힘 주어 노려본 뒤에 테이블 위로 지도 하나를 펼쳤다. 그리고는 정확히 한 지점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찍었다.

- 제피리아

바퀴벌레라도 일시에 압사시킬 박력이었으나 그녀의 손가락 끝을 쳐다보는 남자들의 눈초리는 변함이 없다. 아무튼 그들은 통나무 군인, 더러는 그 기질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이곳이 제피리아입니다.』
『그렇군요.』
이어 앙증맞은 손가락은「버닛사 대로」라고 적혀진 길다란 선을 따라 움직였다. 산 밑둥을 돌고, 나지막한 언덕을 두어 개 넘어, 다리를 세 개 지나면 저 반대편으로는 후작의 영지인 사일라그가 있다. 다만 그녀가 가져온 지도는 그렇게 큰 면적을 한 면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는 크지 않아 사일라그의 이름은 사일- 에서 썽둥 잘려나갔다. 하지만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은 그리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다. 어디가 어디인지만 알아볼 수만 있으면 족하다. 거기다 지금 그들이 주목할 곳은 사일라그가 아닌, 그곳으로 이르는 길목이니까.

버닛사 대로.

『여기는 치안 상태가 괜찮아요. 최근까지 도적이 나타났다는 이야긴 듣지 못했어요.』
당연하다. 일직선의 모양을 갖춘 버닛사 대로는 그 별명이「민둥 대머리」이다. 쉽게 말해 길게 뻗어나간 길 가장자리로 몸을 숨길만한 바위라던가, 큰 나무 숲이라던가, 깊은 동굴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일절 없다. 강도짓을 하려면 어딘가로 매복하고 있다가 근처로 굴러들어온 먹잇감을 공격해야 하는데 200미터 떨어진 저만치에서도 사람 머리가 뚜렷하게 잘 보여서야 원... 날씨가 화창하면 가시거리는 그 곱절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칼 들고 어험 헛기침을 하면 그걸로 장사 끝. 알아서 죄다 도망을 쳐버린다. 산적떼 입장에선 주머니 불리기엔 최악의 장소인 셈이다.

그녀는 다시금 손가락을 들어 대로에서 약간 벗어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샛길인 이곳 덤블 길은 길이 외진데다 주변이 모두 숲이라서 매복이 가능하지만...』

- 곰이 산다.

고로 패스. 살인 곰 제이슨 앞에선 산적도 그 위상을 잃는다.

리나는 귀찮게 흘러내린 옆머리를 정리하며 지도의 한 부분을 다시 지적했다.
『이쪽 위킬스로 내려가는 길은 좁아서 마차가 지나가긴 힘들죠.』
그런 연유로 마차를 즐겨 애용하는 부자들은 당연히 그 길을 기피한다. 돈줄이 기피하니 산적들도 기피한다. 위킬스로 내려가는 길은 보따리가 가벼운 농민들이나 나무꾼들, 더러는 사냥꾼들의 한가로운 산책로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두고 볼 것도 없다며 시선을 돌렸다.
『문제는 바로 이곳. 물레방앗간 위쪽으로 이어지는 흙외담 길입니다.』
손가락이 강조의 의미를 담아 둥글게 원을 그렸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산적들이 득시글거렸던 장소이죠.』
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카타트 산맥에까지 이른다.
카타트 산맥이 어떤 곳이더냐. 모험가들의 천국, 검술 수련의 백미, 아울러 저승 사자들의 대기소다. 듣기로는 살벌한 날짐승들의 천국이랜다. 그래서 슬레진의 초대 국왕은 카타트 산맥에서 사람을 잡아먹으러 내려올 야생 동물들을 차단하고자 길고도 지루한 토담을 쌓아 국민을 보호하려 했다.
높이는 약 1미터, 길이는 측량 불가. 오늘날에 이르러 간혹 무너진 곳이 없잖아 있지만 3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문제는 토담 저 건녀편으로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숨으면 감쪽같이 안 보인다는 것.
거기다 높이가 겨우 1미터이니 날쌘돌이들은 한 걸음에 뛰어 넘는다.
그 결과 여차하면 나타나는게 도둑놈들, 내지는 엄마 찌찌를 밝히는 치한, 더러는 강도가 되어 버렸다. 산적들은 밥그릇의 은총을 베푼 격이 되어버린 슬레진 초대 국왕에게 기쁜 마음으로 헌화했다.

