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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1/28 낙서-일상생활30 by 미야

낙서-일상생활30

둘이서 같이 맥주를 마시러 나온 건 이번으로 세 번째다.
이유는 멋대로 가져다 붙였다. 3개월간 데이트도 못 해본 노총각들의 셀프 위로 모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핀치는 낄낄거리고 웃는 소음을 병풍처럼 두른 이곳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결코 싫지 않았다. 대화가 짧게 끊겨도 어색하지 않다. 둥근 얼굴의 동양인 바텐더는 맛있는 양파링도 가져다주었다. 취기가 적당히 오르자 몸도 따뜻해졌고, 뺨도 붉어지고, 긴장도 풀렸다. 덕분에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약간 졸립기까지 했다. 핀치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도 깜빡 잊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려 들었다. 그 실수에 반응, 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피곤해요?』
『아뇨. 것보다 이것저것 주워 먹었더니 배가 부르네요.』
『술집에 왔으면 술을 마셔야지 그러면 어떻게 해요, 핀치.』
『것보다 그 올리브는 절 주셨으면.』
『아~ 하고 입 벌리면 드리오리다.』
『응? 지금 뭐라고?』
냅킨을 접으며 손장난을 하던 리스는 어느새 위스키 스트레이트로 업종을 변경, 예의 무뚝뚝한 얼굴이 대들보가 무너져버린 낡은 오두막처럼 그 고유한 형태를 잃어갔다. 평소의 주량을 감안하자면 있을 수 없는 얘기인데 장난치며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는 것도 그렇고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의 술친구는 오늘따라 상태가 좀 안 좋다.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올리브를 직접 먹여주겠다니.
갑자기 의식을 잃고 테이블에 꼴까닥 고개를 박을까봐 겁이 났다. 핀치는 정색하고 재빨리 빈 유리잔의 개수를 헤아렸다. 그런데 에게, 겨우 세 개다.
『존. 당신 괜찮아요?』
『그럼요. 말짱합니다.』
그러나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이어진 대화의 내용으로 유추하자면 리스는 한참 전부터 제정신이라는 녀석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눈게 분명했다.
음.......... 그러니까 리스는 어젯밤 꿨던 꿈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냈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40대의 남성이 꾸고 나서 기분 좋았다고 말할만한 종류라면 보통은 섹시한 속옷을 입은 스칼렛 요한슨이 침대에 누워있다던가, 체중이 증가하기 전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누드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던가, 제시카 앤 심슨이 가슴을 몽땅 드러낸 채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던가... 대략 그런 것들일 거다. 결혼을 하여 자녀를 둔 가장이라고 해도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남자는 그렇게 생겨먹은 동물이다. 뭐, 취향이 그쪽이라면 골반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낸 브래드 피트가 추파를 던져왔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남자가 품는 판타지라는 건 그 나물에 그 반찬이라는 거다.
하지만 존 리스라는 인물의 판타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상당히 괴상했다.
『정말 어렵게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니까요, 해롤드. 마침내 찰칵 소리가 나자 얼마나 신이 나던지 체면도 잊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답니다.』
『미안합니다만, 리스. 저는 그게 왜 신이 나는 일인지 납득이 가질 않는데요.』
『그 좋은 머리로 이해가 왜 안 가요. 마침내 제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니까요.』
맥주잔을 입에 대다 말고 그대로 얼어붙은 핀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스는 횡설수설 떠들며 손가락으로 뺨을 긁어댔다. 입은 귀에 걸렸다.
『곳곳에 책장이 있었어요. 책이 잔뜩 있더라니까요. 천장부터 바닥까지 가득이오. 마루가 무게로 꺼질 것 같았어요. 정말 대단했어요. 그렇게 많은 책은 처음 봤거든요.』
『그래서 당신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죠. 왜냐하면 꿈에선 글자가 안 보이잖아요. 제목을 읽을 수 없어 답답했어요.』
『거기까지는 이해를 했어요. 그 다음이 문제인데.』
『알고 봤더니 그게 책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찾아낸 건 색깔별로 구분된 트렁크 팬티였어요. 이것 봐라, 끝내주네 이러면서 그걸 한 아름 챙겨서 품에 안았답니다.』
『하아?』
『깨끗한 세제 냄새가 났어요. 정말 근사했어요.』
리스는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제멋대로 감동했다.

