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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 그나마 양은 적었지만 어쨌든 토사물은 그 냄새가 지독했다.
당황한 나머지 팔을 뻗어 머리카락이며 붉은 의주갑에 튄 오물을 어떻게든 털어내려 시도했다.
그 행동이 사실상 손가락으로 문대는 거였음을 깨달았을 적엔 이미 늦어 청년 장수의 이마로 푸른 혈관이 곤두섰다. 발칙하게도 똥을 문지른 것이다.

『우와앗?! 빨리 막아!』
『지, 지지지지 진정하세요! 애기가 놀란 나머지 그냥 토한 거에요.』
『여기서 화내시면 안 됩니다, 자손!』
네 명의 병사들이 동서남북 방향에서 매달려 나를 대신해 애원하며 사죄했다.
그리고「자손」이라고 불리운 자는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사람이 웃으면 예뻐야 정상인데 이건 많이 무서웠다. 하여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 아아, 오늘 하루는 참 정신없었어. 하늘이 맑네... 날씨 좋다.

나는 이대로 정신줄을 놓고 그만 편안해지고 싶었다.
하나, 둘, 셋, 넷... 『지금 나더러 진정하라는 말이 나와~?!』마침내 귓청을 한 방에 날리는 대포 소리가 터졌다. 기함만으로 사람을 쓰러뜨리고 나무를 와지끈 부러뜨리는 거, 정말 오랜만에 목도한다.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은 바닥에 등을 대고 벌렁 드러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하여 지금 내 몸으로 굵은 밧줄이 칭칭 감겼다.
표면상으로는「요괴인지 사람인지 여전히 구분이 가지 않아서」이고, 속내는「발칙해서」 다.
『미안하다. 아프거나 저리면 꼭 말해다오.』
이름이 이라벽치라고 했던가, 나이 서른 중반의 사내가 몸을 묶은 줄을 느슨하게 조정해주며 얼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 정도 나이라면 결혼하여 슬하에 어린 자녀가 있을 터이니 우는 아들 벌주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죄수 포승줄 묶는 것처럼 하지 않고 아낙네가 장 보따리 묶는 식으로 매듭을 해서 속된 말로 엄이도정 하였다. 눈 가리고 아웅했다는 얘기다.
『너무 뻑뻑하진 않고?』
『괜찮습니다.』
『조금만 참으렴. 이 아저씨가 잘 해결해줄게.』
믿어보라는 아저씨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만.

원래대로라면 포승줄에 묶이는 것 정도로는 안 끝난다.
왜냐하면 그들이 청년 장수를「자손」이라는 독특한 호칭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풀어서 적으면「무한권능으로 하늘보좌에 올라 온 산하를 지배하시는 위대하신 적룡신의 만세자손」- 줄여서 자손 - 황족이다. 진짜로 황족이 용신의 후예냐고 묻지는 말아 달라. 예전에 그 질문을 친구에게 했을 적에 그는 그걸 자기 입으로 설명하기엔 본인의 입장이 난처하다며 뺨을 긁었다. 인간과 용이 서로 교미를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2세를 볼 수 있는가 - 호기심이 들지만 천벌 받을 질문이다. 알 듯 말 듯 하여도 짐짓 모르는 척해야 신상에 좋을 것이다.
아무튼 황송하여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가 없는 서대륙의 황제는 용신의 직계 자식으로 셈 쳐 적손, 황태자는 주손으로 구분하여 호칭하고 이하 황족은 자손으로 부른다.
그러니까 나는 평소 우러러 얼굴도 바라볼 수 없는 귀인을 향해 송구하게도 토를 하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손가락을 지분거려 그 냄새 지독한 걸 치덕치덕... 윽.
흙바닥에 코를 박은 채 신음했다. 인생 종쳤다. 황족 능멸죄면 그 처벌 수위가 어떻게 되더라. 태장 30대였던가.

