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고소 남씨 문하생들이 데굴데굴 눈알을 굴려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신을 택무군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시선에 개의치 않아하며 나를 시집오는 새색시처럼 인도하며 구불거리는 길을 올라갔다. 쪽이 팔려도 어쩔 수 없었다. 입고 있는 옷이 너무 커 계속 자락을 밟아대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되었으니 발목이 부러지지 않도록 친절한 신사분이 에스코트를 자처했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한손으로는 늘어진 옷자락을 모아 쥐고, 다른 손으로는 택무군의 손을 잡고 종종 걸음을 했다.
“그대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 “성은 없습니다. 이름은 걸람입니다. 뛰어날 걸(傑)에 산바람 람(嵐)을 씁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머리에 문제가 생겨 기억을 못하게 되었기에 친절하신 분이 그리 쓰라 바꿔주셨습니다.” “좋은 이름을 주셨군. 그 친절한 분이 누구인지 기억은 하고?”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 걸까 10초 정도 고민했다. 그러다 상대를 속이려면 이름부터 감춰야 했다는 늦은 깨달음이 왔다. “효성진 도장님입니다.” “효성진... 명월청풍이었군.” 다음부터는 누가 내 이름을 물으면 걸람 대신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회사원 이름을 말해야겠다. 하지만 비루하한 비렁뱅이의 이름을 굳이 궁금해 할 사람도 없을 테니 그야말로 김칫국 드링킹이었다.
제자로 보이는 청년이 묵직한 부피의 책을 들고 가다 에스코트를 받아 걷는 나를 보고 놀라 들고 있던 걸 왕창 놓쳤다. 무려 법전 크기의 책이었다. 발등이 찍힌 그는 비명을 질렀고, 택무군은 상냥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운심부지처에서는 소란 금지다.” 저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고 생각하며 택무군을 따라 대나무로 담장이 둘러진 정갈하게 정돈된 건물로 들어갔다. 오래된 절과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어서 사진으로 찍으면 새해 1월 달력 그림으로 아주 어울릴 것 같았다. 눈이 소복이 쌓이면 분위기는 더 살아나리라. 그런데 이런 곳에서 죄인(추정) 추문을 한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택무군이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며 다독였다. “추문은 되었어. 그보다는 대화를 나눠보고 싶군. 혹시 좋아하는 차가 있나?” 그는 구름이 그려진 병풍이 있고 탁자와 방석이 있는 자리로 나를 데려갔다. 거기가 방문한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건 눌린 방석의 자국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했다. 주인이 자주 앉는 자리는 상대적으로 납작 눌려있었는데 그 앞의 서안으로 책갈피가 끼워진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자주 보는 종류인지 표지 가장자리에 제법 손자국이 나 있었다. “악보란다.” 오선지에 그려진 서양식 악보만 익숙했기에 그런가보다 여기고 넘어갔다. 표지에 적힌 한자 중 선(善)이라는 글자만 겨우 알아봤다. 글자가 모두 여섯이었는데 내 실력으론 겨우 글자 하나만 읽을 수 있었다.
탁자에 백옥으로 만든 피리가 보여 ‘여기 사람들은 흰색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피리도 흰색이네.’ 생각하고 맞은편 방석으로 가 앉았다. 양심상 다리를 편하게 하고 앉지는 못했다. 그보다 뒤편으로 놓인 서가가 인상적이었다. 제본의 방식이 달라 여기선 책을 눕혀서 보관한다. 각이 딱딱 맞게 정리한 책들의 모양이 어쩐지 눈에 익숙하다 생각하며 택무군으로부터 차를 대접받았다. 향이 짙으면 어색해할 걸 염두에 두었는지 물을 곱절로 많이 부어주었다. 입에 가만 물자 희미하게 꽃내음이 났는데 제법 입맛에 맞았다.