그러니까 남의 집에 도구를 사용해 자물쇠를 해체하고 들어가 귀금속이나 현찰이 아닌 남의 트렁크 팬티를 약탈하는 꿈을 꾸면서 (아마도 성적으로) 흥분했노라 말하는 건 문제가 심각한 거 아니냐고.

한손으로 턱을 괴고 삐딱한 자세로 리스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어.......... 제가 이상한 건가요?』
당연히 이상하지.
하지만 핀치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안주로 서비스된 땅콩 하나를 집어 입속에 넣고 씹었다.
입안에 음식이 들어가 있으면 예의범절을 이유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편법으로 핀치가 입을 다물자 영 못마땅했던 것 같다. 리스는 뿌루퉁한 얼굴을 했다.
『핀치는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보는 꿈은 안 꿔요?』
『모르는 장소에 가서 길을 잃어버리고 개고생 하는 꿈은 자주 꿉니다만.』
그렇지 그렇지 이러며 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비슷한 꿈을 꿔요. 그럴 적엔 핀치는 어떻게 하나요?』
『똑바로 걷습니다.』
『그게 해결책인가요.』
『어쩌겠어요. 꿈에선 택시를 부를 수가 없더라고요.』
『말 되는군.』
『다들 비슷할 걸요. 당신도 꿈속에서 경찰은 안 나오지 않던가요. 남의 집에 무단침입을 했어도 싸이렌 소리나 경보기 알람은 안 울렸죠?』
『그게 말입니다, 해롤드. 약간 틀려요.』
리스가 돌연 그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스산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기계가...』
『기계?』
『당신이 만든 기계요.』
『그게 왜요.』
『나에게 화를 내요.』
『뭐?』
『가지고 있는 물건을 도로 내려놓고, 열었던 방문을 도로 잠구고, 왔던 길로 얌전히 나가지 않으면 후회하게 만들어 버리겠다면서 짜깁기 된 여러 남자 여자 목소리로 경고를 해요.』
『잠깐.』
『그래도 책은 마음껏 가져가도 된다고 단서를 달지요. 정서 함양에 큰 도움이 될 거라면서요. 콰지모도와 집시 처녀 에스메랄다가 나오는 레 미제라블을 추천한다면서 기계가...』
『그건 노틀담의 꼽추. 레 미제라블은 자베르와 코제트.』
『어라. 둘이 같은 거 아니었습니까.』
『작가만 같아요. 것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것 같은데요. 리스 씨가 꿈에서 들어 가봤다는 집이 그러니까 제가 사는 집이었던 겁니까?』
『문패엔 해롤드 렌이라고 씌여져 있더구먼. 그게 당신 집이에요?』
『아뇨! 저는 문패를 달지 않아요!』
핀치가 불쾌하다며 잔을 번쩍 들어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그렇구나, 리스는 몰래 메모를 해두었다. 핀치는 문패를 달지 않음.
『왜 그렇게 제가 사는 장소에 집착하는 겁니까. 그건 집(home)이 아니고, 동시에 집(house)일 뿐이라고요. 당신이 그렇게 관심을 가질 까닭이 없단 말입니다.』
술 취한 사람에게 화를 내봤자 소용없지만 핀치는 떽떽거렸다.
『그리고 당신은 의외로 상상력이 부족하군요. 제가 일반 주택엔 살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나요.』
『저런. 호텔방을 장기 임대해서 살고 있다고요? 아니면 창고?』
『오-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예를 들자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이건 꼭 기억해둬야 한다.
일반 주택이 아닐 수 있음.
리스는 혀가 풀린 어눌한 발음으로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창고에서 살면 정말 불편하겠어요, 핀치... 가엾게도.』
『으이그! 이 술주정뱅이! 그런게 아니라니까요!』
『힘들면 우리 집에 와도 됩니다. 전 욕실에서 잘게요. 침대는 당신이 써요.』
『네, 네. 명심하겠사옵니다.』
이제 그만 마시자며 핀치가 리스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눈꺼풀을 꿈뻑거리던 그의 술친구는 언제나처럼 바른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끔거리며 쳐다보니 얼굴도 그다지 붉지 않다.
순간 아차 싶었다.
핀치는 값을 계산하는 남자의 뒷통수에 대고 고함을 꽥꽥 질러댔다.
『나쁜 사람! 취한 척하고 날 떠본 거예요?! 이젠 당신과 다시는 술 안 마실 겁니다!』

Posted by 미야

2012/11/28 13:36 2012/11/2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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