『촌 사람의 아이로는 보이지 않는군. 피부도 하얗고.』
『저 아래서 이두마차를 발견했습니다. 바퀴가 망가졌고 말 두 필은 이미 사라진 상태입니다. 짐 일부가 손상되었고요... 시체도 한 구 나왔는데요.』
일처리는 일사불란하여 버려진 마차와 미리노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도망간 놈이 있다던데.』
타평에 대해 묻는 말엔 도리질하며 모르겠노라 거짓말했다. 미운 감정은 터럭조차 없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니 차라리 이대로 멀리 도망가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망노예로 조만간 수배되겠지만... 혹시 또 아는가, 숯 만드는 마을에 숨어들어 제2의 인생이라는 걸 시작해볼 수도 있으니까... 타평이 구운 숯인지도 모르고 그걸로 밥을 짓게 될 지도 모른다.

『혹시 사친 행렬로 온 거 아닐까. 마침 그럴 때잖아.』
『사친이라... 헤에, 그렇군. 벌써 오월인가요?』
『넌 어떻게 생겨먹어서 세월 가는 것도 모르냐!』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죠, 뭐.』
『그게 자랑이니? 하여간 내 주변엔 왜 이런 칠푼이 같은 놈들만 꼬이는 거야.』
『암튼 사친이면 행렬에서 이탈했다가 변을 당한 거겠죠. 잘 됐네요, 서남문까지 데려다 주면 되겠네.』
『.......... 포박해서?』
이라벽치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귀신을 잡으라고 나라에서 녹봉을 내리는데 산속에서 하라는 짓은 안 하고 대신 어린애를 잡아 - 여론이 악화되고 맹비난이 쏟아질게 두려웠던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도 했다.
『그럼 거적으로 대충 모습을 가려서...』
『아예 시체 취급이냣?!』
『아니, 저한테 화를 내봤자... 저어, 자손?』
눈은 감았으되 잔뜩 긴장하여 귀를 세워 대화를 엿듣고 있던 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에 콧물만 훌쩍거렸다.

『서남문으로 던져.』
머리를 대충 털어낸 자손이 이번엔 벗어놓은 의주갑을 손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지만 익숙한 자세로 갑옷을 직접 손질하는 모습이 무인다웠다.
『아, 네. 서남문으로 보내라고요?』
『아니, 던지라고.』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무어라 하셨는지요.』
『이 귀머거리야! 던지라 하였다. 녀석이 요물이라면 성문에 닿는 순간 주술의 영향으로 온 몸이 터져 죽는다. 이사실의 여덟 성문은 용신의 가호 아래 있어 저주받은 것들은 감히 통과를 할 수 없어.』
이라벽치가 울먹거렸다.
『요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니까요~!!』
『그래? 사람이었어? 그럼 잘 됐네. 안 죽을테니. 그러니 빨리 저놈을 끌고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쉭쉭.』

황족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말씀 받들어 서남문에 도달한 이라벽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쉰 뒤, 왕래하는 인구가 그렇게나 많은 곳에서 모두의 눈총을 받아가며 밧줄로 칭칭 동여맨 내 몸뚱이를 성문 한 가운데로 집어 던졌다.

Posted by 미야

2015/05/11 20:41 2015/05/11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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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별 거 아닌 작은 원인을 까닭으로 미래는 정해진 운명에서 이탈하고 새로운 장을 써내려간다.
원래대로라면 사내는 눈이 망가지고, 나는 크게 다쳤어야 했다. 그것이 정해진 줄거리였다.
그러나 작은 요소의 개입으로 이야기는 다르게 흘러간다.
신발 밑창으로 볼록 튀어 오른 조약돌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주룩 미끄러졌다. 하여 나뭇가지는 그의 눈꺼풀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눈가로 깊은 생채기를 냈다.
『으악! 내 눈!!』
지면을 똑바로 밟지 못한 탓에 찌르기가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못 하고 빗나갔다.