“망기... 그러니까 함광군이 그대를 곤란하게 만든 건 동생 대신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그건 죄를 묻는 추문이었잖아......요...?” 추문이 아니었나? 택무군이 짐짓 시선을 피하며 자신 몫으로 다른 차를 우려냈다. 내 것과는 달리 색이 무척 진한 색이었고 풀 냄새도 그만큼 짙었다. 녹차 티백을 한꺼번에 다섯 개를 넣고 센 불에 조려낸 느낌이라 맛이 굉장히 쓸 것 같았는데 취향이 그쪽인지 탕약 같은 걸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찻잔에 따랐다. 녹차에도 설탕을 넣어 마셨던 나는 보는 것만으로는 입안이 아릴 지경이었다.
마침내 택무군이 찻잔에서 시선을 들고 내게 말했다. “망기가 아니라는 내 말도 안 듣고 고집을 부린 건 자기가 그토록 원하는 걸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지. 그 애는 예전부터 외골수여서 한 번 그래야겠다 정하면 쉽게 뜻을 굽히질 않아서... 그래도 본인이 착각했음을 깨달았으니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난 뒤엔 더는 염치없이 구는 일은 없을 거야.” “......?” “표정을 보아하니 모르겠다는 눈치인데 이해가 안 가도 그냥 그런 줄 알고 있게.” 동생을 대신하여 사과를 한다면서 해명은 대충이었다. 나는 여상히 굴었다. 높으신 분이 아랫사람에게 이유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짓는 건 익숙한 일이다. 고생하여 만든 기획이 엎어졌을 적에 부장님은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으라고만 했다. 계급사회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중요한 건 함광군이 뭔가를 오해했고, 지금은 아니라는 거다. 우리 둘은 각자의 차를 마시며 각기 딴 생각을 했다. 옆에서 보글보글 따뜻한 소리를 내고 물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서 그대를 처음 봤을 적에 공자는 혼백의 모습이었지.” 기습 공격이었다. 입속에 담고 있던 차를 힘차게 뿜었다. “니눼에?”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했으면서 정작 본인이 더 놀라 서가에서 책을 들어 던지려 했어.” “아... 콜록. 잠깐만요?!! 아,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저 구석에 있는 네발 향로의 모습이 낯익다. 고급스런 외관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었다. 고개를 휙 돌려 대나무 발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피톤치드! 빼곡하게 자란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공기가 서늘했다. 구석에 고금이 있었고... 입구 앞쪽에는 사령이 나타났다며 손가락질을 하며 허둥대는 흰옷의 소년들이 있었다. “그렇군. 확실히... 여긴 내가 예전에 죽었을 때 나도 모르게 와보았던 장소 같군요.” 내 말을 들은 택무군의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짝 쳤다. 기억난다. 그때 택무군은 지금과 달리 연한 푸른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럼 얘기가 한결 편해지겠군. 지금 자네 몸은 어떻게 된 건가. 숨을 느리게 쉬고 있지만 생기가 없고, 맥이 천천히 뛰고 있으나 온기가 없군. 나와 망기는 한눈에 알아보겠지만 수련이 낮은 자들은 자네를 사람이라 여기겠어. 단, 건강하지 않고 아픈 사람으로.” “그야 전 흉시니까......요?” “그렇지 않아. 전장에서 흉시를 여러 번 보았는데 그들 전부가 자네 같지 않았어.” “그래요?” “알려지지 않은 술법을 써서 부활했는데 온전하게 부활을 못한 것 같군.” “그게 흉시잖아요?” “아닐세.” 우리 둘은 거울을 마주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인상을 구겼다.
서로가 납득을 못했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 주제는 일단 넘기기로 했다. 목이 타는 느낌이 들어 찻잔을 들어 그게 독한 술이라도 되는 양 한 번에 들이켰다. “소처럼 차를 마셔선 안 된다.” “배움이 짧아 그러니 이해 좀 해주시죠.” “앞으로 가르칠 게 많겠군...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그대가 이곳에 혼백으로 나타났을 적에 혼자가 아니었는데 기억을 하는가?” 대답을 하기 전 시선이 구석에 놓인 고금으로 향했다. 입술도 약간 오므려졌다. 택무군 또한 고금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때 고금의 줄이 저절로 튕겼고, 그것만으로 힘을 전부 써버린 혼백이 거품처럼 흐트러졌었다. 그렇게 혼백이 깨져 버렸으니 환생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먼저 죽임을 당했고, 다음으로 수사가 죽었다. 사실 내 입장에선 비명소리를 들은 게 전부지만 아무튼 설양이 용월을 죽였다. 그리고 시변하게 만들어 상씨 저택 참변의 미끼로 써먹었다. 기억을 하고 말고.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서 적절하지 않은 상대에게 목숨을 잃은 그는 고소 남씨의 문하생이었다.