『우린 그걸 진작에 헐어버렸지요, 로머디스? 그게 한 4년 전이었던가...』
『물론입니다, 후작님.』
골머리를 썩힌 일부 영주들은 문제의 토담을 곡괭이로 헐어버렸다. 그러나 그놈의 토담이라는 것이 유서 깊은 문화유적지 - 그것도 자신들의 초대 국왕이 만든 - 이고 보니 그 짓도 쉽지만은 않다. 왕실에 밉보여서 좋을 건 없다.
『음? 황태자는 내가 그걸 부셨다고 했을 때도 아무 말 안 하던데.』
『당연하죠!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후작님이니까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주인을 뒤로 하고 로머디스는 땀에 젖은 수건을 비틀어 짰다.

『그래서 말인데요.』
여기서 리나 인버스가 의미하는 건 다음과 같다.
산적 토벌을 하러 나왔다면 구체적인 정보가 있을 거 아닌가.
토담길 최후 토벌의 기억은 정확히 1년 8개월 전이다. 바퀴벌레의 완벽 박멸이 사실상 불가능하듯 토벌대가 도적들을 쓸어버려도 잔당은 매번 남는다. 외눈박이 스미스 일당이 궤멸되면 다음은 다리 털은 면도기로 밀자 형제들이 주름을 잡는 식이다.
이번엔 어떤 놈들일까.
하여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로머디스를 응시했다.

그런데 어랍쇼.
꽃사슴이 뛰어갑니다 하며 로머디스가 고개를 획- 돌렸다.
리나는 다소 어리둥절해 하며 이번엔 죠르프를 바라봤다.
사내는 구두에 뭐가 묻었나보다 식으로 땅만 쳐다보았다.
이봐요들?

Posted by 미야

2008/03/20 16:39 2008/03/2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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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에 쏘였다며 로머디스가 펄쩍 뛰었다.
「무, 무, 무슨? 어쩌라고요?」
「말하세요.」
「뭘요.」
「아무거나 좋으니까 어서! 구정물에서 녹색 아메바가 튀어나왔다는 식의 우거지상은 치우도록 하세요. 옆에 있는 내가 다 불편합니다. 어디서 당나귀가 장송곡을 켜고 있답니까?」

이게 다 누구 덕분인데!
그래도 지적당하니 얼른 얼굴색을 바꾼다. 식탁은 밝고 건강해야 한다. 헛기침하곤 하늘에서 천사의 깃털이 내려온다며 팔을 움직였다. 평소 시인이 되었더라면 하는 로망을 품고 있는 남자다. 밤새 불을 밝히고 벌개진 눈으로 (연애) 소설을 읽는 남자답게 혓바닥이 매끄러웠다.
『이것은 기적과도 같군요. 영주님께서 실력이 보통이 아닌 좋은 요리장을 데리고 있으시니 이 몸은 견디기 어렵게 부럽습니다. 음음, 이 오리 구이는 환상이군요. 들판의 너그러운 향기가 느껴집니다. 거기다 이 부드러운 육즙은 봄철의 새싹을 연상케 하는군요. 바람을 타는 엘프가 이 음식을 혀로 맛본다면 기쁨의 시를 한 소절 읊을 것입니다.』
어이없게 장황하긴 해도 칭찬이다. 남작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족한 요리를 훌륭하다 하시니 주방장이 기뻐할 것입니다.』
『저런, 주방장만 기뻐하면 안되지요. 주방이라 함은 애시당초 아녀자의 영역일지니, 이런 식사를 저희들에게 마련해주신 숙녀분들께도 당연히 인사를 올려야겠지요.』