뭐, 나름 좋은 점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나 역시 치명상을 입는 대신 어깨를 살짝 베이는 걸로 끝났다는 거다. 사선으로 잘려나간 옷 틈새로 빠르게 붉은 물이 베어나왔지만 피부 아래 근육까지 칼날이 닿은 건 아니어서 적절한 조처만 취한다면 출혈 역시 곧 멈출 터였다.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나는 더 이상 상대를 공격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산을 타며 체력을 잔뜩 소모한데다 방금 전의 일격에 모든 걸 쏟아 부은 탓에 말 그대로 먼지와 재만 남은 상태였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짐승이 두 다리로 선 것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얼어붙은 건 바로 그 때문이었고, 누군가 옆에서 훅 하고 입김만 불어도 그대로 쓰러질 참이었다. 신물이 올라와 구토감이 느껴졌음에도 그래서 마음 놓고 기침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거의 숨도 쉴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타평은 이런 내 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그는 허겁지겁 뒷걸음질 쳐서 나와의 거리를 벌리더니 칼로 허공 베기만 죽어라 했다. 아마도 하는 짓거리로 보아 공황상태인 듯했다. 이쪽에서 다시 도약하여 달려들면 어쩌나 겁을 집어 먹은게 분명했다. 마침내 내가 참지 못하고 콜록 기침을 터뜨리자 혼비백산했다. 지금 같아선 나 같은 어린애는 주먹질 한 방이면 단숨에 끝내버릴 수 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요, 요망한 것!』
그가 어찌나 씩씩거리던지 콧구멍이 두 배는 커져 있었다.
『어,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리고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부어 내 머리꼭지를 돌게 만들었다.
『애를 잡아먹고 둔갑했구나! 이 사악한 요마 녀석!』
아니, 이보쇼.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을. 숨이 막혀 구역질을 느끼는 요마가 있음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타평만 그런 생각을 한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뜬금없이 고약스런 살기가 느껴진다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피러 와봤더니... 음.』
타평과 나, 두 사람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청년 장수의 존재를 깨닫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하나는 전혀 인기척을 내지 않고도 사람이 그렇게나 가까이 접근했음에, 다른 하나는 그가 화려하게 칠해진 붉은색의 의주갑을 착용하고 있어서였다. 더하여 청년 장수의 어깨 보호대엔 구슬을 물고 있는 용의 머리 그림 세 개가 새겨져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세 개씩이나 되었다.
「적룡군이다.」
어린아이의 울음도 뚝 그치게 한다는 위용은 과연 소문처럼 범상치 않은지라 타평은 듣기 민망한 끽 소리를 내며 거북목을 만들었다.