“이름이 용월이었어. 조금은 고지식한 성격이었지.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있어 다른 선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 그래서 항상 혼자 다녔고...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고민을 했고, 부족한 재주라도 어디서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 그런 식으로 가버릴 거라곤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을 거야.” “저에게 당과를 줬었어요.” “그랬니?” 약간 초췌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택무군이 희미하게 웃었다.
시변하여 문제를 일으킨 용월의 시신은 부분으로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다시는 죽은 채 걸어 다니지 못하게끔 약양의 상씨 가주 상평이 그녀의 몸을 모두 여섯 부분으로 잘라 도륙했기 때문이었다. 상평의 입장에선 용월이 수행을 하는 몸으로 시변하였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해는 갔다만 치욕적이었다. 남씨 사람들은 따져 묻기 이전에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장례는 입고 있던 겉옷을 관에 넣어 간단히 행해졌다. 친한 지인이나 가족이 없었기에 유품은 모두 불에 태워졌다.
“나는 용월이 급사한 까닭부터 차분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변했다는 결과를 두고 다들 원인은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버렸지. 그 몸이 시변을 한 건 수행의 정도가 낮았기 때문이니 문하생의 신분으로 고소에 큰 폐를 끼친 거라고들 말했어.” 그리고 상씨 집안이 하룻밤 사이에 심상치 않은 방식으로 몰락했다. 상씨의 멸문과 고소 남씨를 서로 연계시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운심부지처에서는 긁으면 부스럼이 난다며 문하생 용월의 이름 자체를 입에 담기를 꺼리게 되었다, 택무군이 그렇게 설명했다. “다들 원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내게 진상조사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몇 명의 수사를 모아 은밀히 초혼을 했어. 하지만 대화는 불가능했고 용월의 혼백은 이미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져 산들바람만 불어도 사라질 지경이었지.” 단지 몇 마디를 묻고자 그 가엾은 혼을 가루로 만들 수는 없었다고 택무군이 얘기했다.
그게 전부야? 그걸로 끝이야? 죽은 이의 혼백을 부르려 했고, 그나마 그 일에 실패하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끝이냐고. 문하생의 죽음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저편에 묻어버리자고 그리 쉽게 결정내려질 만한 거였나.
입가가 뒤틀리는 걸 손등으로 입을 닦는 척하여 감췄다. 지금이라도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달편(達片)의 거짓을 읊어댔다. “용월 수사는 택무군이 그리 신경을 써준 것만으로도 무척 기뻐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 말하는 내 목소리는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고저가 없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27 10:56
2021/11/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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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치료를 이유로 들었지만 다른 두 사람과는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건 눈치껏 알 수 있었다. 불타는 부적에 찔려 눈을 다친 남자는 진작에 피리 불던 사나이와 같이 다른 곳으로 끌려갔는데 화상 자리가 덧나 고름이 올라왔어도 약은 감히 바랄 수도 없었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채 취조를 받은 모양이었다. 횡설수설하여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불평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그와 비교하면 나는 천국행이었다. 좁았지만 깨끗한 방에 머물렀고 하루에 두 번 밥이 나왔다. 나물 반찬 두 가지에 밥이 전부인 소박한 상이었어도 죄인(추정)에게 매번 따뜻한 밥을 넣어준다는 점은 의외였다. 물론 약간의 심술은 없지 않아 내게 밥을 넣어주던 심부름꾼은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툭툭 던지곤 했다. ‘시체를 구해와 값을 받고 팔아치운 일당이 잡혔다. 몸에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마을에서 추방하는 낙인형에 처했다. 그렇게 추방이 되고 나면 사사롭게 물건을 사고팔거나 남에게 고용살이를 할 수가 없어 법률상 무능력자인 금치산자가 되어버린다. 사실상 굶어 죽으라는 처벌이다.’ 그렇게 ‘굶어 죽는 처벌’ 운운하면서 나더러 밥풀 하나 남기지 말고 싹싹 긁어먹으라 했다. 분명 꼽 주려고 하는 말이었다.
