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01

들어가는 글

아이의 이름은 걸람(乞襤)이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은 거지라는 걸 굳이 먹물 냄새 풍겨가며 그렇게 불렀다.

처음 소산 거리에 나타났을 적에 아이는 산 채로 파묻혔다가 기적적으로 흙을 파고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심하게 더러운 옷을 걸쳤고, 머리는 흙투성이였다. 예닐곱 정도 된 외모에 왜소한 체구로 짧게 어, 어, 소리만 내곤 했는데 목을 다친 건지 입을 열면 듣기 싫은 쇳소리가 났다.
부모가 누구고 집이 어디인지 덕분에 그 누구도 알 재간이 없었다.
심지어 성별도 알 수 없었다.
소산 주민들은 아이가 부모와 같이 길을 가다 강도를 당한 모양이라 추측만 했다.

넋을 잃고 길거리를 방황한지 열 아흐레가 지났을 때 채소가게 셋째가 심심풀이랍시고 상한 과일을 던져주며 어서 먹으라 하였다.
배를 곪던 아이는 허겁지겁 주워 먹고 단단히 탈이 났다.
사람들은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묽은 똥을 허벅지 사이로 줄줄 싸고 있는 걸람의 모습을 보고 조만간 송장 치우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걸람은 똥물에 파리가 앉았을지언정 명줄이 쉽게 끊어지지 않았고, 보다 못한 막꾼이 코를 쥐곤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주워 의장에 던졌다.
혹시라도 시변하여 주변을 돌아다니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는 죽지 않고 살아나 채소가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죽어 원념이 되면 아들을 반드시 죽일 거라 믿은 채소가게 주인 송씨가 서슬 퍼런 얼굴이 되어 생각 짧은 셋째를 크게 꾸짖고 모대신 사당에 가 향을 올려 사죄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파! 아버지!’
‘인석아. 원한은 그 대단한 상세도 망하게 하는 법이야! 저 아이가 죽어 밤마다 관을 두드리며 널 찾으면 어쩔 생각이냐.’
‘관 위에 큰 돌을 올려놓으면 되잖아요!’
‘산으로 누르면 모를까, 바위로 귀신을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멈추지 않고 채소가게 송씨는 걸람 또한 멱살을 잡고 끌고 와 모대신에게 억지로 고두배를 올리게 만들었다.
엎드려 이마를 흙바닥에 세 번 찍은 뒤 걸람은 따뜻한 죽 그릇을 받았다.
이때 벌겋게 변한 이마를 문지르던 걸람은 고소한 죽 냄새에도 풀어지지 않는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WTF



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250근, 그러니까 150kg에 달하는 배추를 짊어지고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걷는 일은 힘들다.
예전의 내 몸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염병에 걸려 한 번 죽었다 깨어난 탓인지 가능했다.
근육이 붙은 몸도 아닌데 액션 배우 드웨인 존슨처럼 무엇이든 번쩍번쩍 들었다.
벌레를 잡겠다며 온 힘을 다해 손바닥으로 벽을 후려쳤을 적에 흙벽이 후드득 무너진 적도 있다. 단단한 벽돌을 쌓은 벽이 아니니 가벼이 무너질 수도 있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와 돌가루를 섞어 반죽한 흙은 물을 상당수 먹지 않은 이상 대단히 단단해 구멍을 내려면 쇠로 만든 도구를 써야 했다. 더하여 이곳 소산은 큰 비가 자주 내리지 않는 곳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작은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힘이 장사면 뭘 해. 궂은 일을 도맡아 하여 거칠었어도 크기는 여인의 것처럼 작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순전히 못 먹고 자란 탓이다.
소산 사람들은 인심이 그다지 너그럽지 않아 나 같은 고아나 비렁뱅이에게 냉혹했다.
매질을 하여 쫓아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루 종일 마당 쓸기, 물 나르기를 시키고 찬 밥 한 덩이를 줬으니 말 다 했다.
현대인의 감성으로는 엄연히 학대였는데 이 시대 사람들에겐 어린이 노동이 불법이라는 생각 이전에 그게 왜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
뭐. 범죄자 잡는 관아도 안 보이고 글을 가르치는 서당도 없는 눈치니 많은 걸 바라서는 안 되었다.

‘하나라, 조나라... 은나라? 삼국지는 아닌 것 같고.’
확실히 삼국지는 아니다. 근심하며 채소가게 송씨에게 황건적을 언급했더니 ‘무슨 두건. 노란 두건? 난릉 금씨가 언제부터 두건을 썼지?’ 라는 신묘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황건적이고 난릉 금씨이고 전에...
좀비가 지척으로 굴러다니는 세계가 삼국지겠냐고.