그런데 여보슈. 다른 집에서야 그런 미사어구가 들어먹히겠지. 하지만 뭐 하나 깜빡했수다. 인버스 가문엔 마나님 자리가 공석이라니까. 젊어서 상처한 남작이 대놓고 슬퍼하는 거 안 보여? 안주인을 칭찬하는 당신의 노력은 지금으로선 되려 긁어 부스럼이라구. 죽은 마누라를 생각나게 하는 네 말에 분위기가 칙칙해졌잖아. 죠르프가 매서운 표정으로 친우의 발을 꽉 밟았다.
『크아악! 아, 아니! 그, 그러니까!』
다행히 인버스 남작은 상인의 재치를 발휘, 상대방의 실수를 너그러히 용서하며 구렁이 담 넘어갔다.
『딸 아이를 칭찬하시니 그 아이도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지! 이 집엔 마님 대신 여식이 있었지! 살았어, 나는 살았어!
로머디스는 죽다가 살아났다며 좋아했다.
아울러 바로 그 순간, 후작도 덩달아 좋아 죽는다 춤을 추고 있었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남작의 자녀들로 넘어갔군요. 잘 했습니다, 로머디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게 보인다. 후작은 급히 포도주 한 모금을 그 입술에 머금었다.
『시장한 뱃통들을 향해 이다지도 훌륭한 구제를 행하셨으니 당연히 칭송받아야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인버스 남작. 우리를 살려내신 숙녀분을 소개해주지 않으렵니까. 기왕이면 명철하다는 소문의 아드님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에 남작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 나에게 아들이 어디가 있어.
그러길 한 3초, 남작은 내 귀가 요즘 영 신통치가 않아 하고 스스로 납득해버렸다. 바닷물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귀를 탁탁 치는 걸 봐라.
『영광입니다. 내일 오전 무렵에 각하의 일행이 모두 떠나실 때 배웅하며 기쁘게 인사드릴 터이니 두 아이 모두 기대에 가득차 즐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이것 봐라? 하고 후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내일 아침 우리들은 반드시 여기서 떠나야 한다는 걸 돌려서 강조하고 있군. 거기다 그「기쁘다」는게 우리가 떠나서 기쁘다는 거야, 아님 나랑 아이들이 인사할 수 있어 기쁘다는 거야. 당연히 전자겠지? 누가 물으면 후자라고 대답하겠지만.
내심 감탄해 마지 않았다. 역시 상인이라 그런가, 아슬아슬한 공중곡예를 잘도 타고 있다. 거기다 이쪽에서 그 말의 뉘앙스를 곱씹어 볼 짬을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바꾸기까지 하고 있다.

『아! 그러고보니 사냥이라 하시었는데 그래, 무얼 좀 잡으셨습니까.』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은 내프킨으로 손가락의 얼룩을 닦아내며 다시 웃었다.
허풍은 태풍과 달라 멀쩡하던 남의 집 지붕을 무너뜨리지 않음이니 남발한다고 하느님이 무어라 하진 않으실 터이다.
『그럼요. 좀 잡았지요. 그렇죠? 로머디스, 죠르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남자가 사이좋게 얼어붙었다. 입안에 든 고기가 수직낙하 해버렸다.
그 화살이 왜 우리에게 날아오는건데?
거기다 후작은 괘씸하게도 확인사살까지 감행한다.
『제 부하들의 검술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유능한 인재들입니다. 사냥 또한 당연히 최고입니다. 1년 전에는 사람을 열 다섯이나 잡아먹은 살인 늑대까지 잡았는걸요.』

로머디스는 작정하고 머리털이라도 뽑고 싶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거리며 극적인 모험담을 기대하는 남작에게 한 잔의 물을 권하고 싶어졌다.
사냥이 어땠느냐고 묻지 마. 죽어라 말 달린 기억밖에 없다.
참새라도 떨어뜨렸어야 뭐라고 말씀드릴 거 아뇨. 이거 돌겠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로머디스와 죠르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게... 좀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에. 이번에도 늑대였죠.』
『요즘 날씨가 보통입니까. 이런 계절엔 그 흔한 토끼도 땅속으로 숨어버리지요.』
그리곤 엑- 했다. 이런! 박자가 안 맞았다. 누구는 잡았다고 하고, 누구는 허탕쳤다고 했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눈에 띄게 허둥대기 시작했다.
『마, 맞습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늑대도 더위를 먹었는지 영 안 보이더라고요. 하하하.』
『물론 잡았죠. 그놈의 토끼들이 하나같이 땅속으로 숨어버리니까 되려 쫓지 않아 그게 더 좋더라고요. 무슨 감자더미처럼 구멍에서 쏙쏙...』
말을 마치자마자 재차 엑- 했다. 또 박자가 안 맞았다!
두 사람은 식은땀으로 죽을 끓여대며 발버둥쳤다.
『어허허허! 그래도 잡았습죠, 늑대.』
『역시 토끼들은 도망을 잘 치니까 그놈의 소득이...』
이쯤되면 엑- 소리도 안 나온다. 엇박자의 귀신 들렸다.