감시는 느슨했다. 소지품 검사도 하지 않았으며, 손을 묶은 포승줄은 헐렁하여 요령을 부리면 팔이 저절로 쑥 빠져나오곤 했다. 몇 번은 풀린 밧줄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딴청을 부렸는데 절상과 찰과상에 연고를 발라주면서 그걸 못 알아차렸을 리가 없었다. 몇 번 반복되자 치료를 맡은 수사는 아예 줄을 풀어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치료에 방해가 되어 귀찮다는 게 이유였다. “상처가 낫는 동안엔 열이 나는 법인데 너는 반대로 몸이 비정상적으로 차구나.” 그러더니 입을 벌리고 아, 소리를 내어 혀를 내밀어 보라고 시켰다. 부끄러워 싫다고 하였더니 꿀밤이 날아왔다. 두 번 맞기는 싫어 혀를 내밀었다. 몰랐는데 내 혀의 색은 붉은색이 아니라 거의 파란 빛깔이었다. “하루에 소변과 대변은 몇 번을 보지?” 나도 모르게 화장실은 전혀 가지 않는다고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확 달라지는 수사의 안색을 보고 서둘러 거짓말이었다고 둘러댔다. 밥을 하루에 두 번이나 먹으면서 용변을 전혀 안 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몸의 시스템은 완전히 고장 나 위장으로 들어간 음식이 소화과정 없이 가루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나야 세상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수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밧줄로 꽁꽁 묶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또 의외였다.
한 번은 금릉이 강아지 꼬마 선자와 같이 근처로 (쳐들어)온 적도 있었다. “내 하인이니까 구린내는 내가 데려가겠다!” 멋대로 굴지 말라며 금릉을 내쫓으러 온 남경의가 화를 냈다. “솔직히 네 하인이 아니잖아. 왜 그렇게 고집하는 건데?” “그거야 구린내가 건방지니까. 그래서 내 하인으로 데려갈 거다.” “뭔 소리야? 알아 들을 수가 없네. 단계가 너무 여러 번 건너뛰잖아.” “건방지게 날 금릉, 금릉, 이러고 이름을 부르잖아. 걘 바보라서 고개도 빳빳하다고. 심지어 자기가 형인 척 굴어. 그러니 정식으로 내 하인이 되면 제 분수를 알고 공손해지겠지. 흥!” “그게 이유야?!”
벽에 귀를 대고 두 소년의 말다툼을 엿듣고 있던 나는 이마를 때렸다. 다음에 만날 일이 있음 ‘아이고 금 공자님! 그새 강녕하셨습니까!’ 허리를 접어 정중하게 인사해야겠다. 재벌 3세에게 밉보여서 좋을 거 하나 없다. 애기가 귀엽고 예쁘장해서 나도 모르게 살갑게 대한 모양인데 본인이 싫다면 관두는 게 옳았다. 빨리 어른대접을 받고 싶어 하던 아이라서 내 태도가 곱절은 더 싫었나 보다. 그런데 어른 대접을 받으려면 떼를 쓰는 버릇부터 고쳐야 할 텐데. 기어코 내 얼굴을 보고 가겠다는 걸 남경의가 뜯어 말리느라 애를 썼다.
그렇게 며칠인지 몇 주인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 날, 밥 넣어주던 수사가 곧 나도 추문을 받게 될 거라고 알려왔다. 눈을 다친 사내와 피리 불던 사내는 사마외도와 주시현살(現撒) 죄목으로 이미 무서운 처벌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네가 생각하기에 제일 무서운 형벌이 무엇일 거 같아?’ 질문을 던져 절로 목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이쪽의 표정이 썩어가자 ‘그 답은 사형(死刑)이 절대 아니다.’ 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완전 소시오패스였다. 내 안색이 나빠지자 수사의 얼굴은 반대로 달덩이처럼 환해졌다. 고소 사람들은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사람을 괴롭히길 즐기는 것 같았다. 추문을 받으러 가기 전에 수의를 강제로 입히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절대로 안 입는다고 발버둥을 쳤는데도 그들은 완강한 태도로 내게 무늬 없는 흰옷을 입혔다.