해를 등지고 선 채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던 청년 장수는 여전히 골몰히 생각에 잠겨 이렇게 말했다.
『어느 쪽이 살인자고 어느 쪽이 요괴지... 보아하니 저쪽으로 시체도 한 구 굴러다니는 것 같고... 어디보자. 칼을 든 자는 이쪽이고...』
심드렁한 말투지만 어쩐지 무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이런 말도 했다.
『이거 귀찮군. 헷갈린다고 전부 죽여 버리면 잔소리를 들을 테고... 음, 생각 같아선 전부 죽이면 간단할 것 같은데... 까짓 것, 일단 저지르고 볼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타평은 파랗게 질려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가파른 부근에 이르러선 뛰어내렸다. 그만한 기울기와 높이면 발목을 접지를 것이 분명했음에도 펄쩍 뛰는 동작은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음, 저놈은 바지춤을 쥐고 달아나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잡으러 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대신 청년 장수는 노골적인 호기심 - 더하여 불쾌감을 얼굴에 드러내며 내 쪽을 주시했다.
『자, 그럼 너는 어떻게 할래?』
어쩌긴. 나도 달아나고 봐야지.
그렇게 눈빛으로 대꾸하고 등을 돌리던 찰나 후들거리던 오른쪽 무릎이 보란 듯이 꺾였다.
무릎이 꺾인 것뿐인데 청년 장수는 내 몸짓에 반응, 순간이동의 마법을 부려 - 움직임이 너무 빨라 순간이동이라고 밖엔 설명이 되지 않았다 - 땅바닥에 코를 박지 않게끔 친절하게 날 부축해 줬... 개뿔, 정정한다. 한손만 사용하여 장사의 힘으로 내 멱살을 힘껏 잡아챘다.
『후욱!』
시야가 억지로 반 바퀴 돌자 긴장으로 인해 가뜩이나 좋지 않던 속이 더 나빠졌다. 게다가 허공으로 발이 들린 채 흔들리기까지 하여 울렁거림은 곱절이 되었다. 목 졸림에 더하여 현기증까지 일자 의식이 빠져나가려 했다. 안 좋다. 여기서 기절하면 적룡군의 청년 장수는 그대로 내 목을 부러뜨릴 것이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가운데 주변은 이내 소란스럽게 변했다. 한 명이 아니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나타나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정신이 흐릿한 관계로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그 어조는 분명해서 청년 장수더러 당장 하던 짓을 멈추라며 야단하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내 귀를 자극한 건 특정 인물의 울부짖음이었다.
『무무무무무무, 무슨 짓입니까!』
『요괴를 붙잡았다, 이라벽치.』
『어딜 봐서! 그냥 어린애잖아욧!』
『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가고한에 어린애로 변신하는 요괴가 나온다고.』
『그런게 있기는 있죠. 하지만 그건 머리가 나빠서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지 못해요. 둔갑을 해도 속옷을 머리에 쓰고 다닌다고요! 아이고, 그러니 제발 그만 하십쇼. 그러다 죽겠어요!』
말리는 손이 가세되니 공중에서 내 몸뚱이는 더욱 흔들렸다.
『어허! 잘 보거라, 이라벽치. 네가 사전에 알려줬던 그대로 이것 또한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어.』
『뭘요. 제가 보기엔 바지와 윗도리를 잘 입었는데요.』
『이라벽치 네 녀석은 여전히 관찰력이 꽝이군. 눈 커다랗게 뜨고 자세히 봐라. 허리띠를 허리에 묶지 않고 엉뚱하게 발목에 묶었잖아.』
『에... 지금 보니 분명 허리띠가 맞기는 합니다만...』
『그러니 변신귀가 분명하겠지.』
『에, 에엣?! 그 정도의 사소한 걸 갖고 변신귀라고 단정짓는 건가요?! 이 아이, 상처를 입고 피도 흘리고 있는데... 험한 일 당한 가엾은 아이면 어쩌려고... 제 눈에는 영락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만.』
『거 참. 요괴가 맞다니까 그러네.』
인상을 찌푸린 청년 장수가 멱살을 잡은 팔에 힘을 더 주어 내 몸뚱아리를 거칠게 흔들어댔다.
빨리 죽이고 싶으니 어서 둔갑을 풀어라, 풀어라 그렇게도 말했다.
제발 그만해. 이제 한계다.
『웨에에엑!』
날 에워싼 모두의 눈이 삽시간에 동그래졌다.
『......』
『......』
쥐죽은 듯 조용해진 가운데 이제 모두의 시선은 토사물을 몽땅 뒤집어 쓴 청년 장수에게로 집중되었다.