잠자코 경청하던 남작의 눈자위가 의심을 가득 담아 가늘어졌다. 누구는 남쪽으로 바다가 있다고 하고, 누구는 북쪽으로 있다고 한다. 이러면 두 사람이 가진 지도 모두가 십중팔구 가짜다. 정작 바다는 엉뚱한 동쪽으로 있기 쉽다.
가쉽성 신문 기사로 이런 제목이 올라간다.
집중 분석, 과연 사냥에 나서기는 한 건가.
독점 취재, 잡았다는 건가, 못 잡았다는 건가.
합계잔액시산표의 차대변 숫자가 안 맞았을 때처럼 남작이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이제 사냥 설은 아무도 안 믿어주고 있다. 새로운 거짓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음류시인으로의 전직을 이참에 심각하게 고려하며 멋진 이야기를 하나 꾸며보자.
로머디스는 지은 죄를 자복하는 죄인인양 읍소하며 고꾸라졌다.
『이쯤해서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남작님. 짐작하셨겠지만 사실 저희들은 부근으로 사냥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실은...』
『실은?』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은밀하게 도적떼들을 소탕하러 나온 겁니다.』
『하아?』
『도적들이 눈치를 채고 미리 도망가는 일 없도록 하기 위해 사냥이라 철저히 위장을 하였지요. 옷도 평상복으로 준비하고요. 늑대 잡으러 간다며 소문도 퍼뜨렸습니다. 아시겠지만 요즘 도둑들이 오죽 극성이어야 말이죠. 거기다 머리도 좋습니다. 듣자하니 아틀라스의 새로운 영주 하르시폼 경은 숨박꼭질 놀이라도 하는 듯한 도적놈들에게 되려 놀림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쪽으로 출동하니 저쪽으로 달아나고, 저쪽으로 출동하니 이쪽으로 도주하고... 하여!』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아자자자~ 클라이막스다.
『그 망할 도적떼의 뒷통수를 후려치기 위해 몰래 말을 달려 이곳까지 당도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하여 저희들은 표면상 계속하여 사냥 중인 거지요. 비록 수중에 그 흔한 토끼 한 마리 없을지언정, 곰 발바닥과 혈투 한 번 못해봤을지언정! 꼼짝마라, 못된 도적놈들! 아아, 슬레진 제국 만세. 우리의 필립 오넬 황태자께 영원무궁토록 영광 있으라.』
왜 거기서 만세 삼창이 나오는 건지 묻지 마라. 로머디스는 로스트 치킨이 무슨 도적놈 머리통이라도 되는양 좌우로 비틀어 꺾었다.

『그런 사연이!』
남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도적이란다, 도적! 남의 돈을 빼앗는 패륜아들! 강도놈! 충격을 받아 손가락이 하애지도록 내프킨을 움켜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작은 상인 출신이다. 구름 위에서만 사는 일반 귀족들과는 달리 지금과 같은 도적떼 이야기는 피부에 직접 와닿았다. 거기다 제피리아가 자급자족 시스템이 아닌 외지와의 상업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곳이라면? 실제로 제피리아는 특산품인 포도주를 팔아 내일의 일용할 양식을 구입하고 있다. 외지인과의 거래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때로는 거대 외국 상단이 방문하기도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해보자. 이곳에선 치안 안정이 경제의 밑거름이다. 돈 싸들고 물건을 사러 왔는데 도둑에게 죄다 털렸네~ 해서는 장사가 안 된다. 품질 좋은 포도주는 두 번째다. 장사의 기본은 첫째도 사회적 안정, 둘째도 사회적 안정이다. 강도가 창궐하는 곳으로 가난도 창궐한다.

『이, 이럴 때가 아냐. 큰 아이를 어서 불러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적놈들은 남쪽으로 도망간 듯 하더이다. 코빼기도 못봤지 뭡니까.』
『다, 다, 당장 토벌대를 세우지 않으면!!』
『놈들이 줄행랑을 칠 법도 하죠. 그도 그럴 것이 이분이 누구십니까. 임금님께서도 진저리를 치는... 아, 이건 좋은 표현이 아니지. 아무튼 그 유명한 후작 나으리가 아니십니...』
『거기 누구 없느냐! 당장 가서 리나를 불러와라~!!』
『저기요? 제 말을 들어보셔요. 도적놈들은 도망갔다니까요.』
라고 해도 남작은 이미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상태여서 호흡이 어려웠다.