“빗자루 같은 머리도 가지런히 만지고 가세요.” 거울을 볼 수 있었다는 점 하나는 만족스러웠다. 다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크게 실망스러웠다. 속으로 쌓인 화가 많아 보이는 소년은 피부가 거칠었고 이마와 콧날이 펑퍼짐했다. 쌍꺼풀이 없는 눈은 평범했고 눈썹은 얇았다. 일주일 연속으로 철야한 안색이었고 몰랐는데 뺨 가운데 점이 W, A, S, D 키보드 방향으로 네 개나 있었다. ‘걸람은 이렇게 생겼구나.’ 얼굴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신기해하자 수사가 강제로 거울을 빼앗았다. “늦는 건 결례입니다.”
추문한다는 거, 일일이 따져 물어가며 죄를 문초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고소에선 좀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손톱을 튕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전생에선 경찰서에 가본 적도 없어 신호위반 범칙금 딱지를 끊은 게 전부다. 나는 치킨에 맥주를 배달시켜 먹는 걸 삶의 행복으로 여기던 소시민이었고, 폭행이라던가, 사기라던가, 성추행 같은 범죄는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뉴스로만 접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사고를 치고 다니기엔 담이 작았다. 현생도 그럭저럭 비슷했다. 나는 그다지 욕심이 없는 편이고, 시키는 일에 얌전히 잘 따랐다. 그래서 추문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상대방을 흘깃 곁눈질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1시진 넘게 가만히 앉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는 중이다. 아까부터 발가락이 저려와 미칠 지경인데 자세를 편안히 바꾸지도 못하고 추문을 받고 있다. 아니, 그런데 이게 진짜로 추문 맞기는 하고? 마주보고 앉은 남자는 입도 뻥끗 안 했다. 그저 뚫어져라 날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냥 눈빛으로 날 건조 오징어로 만들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보통 이런 경우엔 이름이 뭔지 묻고, 출신을 따지고, 지은 죄가 무엇이고, 언제, 어디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낱낱이 파헤치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저 함광군이라는 사내는 나에게 수의를 입혀 어두컴컴한 방으로 따로 불러내곤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이러다간 분위기에 말려 ‘제가 전부 잘못한 겁니다!’ 인정해버리고 말 것 같다. 매우 고단수의 심리적 압박이었다.
‘그렇군. 이게 남씨 가문의 추문이라는 거군.’ 신음을 삼키며 저려오는 종아리를 손톱으로 꼬집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달려라 하니 주제가를 속으로 백번 쯤 부른 뒤라 찌릿거리기는커녕 감각 자체가 흐릿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함광군이 빈틈없는 자세로 그런 날 응시했다. 눈빛만으로도 꾸중을 들은 기분이 들어 울적해졌다.
참다못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요.” 함광군이 눈썹을 찡그렸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그의 눈썹이 더 일그러졌다. “그렇게 찡그리면 눈가에 주름 생겨요.” 내 충고에도 아랑곳없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감각을 잃어가는 발가락에 몰래 침을 바를 궁리나 했다.
그때 통 통, 이러고 밖에서 문고리를 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망기야. 안에 있지?” 물어보는 목소리에 함광군은 못 내켜하며 대답했다. “예, 형장.” “아무래도 객은 내가 데려가야겠다.” “......” “대답을 해야지. 망기야?” “예, 형장.” “너는 거기서 잠시 마음을 다스리고 있거라. 객은 내가 데려가마.” 함광군과 일란성 쌍둥이처럼 생긴 남자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복장도 비슷하고, 체형도 비슷하고, 심지어 머리 묶은 모양도 똑같아서 붕어빵 틀로 찍어낸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고소 사람들이 함광군과 이 사내를 헷갈려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눈의 색상이 더 짙었고, 분위기가 따뜻했다. 저쪽이 살얼음이면 이쪽은 봄날의 햇볕 냄새가 났다. 지금의 이 상황이 매우 곤란하다는 표정이었음에도 입가에 미륵반가사유상의 불가사의 미소가 머물러 우아하고도 여유로웠다. “저어, 죄송하지만... 제가 다리가 저려서.” 당장은 일어나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며 배려까지 해줬다. 필요하다면 손을 빌려 주겠다고도 했다. 이것저것 저울질하고 그렇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나는 콧잔등에 침을 바르고는 스스로 일어나선 후들거리는 다리로 문지방을 넘었다. 입고 있는 수의의 자락이 길어 하마터면 밟고 넘어질 뻔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금방 균형을 바로잡아 만장하신 가운데 엎어진다는 참사는 면할 수가 있었다.