Posted by 미야

2015/05/10 12:22 2015/05/1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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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11 02:09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미야 2015/05/11 11:21 # M/D Permalink

      댓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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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리여리한 팔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매일 붓만 쥐고 있으니 살이 더 마르는구나.》
상냥하여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굳은살이 박혔는데 손가락만 그렇구나. 팔뚝의 모양은 이리 봐도 여인네가 아닌데 비쩍 골아 이 또한 사내답지 않으니 이것으로 무얼 할꼬. 장작 대신 써먹을까, 내 침실로 들여 목침(木枕)으로 대신할까. 옳거니, 그게 좋겠군. 오늘부터 이걸 베고 잠자리에 들어야지.》
친구는 한참을 껄껄거리다 별안간 연료가 소진이라도 된 것처럼 웃음을 멈추고 정색했다.
그리고는 날아가는 새가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언성을 높였는데 아무래도 무술을 연마한 자가 아랫배를 관통하여 울리는 소리라는 건 큰 북처럼 크게 들리는 법이라 주변에선 천둥이 쳤다 착각했다.

《근육이 없잖아, 근육이! 평소 운동을 전혀 안 하니까 근육 비슷한 것도 안 만져져! 흔적도 안 남았어! 이래가지고는 긴급한 상황이 되면 제대로 팔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그냥 당하겠다!》
나는 언제나처럼 고서를 필사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어 그의 참견이 달갑지가 않다.
《그만 좀 주물럭거리세요. 게다가 그렇게 흔들어대니 제 팔이 많이 아픕니다.》
《너는 팔이 아프겠지만 나는 가슴이 아프다. 괘씸하다. 어찌 하려느냐, 날 이리 아프게 해서.》
《무슨 말씀이세요. 벌겋게 부어오를 제 팔과 달리 아픈 가슴 쯤이야.》
《매정한 놈!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부어오른 팔은 금방 치료가 되지만 아픈 내 마음엔 연고를 바를 수 없으니 쉽게 낫지도 않는다. 하여 그대는 천하에 둘도 없는 불충한 자다.》
불충이란 단어에 발끈하여 대드는 나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모기처럼 가냘팠다.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불충이라뇨. 저는 제국 이사실의 백성도 아닌 걸요. 그러니 신하가 될 수 없고, 신하가 아닌지라 불충도 저지를 수 없사옵니다.》
따박따박 반박하자 그는 어린애처럼 발로 바닥을 걷어차며 짜증을 냈다.
《에잇. 하여간 말대꾸는... 지는 법이 없어요, 저놈의 얄미운 주둥이는.》
《아이고.., 팔뚝만 미운게 아니고 이젠 제 입도 얄미운 겁니까.》
《당연하지. 밉다. 미워서 못 살겠다. 그러니 그만 붓을 내려놓고 나와 어울려줘야겠다.》
《시러요. 바빠요. 관심 없으요.》
《불충이다!》

그렇게 밉다, 밉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도 그는 나름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고자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그게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골리는 재미로 그랬는지 판단이 서지 않지만.
어쨌거나 가르친 사람이 무능해서가 아니고 게으른 글쟁이 나부랭이의 팔은 주먹질 용도로 써먹기엔 아무래도 효율이 많이 떨어졌다.
『운동을 좀 할 걸.』
양팔을 어루만져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근육 같은 건 안 붙어 있다.
더하여 영양 상태가 고르지 않아 뼈가 앙상한 팔이다.

『안즈 님, 잘 생각하셨소.』
가슴팍에 피가 튀어 더욱 으스스한 느낌을 자아내던 사내가 짧은 숨을 내뿜으며 내가 서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손잡이가 단풍나무로 만들어진 단검을 오른손으로 쥔 채였는데 날이 위로 향해 있었다. 그러고도「죽이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말로 감히 날 설득했다 생각하는 눈치다.
물론 나는 설득당하지 않았고, 어른의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다. 반대로 내 뱃속은 먹물처럼 시커멓고 진흙탕처럼 지저분하다.