이 마당에 훌륭한 뒷북 하나.
『맙소사, 남작! 그대는 아들의 이름을 리나라고 지었단 말입니까?! 그 많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 리나?! 폴이나 제임스, 내지는 레이몬드도 아닌! 리나?!』
돌아다보니 누구처럼 남의 이야길 한쪽 귓구멍으로 흘린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20 10:29 2008/03/2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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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엘리바스 2008/03/20 12:15 # M/D Reply Permalink

    후후후후후.. 드디어 만나겠군요...

  2. kimmie 2008/03/20 13:26 # M/D Reply Permalink

    아 담편엔 드디어 열여섯 꽃다운 아가씨와 서른 중반의 역시 꽃다운(...) 아저씨의 첫만남이 되겠군요. 미야님 필력이 참 대단하다고 느끼는게, 처음 이 시리즈를 읽었을때 전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레죠리나 커플링을 지지하게 되었거든요. 1기까지 다시 돌려보며 '아아, 둘 사이의 화학작용이 보여...'라고 자가세뇌하고 있었으니까요;;;

거래처 사람들도 잘 모른다. 인버스 포도주 상회의 실질적인 주인은 남작이 아니라 바로 리나 인버스, 그의 첫째 딸이라는 건 말이다.
하긴, 아무도 안 믿을 거다. 억만금을 주물러대는 실세가 타들어가는 저녁 노을의 머리카락을 가진 열 여섯의 애띈 소녀라고 하면 바로 치고 나올 소리는「그거, 웃자고 하는 농담이지?」
그러나 그것이 한 점 틀리지 않은 진실이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책망하는 목소리로「아빠-」를 외친 그녀가 바로 마다스의 손인 것이다.

어려서 장난감 대신 주판알을 튕긴 천재.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는 질문에「돈이 최고 좋아!」라고 당돌하게 대답한 아이.
침대 머리맡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대신 현금 출납부에다 빨간 밑줄 두 개를 긋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소녀.
모친 사망 이후 싫든 좋든 인버스 가의 마님이 되어버린 조숙한 숙녀.
장래 희망은「인류 최강의 부자」이며, 꿈은「금화로 가득 채운 방에서 헤엄치기」.

『아빠- 자그만치 서른 여섯이나 된다고요. 우리 집 침실 사정으론 이들을 모두 지붕 있는 곳에서 재울 수가 없어요. 후작님이랑 수행원 약간 명에게만 침대를 제공하고 나머지 인간들은 야외로 굴려야 해요. 그러니 당연히 텐트를 준비해야지요. 하룻밤이라 할지언정 적어도 밤 이슬을 피하게는 만들어줘야 불평이 나오지 않을 거 아녜요.』
『그렇구나!』
『그럼 주방쪽 지시는 제가 내릴테니까 텐트 문제는 아빠에게 부탁드릴게요.』
『알았다.』
『아참! 토마스에게 일러서 당장 목욕물 준비부터 하라고 하세요. 법 먹기 전에 일단 기사들의 땀냄새 나는 겨드랑이를 씻겨야...』
『어, 토마스는 지친 말에게 먹일 건초더미를 추스르러 나갔는데.』
『그럼 헉슬에게 말해두면 되겠네요. 야니에게는 목간통을 찾아오라고 하세요. 우리한테 그렇게 많은 목간통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면 쓰다 남은 포도주통이 네 눈엔 뭐로 보이느냐고 혼내키세요. 그게 끝나면 침대 시트를 있는대로 긁어다가 손질하도록 지시하시고요. 줄리에게는 마을로 내려가 품삭은 넉넉하게 줄 터이니 임시로 잔심부름을 할 사람을 너다섯 명 끌고 오라고 시키고...』
줄줄 나온다, 줄줄 나와.
이 똑똑한 딸네미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누. 남작은 감격해서 딸을 손을 잡았다.
『네가 최고다, 얘야.』
『당연한 말씀을.』
겸손의 미덕 따위는 화톳불에 오란도란 구워먹고 그렇게 대답하는 리나 인버스였다.

『아자자자! 내 팔뚝 굵다아~!』
식구들의 안녕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죽도록 몸과 머리를 굴려주마.
남작의 영애답게 꽃단장하는 건 포기. 파이팅을 외치고 감자푸대를 들었다.
무겁지 않았느냐고? 식은땀 나도록 당연히 무겁다.
하지만 그놈의 감자푸대가 후작의 잘난 머리통이라고 생각하면 못 끌고 갈 것도 없다.