“왜 수의라고 생각한 거지? 그건 고소의 문하생들이 입는 옷이다.” 그가 난처하게 웃으며 신발을 신는 걸 기꺼이 도와주었다. “그런데 길이가 맞지 않는군. 소매도 길고. 공자의 체격이 작아서... 아! 실례.” “키가 작은 건 사실이니 실례라고 할 건 아닙니다만, 문하생이 입는 걸 왜 저에게 입힌 건데요?” “글쎄. 망기가 그 옷을 입은 공자의 모습이 보고 싶었나 보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난처한 미소가 더 난처해졌다. 뜻을 알 수 없었던 나로서는 어색하게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25 13:58
2021/11/2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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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엉덩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린 흉한 모양새로 자빠져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아, 어쩌지. 방금 뇌가 녹았다. 오금이 풀려 허리 아래로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손가락 하나가 어설프게 움직였을 뿐으로, 서툴게 모스 부호를 치는 것처럼 중지가 까딱였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자면 나 혼자 창피한 꼴을 당한 건 아니라는 거였다. 피리 불던 사나이도 허리가 빠진 모양새로 넘어져 경련을 일으키는 중이었는데 나처럼 뇌에 정지신호가 온 것 같았다. 그는 애가 타는 눈빛으로 떨어진 피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는데 마음만 굴뚝이고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주는 눈치다. 벌벌 떨며 어떻게든 손을 뻗어보려 했으나 욕심이 과했다. 겨우 어깨만 들썩였을 뿐이었다.
딩, 이러고 악기의 줄을 튕기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아까보다 음이 약간 높았다. 소리가 달라지면 충격도 달라지는 건지 코피가 왈칵 터졌다. 농담이 아니었다. 저 소리를 앞으로 두 번만 더 들으면 뇌가 액체로 변해 인근한 눈구멍과 콧구멍을 통해 조용히 흘러내릴 터였다. 나는 제발 그만하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문제는 쇼크가 와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함광군!” 제발 그만 하라는 뜻인지, 아니면 더 해보라고 부추기는 건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오며 한 사람의 이름을 입을 모아 외쳤다. 바닥을 밀며 천천히 기어가던 나는 제발 전자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함광군!” 다행스럽게도 악기의 줄을 뜯는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대신 잘 벼려진 검이 검집을 빠져나올 적의 날카로운 금속음이 그 뒤를 이었다.
“명화부에 불을 붙여라.” 지시에 따라 어둠 속에서 밝은 불빛이 일어났다. 명화부가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장터에서 가짜 도사로부터 사들인 불쏘시개 부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쪽은 청색에 가까운 색을 냈고, 바람에도 쉽게 꺼지지 않았다. 적당한 불빛으로 사야가 확보되자 그 다음으로는 일사천리였다. 흰 색으로 옷을 맞춰 입은 수사들이 별빛을 가리던 장대를 재빨리 걷어냈다. 동강이 낸 장대는 횃불처럼 사용되어 다시 불타올랐고,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주시들의 모습이 더욱 확연해지자 그 다음부터는 일방적인 살육의 장이 펼쳐졌다. 이미 죽었던 것들이니 ‘살육’이라기보다는 ‘처리’가 보다 걸 맞는 표현이겠지만. 두부를 자르는 것처럼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무리 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남사추와 남경의였다. 두 사람은 윗 연배 수사들의 뒤를 따라 빠르게 검을 움직이며 주시를 정리했다. 날렵하고 가벼운 몸동작을 보여주며 그 어떠한 동요 없이 그르륵 소리를 내는 시체들을 베어나갔다. 저 어린 나이에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걸 보니 새삼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떼거리의 습격 탓에 의복이 엉망이 된 금릉을 일으켜 세운 것도 그 두 명이었다.