오늘에 이르러 다시 재생되기를 허락한 목소리가 잡동사니로 가득찬 심연으로부터 둥실 떠올랐다.
《요령을 알려주마. 그러니 잘 기억해두렴. 싸움에 임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기선 제압이다. 그러니 있는 힘을 다해 쩌렁쩌렁 질러라. 내 친히 시범을 보여주지. 네 이놈,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이러느냐. 내가 누군지 알고 까부는 것이냐~!!》
가만 생각해보니 그건 좀 뭐랄까... 쑥스럽다.
풍채 좋던 친구가 말 위에 올라타서 그 대사를 꺼냈을 적엔 위풍당당하고 참 멋이 있었는데 내가 하면 그야말로 익살스러운 대사가 될 터, 깔끔하게 포기하자. 나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옳지, 바로 그겁니다. 안즈 님. 이리 더 가까이 오시오.』
생략된 말은「이리로 오면 멱을 따드리겠소」겠지.
고함은 못 질러도 기선제압은 할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파랗게 벼려진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선전포고를 했다.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이 산중에서 무엇과 마주쳤는지 아직도 깨닫지 못 하였느냐.
어금니를 꽉 다문 상태에서 숨겨놓은 본성을 까발리며 한껏 표독스런 표정을 짓자 이를 본 타평의 낯가죽에서도 미소 비슷하던 것이 한 꺼풀 벗겨져 내렸다. 독이 닿으니 표면이 망가져 녹아내린 것이다.
그 뒤를 대신한 건 당혹감. 동시에 이해가 가질 않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이었다.
사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거리에서도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너, 뭐... 뭐냐.』
말을 더듬으며 아래로 내렸던 팔을 번쩍 들었다. 여전히 핏물이 마르지 않은 칼날이 똑바로 겨누어졌다.
그는 겁에 질린 듯 보이기도 했고, 흥분한 것처럼 보이기도 같았다. 이마의 주름이 무시무시했다. 배다른 동생 리세리가, 아버지가, 할멈이 나를 볼 적마다 드러내 보이던 찡그림이었다.
『글쎄다, 나는 무엇일까.』
마당에 드러누워 숨이 끊어져가는 개에게 달라붙어 항문부터 그 안쪽 내장까지 뜯어먹던 벌레를 목도하였을 적에 리세리는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동생은 문간방 너머로 정좌하고 앉은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적에도 똑같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렇다면 나는 구더기인가. 불길함의 원형인가. 아직 죽지도 않은 동물의 살을 파먹는 벌레와 비슷하다 할 수 있는가.
이성을 직관적으로 마비시키며 잠식해 들어오는 그것의 정체는 혐오... 싫은 것, 참을 수 없이 싫은 것, 외면하고 싶은 것, 거칠게 꿰맨 흉터처럼 자국을 남기고 빗물처럼 침식하여 깊고 큰 고랑을 만든다.
자, 이제 나는 여기서 다시 질문한다.
너는 지금 무엇과 만났는가.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가장 절박한 충동에 의거하여 보름달에 정신줄 놓은 날짐승인양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차라리 선제공격.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 오히려 붉게 달아오른 타평의 눈동자로 돌격하여 날아드는 내 모습이 반사되어 비쳤다.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내 모습을 비춰주던 반사막을 나뭇가지로 곧장 뚫어버리려 했다.
『오, 오지 마! 히이익! 히익!』
압력이 더해져 공기가 갑절로 무거워졌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환한 햇빛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진득한 어둠을 느꼈다. 그 어둠 한 가운데서 입을 벌리고 있는 건 인간이 가까이 해서 좋을 거 하나 없는, 그야말로 풍기는 냄새 그대로 구역질나게 역겹고 해로운 종류다.

그의 칼이 내 가슴을 찌르는게 먼저일까, 아님 타평의 눈이 뭉개지는게 먼저일까.
「성인인 저 자의 팔이 훨씬 길다. 아마도 내가 먼저 찔리게 되겠지.」
고통을 예감한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그러나 나는 주저하지 않았고, 곧 형태를 잃고 깨져버릴 남자의 왼쪽 눈알에만 오로지 집중하였다.

Posted by 미야

2015/05/06 21:17 2015/05/0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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