『에취-』
아마 그 덕분이었나 보다. 저주의 굿판 탓으로 그레이워즈 후작이 가볍게 재채기 했다.
『응? 뭣 때문인지 몰라도 갑자기 뒷 목덜미가 서늘해지는군요.』
『괜찮으십니까.』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되어 두 다리를 쭈욱 뻗은 후작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며 손사레를 쳤다. 재채기 정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 이쪽이 되려 피곤해진다. 감기도 아니고, 몸살도 아니며, 악마에 씌인 것도 아니다. 나이 지긋한 하녀가 가지고 온 차가운 음료수로 손을 뻗다 말고 그래서 입술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찾아봤습니까, 죠르프.』
저것은 보물 지도나 비밀의 방 얘기가 아니다.
인버스 가의 아들, 그러니까 여전히 이름조차 불명인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지긋이 턱을 괴였다. 이렇게 평안히 눈을 감으면 보인다. 아마 지금쯤 열 여섯의 꼬마는 덜덜 떨며「유모, 나 어떻게 해!」라고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그 작은 머리가 제대로 움직인다면 자신의 지금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렇다, 위기사항이다. 소년은 궁지에 몰린 쥐였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통례상 귀인이 방문하면 저녁 만찬 자리가 마련된다. 그 자리엔 집주인과 그의 아내, 아울러 상속인이 참석을 하게끔 되어 있다. 메인 요리를 손님들 접시로 하나하나 옮기는 것이 집 주인의 할 일이며, 손님은 훌륭한 대접에 대해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내는 걸 잊으면 안된다. 이에 화답하여 유려한 궁중 화술로 손님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여주인의 몫, 반대로 겸손의 미덕으로 침묵을 지키며 포도주를 손님 잔에 채우는 것이 상속인의 할 일이다.
물론... 이쯤해서 후작은 가볍게 콧김을 뿜었다. 그 아들의 나이가 겨우 열 여섯이니 법적 상속인 자격은 아직 없을 터. 그렇다면 만찬 전이나 후에 간단히 인사를 하러 내려오는게 일반적인 관례이다.
좋다 이거야, 인사를 한답시고 얼굴을 내밀면 그 자리에서 똑바로 쏘아봐주지. 그리고 마음껏 이죽거릴테다. 대 귀족의 얼굴로 손을 올리고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봇장 좀 보자구. 절룩거리며 밖으로 기어나가는 꼴을 반드시 본다. 시골 촌뜨기가 선보이는 외발 기러기라는 걸 즐겁게 감상하겠다.

젖 비린내를 풍기는 소년이 당혹감에 눈물을 쏟아낼 걸 상상하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이 집의 자제분은 어떠신가요. 혹시 만나는 봤나요.』
그래서 후작의 목소리는 기름을 바른 것처럼 무척이나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그게 말입니다요. 각하.』
반면 죠르프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기가 죽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겁을 먹고 어딘가로 숨어버렸나 보군요. 그대의 얼굴을 보아하니 말입니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기웃거려도 숨소리 하나 안 들립디다~ 그렇게 말하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내 말이 맞죠? 죠르프.』

아닌데요, 하고 죠르프는 조심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은 그보다 더 심각한 이야길 들었다.

「누구요? 도련님? 우리 집엔 도련님이라는게 없는데요.」

기분 나쁜 땀으로 손바닥은 축축하다. 죠르프의 고개가 바닥 아래로 꺼졌다.
멀리 여행을 갔다더라, 내지는 갑작스런 두통을 호소하며 앓아 누웠다더라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없댄다. 아예 없댄다! 이 집에는 XY의 염색체를 가진 아들이 없단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후작 각하! 제르가디스 도련님의 뺨은 도대체 누가 갈긴 건가요. 지나가는 산들바람이었나요, 아님 호수의 정령이었나요, 그것도 아니면 귀신이었나요. 하여간 산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요.
목이 칼칼했다. 혓바닥이 마른 육포가 되어버렸다.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눈을 흘깃대던 하녀의 얼굴이 뱅글뱅글 돌았다. 그녀는 정육점에서 호박 달라는 사람을 처음 본다고 말했다. 마굿간에서 양상추를 찾고, 해우소에서 장미꽃 향기를 기대해서야 미친 놈 취급이 전부이다. 하녀는 대놓고 죠르프를 정신병자로 여겼다.
「아들도 인버스, 딸도 인버스라며! 그런데 왜 아들이 없어!」
뭐가 잘못되었던 걸까. 어디서 정보가 틀렸던 걸까.
후작에게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도 잊어먹고 마른 침만 꼴깍 넘겼다.