“쓸데없는 도움이야! 나 혼자 일어설 수 있어!” 고집쟁이가 앵앵거렸다. 하지만 순전히 허세여서 남경의가 일부러 팔을 놓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를 본 남사추가 넘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잘 잡아주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금릉은 고맙다는 인사를 일절 하지 않았다. 대신 화풀이를 하듯 검을 휘둘러 주시를 정리하는 일에 끼어들었다.
“피리요! 저 사람이 피리를 불어 주시를 조정했어요! 함광군.” 시체들을 쓸어내는 와중에 누군가 피리를 주목했다. 나는 약간만 남아있던 힘을 전부 끌어 모아 바닥에 떨어진 대나무 피리를 움켜쥐었다. 검은 옷의 괴인이 당장 그걸 자신에게 넘기라며 야단법석이었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못 넘긴다. 이건 위험한 물건이다. 고소 남씨는 뒤로 빠지고, 운몽 강씨는 이죽거릴 거다. 난릉 금씨는 과장된 헛소문으로 치부할 것이고, 청하 섭씨는... 거긴 망했다. 그렇다면 이 물건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피리를 놓아라.” 함광군이라는 이의 목소리는 음에 고저가 없었다. 듣기만 해선 감정이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았다. 냉기도 없고, 온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고집을 부리며 피리를 놓지 않는다면 남의 사정 봐주지 않고 손을 아예 잘라낼 사람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원한이 서린 눈빛을 하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모르겠냐고!
평범한 말투였지만 목소리에 위엄이 가득했다. 함광군이 다시 경고했다. “피리를 놓아라.” 경고를 들었음에도 손아귀에 힘을 줬다. 에라, 까짓 것. 아프긴 하겠지만 손모가지 정도는 잘려도 다시 붙는다. 대나무로 만들어져 속이 텅 빈 피리의 표면이 지나치게 구워진 과자인양 금이 가기 시작했다. 뾰족한 부스러기가 살을 헤집는 느낌이 들었지만 멈추지 않고 힘을 더 줬다. 제법 크게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되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피리는 제 형태를 잃어버렸다. 가시가 박힌 손바닥이 쓰라렸지만 이것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도발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함광군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까 원한 깊은 눈빛에 그리 큰 변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짐작하자면 피리가 망가져 아쉽다는 건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뭔가 더 깊고 거대한 원념의 뿌리가 밑바닥 깊은 곳으로 있었다. 아예 모르는 척하고 싶을 정도로 어두운 수렁이어서 숨이 막힌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려야 했다. 이렇게 진득한 어둠을 품은 사람을 ‘빛을 품은 군자’ 함광군으로 부른다고? 다들 돌았구먼.
“묶어라.” 이 사내는 기본적으로 말이 짧았다. 그래도 구체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이런 명령이 익숙한지 수사들이 일제히 달려와 눈에 화상을 입은 남자와 피리 불던 사나이, 그리고 용의자로 지목된 날 곤선삭으로 단단히 묶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함광군. 그건 내 하인이에요.” 금릉이 뛰어와 사람 취급이 하나 잘못되었다고 항의했다. 그런데 어디 가서 비빌 짬밥이 아니어서 함광군이 지긋이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인데 혀가 굳은 눈치였다. 본부장 앞에 선 일개 평사원의 기분을 맛보며 금릉이 한 걸음 후퇴했다. 다른 때 같으면 내가 누군지 아느냐, 외숙에게 이를 거다, 후렴구를 덧붙였겠지만 지금은 꼬리를 내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함광군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관하자 남경의가 대신 끼어들었다. 내가 볼 적엔 어른 앞에서 주제넘은 짓이라는 느낌이었지만 금릉과 소년의 나이가 비슷하니 그렇게 하라 묵인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함광군이 뒷짐을 졌고, 의도치 않게 삼자대면 비슷하게 흘러갔다.
“네 하인이라고?” 눈을 뾰족하게 한 남경의가 나와 금릉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입술을 말아 피식 웃었다. “무슨 까닭일까. 금 아씨가 거짓말을 다 해가며 사람을 편들어주고.” “아니거든?!” “그럼 네 하인이 원기를 모은답시고 밤늦게 공동묘지로 가서 무덤도 파던데 그걸 허락했다고? 사마외도라면 그렇게 치를 떨면서? 말이 되는 소리야, 그게?” 금릉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목소리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구린내, 너 무덤 팠어?!!” “오해야.” “들었어? 안 팠대.” “그거야 끌고 가서 추문을 해보면 알 수 있는 거고.” 남경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기본적으로 쟤는 날 믿지 않았다.
“저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이라고. 이 장소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하지. 게다가 우리는 이 부근에서 사마외도를 추종하는 무리의 뒤를 추적해서 여기까지 온 거거든. 저건 분명 한 패야. 무덤이 연속하여 훼손된 게 식살귀 짓이 아니라는 것도 저 녀석이 흘린 단서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까... 무슨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네가 감쌀 필요가 없다고.” 얘기를 들은 금릉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화가 난 거라기보다는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식살귀가 아니었다고?” “맙소사. 그 부분이 화를 낼 부분이야?” “내가 식살귀를 잡겠다고 얼마나 수모를 겪었는...!! 애초에 소문이 왜 그딴 식으로 난 거야!” “야.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따져야겠어?” “그럼 여기서 따져야지 언제 따져! 것보다 내 개는?! 우리 꼬마 선자는?!” “오호라, 이제 네 개도 우리 책임이다 이거지.”
이제 둘은 말로만 으르렁대며 싸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도 싸우려 했다. 그런 다툼이 늘 있었던 일인지 보다 나이 많은 수사들은 개입하여 뜯어말리는 대신 소년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무엇보다 다툼이 난 두 사람 중 하나가 다른 집 자제였고, 무엇보다 금릉의 억지주장에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든 건 남경의 혼자만이 아니었던 거다. “네 똥개가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아!” “똥개라니! 꼬마 선자는 작은아버지가 주신 영견이야!” “누가 영견 이름을 꼬마 선자로 지어. 괴상하잖아!” 그리고 나는 처치곤란의 문제아 취급을 받아가며 곤선삭에 묶여 끌려갔다.
“잠깐만요.” 이 와중에 남사추가 달려와 코피가 번져 엉망이 된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그가 보인 친절에 기대어 마지막으로 호소했다. “말해도 안 믿겠지만, 나는 저들과 한 패가 아니야.” “그래요. 분명 도령은... 피리를 감추려는 게 아니라 부수려는 것처럼 행동했죠.” 사추는 제대로 설명하면 아무 일 없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때리지도 않을 거고, 채찍질하지도 않을 거며, 굶기지도 않을 거고, 어두운 광에 가둬두고 방치하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아니, 그게 꼭 그렇게 할 거라는 것처럼 들려 듣는 입장에선 살이 떨리는데. 나, 이대로 괜찮은 건가.
“선배님, 이 아이는 아직 어리고 운몽의 구판연 문양이 들어간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강씨 종주가 사마외도를 혐오하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사술을 추구하는 아이에게 집안 무늬가 들어간 주머니를 그냥 줬을 리 없죠. 사연이 제법 있는 것 같고, 죄를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 또한 없으니 너무 험하게 다루진 말아주세요.” 선배로 불린 수사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떡이고는 곤선삭 잡을 줄을 잡아당겼다. 그 당겨지는 느낌이 어쩐지 효성진 도장에게 잡혀갔을 때를 떠올리게 하여 기분이 착잡해졌다. 거기다 그것으로 나의 수난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와앙. 사건 다 끝난 것도 모르고 바쁘게 뛰어다니던 강아지가 어디에선가 갑자기 쏜살 같이 튀어나오더니 두 눈을 반짝이며 내 다리를 콱 물었다.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끝.
Posted by 미야
2021/11/24 14:04
2021/11/2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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