『조촐한 자리오나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집은 쓸데없이 강해서 후작은「아들 없다~」얘기는 일단 강하게 부정하고 보았다. 대신 기대에 가득차 남작의 아들이 턱을 덜덜 떨며 인사하러 나타나길 학수고대 하였다.
아들이 없어? 그럴 리 없다. 본 부인이 생산하지 않았다면 하녀라도 꼬셔 하나 낳았겠지.
인버스 부인의 평소 입버릇이「여보, 바람 피면 내 손에 죽어」였고, 마지막 유언 또한「내가 죽는다고 재혼하거나 하면 한 방에 뒈질 줄 알아」라는 걸 제3자인 후작이 알 길이 없다. 따라서 후작의 신념 - 어쨌든 뒷구멍으로라도 아들은 있다 - 은 굽혀지지 않았다.

느긋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감사합니다, 인버스 남작. 예고도 없이 불쑥 쳐들어온 불청객을 이다지도 환대하시니...』
남작의 인사치례에 후작은 아찔한 미소로 대답의 마침표를 대신했다.
이야. 끝내주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천상의 하모니다. 눈이 부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어진다. 남작은 그레이워즈 후작의 머리로 황금빛 후광이 비친다고 착각했다.
「그래봤자 가짜 부처니까 문제지.」
그 옆에서 로머디스와 죠르프는 바늘 방석의 따가움을 원 없이 만끽했다. 불편하지 않다면 공갈이다. 로머디스는 묵묵히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이틀이나 절식한 탓에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으나 식욕은 이미 산 너머로 달아난 뒤였다. 이 마당에 밥이 다 뭐라냐. 따가운 땡볕 아래서 말라죽은 해바라기 생각이 절로 났다. 그냥 차가운 냉수나... 바로 그 순간 위가 찌릿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물론 코앞으로 차려진 밥상의 훌륭함을 보자면 이들의 식욕 저하와 위통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후작도 내심 놀란 눈치다. 왕성식 상차림과 비교하자면 절대적으로 허름하지만 그거야 비교 대상의 수준이 너무 높은 것이고... 그의 입술이 굳었다.
전반적으로 시골풍이다. 그렇다고 해도 품위는 잃지 않았다. 꽃과 야채로 장식한 테이블 센스가 일품이다. 과하지 않은 꾸밈이 아름답다. 하얀 식기에, 정갈한 포도주, 향신료가 마음껏 들어간 메인 요리... 거위의 간을 버터바른 감자와 같이 찌고, 색이 멋진 소스를 둘렀다. 풍성해 보이는 양고기 구이는 그저 맛있게 먹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반나절 사이에 이런 요리가 가능한건가. 누군가 마법의 지팡이를 휘둘러댄 건 아닌가 싶다. 요리 나와라, 이얍. 빳빳한 테이블 시트 나와라, 이얍.

기교적으로 윗 입술만 들짝 움직인 후작이 죠르프에게 귓속말을 던졌다.
「이 사람들, 우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군요.」
「에이, 나리도 참. 이 사람들이 무슨 초능력자라도 되나요. 설마요.」
「하지만 이걸 봐요, 작정했다는 듯 차려놨잖습니까. 누군가 기밀을 누설한 겁니다.」
즐거운 계획 하나 와장창.
시간에 쫓기고 당혹감에 허둥대다 최악의 저녁상을 내놓으면「역시나 시골뜨기~」라며 손가락질 해주려고 그랬는데. 먹을게 부실하면「야박한 인심~」이러면서 싫은 소리 해주고, 내온 식기가 조금이라도 촌스러우면「졸부다운 끝장인 취향~」이러고 콧방귀 뀌려 했는데... 이야, 이거 멋지게 한방 먹었다. 이래서는 욕하는 사람이 비정상이다.

가볍게 눈웃음으로 모두에게 인사하며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욕하는 건 나중에.
대신 후작은 대단히 불편해하고 있는 부하 로머디스의 옆구리를 향해 춉을 넣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20 09:44 2008/03/2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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