“아, 씨발!”
너도나도 옆 마을로 배달 가기 싫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다 까닭이 있는 거였다.
언덕 너머로 비틀비틀 걷고 있는 주시의 형태가 다섯은 되었다.
하나 둘 정도면 건강한 어른들은 주시를 발로 뻥뻥 걷어차고 지나갈 수 있겠지만 아무리 약한 것도 숫자가 많으면 충분히 위협적이다. 비루먹은 들개도 다섯이나 모여 있으면 돌아가는 게 순리다.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봤다. 고개를 숙여 땅도 쳐다봤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냐? 꼭 그렇지는 않다.
그래도 귀찮고, 성가시고, 짜증나는 상황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여기서 길을 돌아서 가면 두 시향이나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 그러니까 배달을 완료하기까지 최소 1시간이 더 걸린다는 얘기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해 그림자를 가늠했다.
시계라는 현대 문명이 없어도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주시를 피해 돌아서 가면 배달을 완료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해가 질 거다.
곤란하다. 어둠이 내리고 음기가 강해지면 이지 모드는 순식간에 헬 모드로 바뀐다.
그럼 뭐다?

“꺼져!”
아무래도 선입관이 좀 있다 보니 다짜고짜 주먹 쥔 손으로 주시의 얼굴을 가격했다.
원래 살던 세상에서는 좀비는 머리를 날려버려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두개골을 부수는데 주력했다.
퍽 소리가 나며 주시의 머리통이 찌그러졌다.
그러나 이곳의 주시는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존재가 아니었고 그보다는 마력, 신묘한 영기, 사악한 주술 같은 것에 영향을 받은 거라 머리가 상한 정도로는 움직이는데 별 지장이 없었다.
나에게 얻어맞은 주시는 꾸룩, 소리를 내더니 하얗게 변색된 눈동자로 날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왜 때리느냐 항의하는 것처럼 팔을 앞으로 내밀며 허우적거렸다.
주시는 힘이 세지도 않아 잡혀도 뿌리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의 어깨엔 배달을 마쳐야 하는 배추가 무려 250근이나 올라가 있었다.
주시가 배추를 건드리지 않도록 재빨리 거리를 벌리고 오른발을 들어 주시의 배를 걷어찼다.
“꺼져!”
벌렁 넘어뜨리고 난 뒤에야 깨달음이 왔다. 이곳의 좀비는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게 최고다.

“여어, 아걸. 배달 가는 중이니?”
머리를 노리는 걸 관두고 주시의 다리를 집중 공략하는 중인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한가롭게 시시덕거리는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 나무 위를 쳐다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마침 딱, 소리를 내며 주시의 아래턱이 코앞에서 맞물렸다. 물려봤자 좀비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법은 없노라 느긋하게 굴면 큰 코 다친다. 기본적으로 저것들은 시체다. 입안에 온갖 박테리아가 우굴 거린다는 얘기다. 물린 상처로 균이 들어가면 패혈증 걸리기 십상이다. 여기엔 의사도 없고 항생제 같은 건 더더욱 없다.

허리에 힘을 꽉 주고 오른다리를 크게 들었다.
불꽃 회오리 슛~!! 딱딱한 나무토막 같은 느낌의 것들이 주르륵 쓰러졌다.

머리 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걸, 너 내 말 무시하냐.”
“죄송합니다, 설 공자.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바쁘다보니.”

설양은 성격이 매우 안 좋다.
음... 그러니까 모양은 예쁘지만 속은 썩은 인간 쓰레기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안 좋으냐면, 언젠가 지고 가는 물통이 너무 무겁다고 푸념하자 그 물통을 부숴버렸다.
얼빠진 표정으로 산산조각 난 물통을 쳐다보고 있자 도움을 주었으니 가격을 치루라며 손을 내밀었다.
아이에게 삥 뜯으면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나는 그날 품삯을 설 공자에게 건네주고 망가진 물통 값은 별도로 주인에게 변상해야 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객잔에 앉아 음식을 먹다 벌떡 일어나 탕에서 머리카락이 나왔다며 가게를 부수었다.
빈정이 상했으니 성의를 다해 보상하라며 돈도 뜯어갔다.
이를 항의하면 반드시 보복을 하였는데 그게 많이 미친 수준이었다. 개를 죽여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가게 안에 던져놓는 건 그나마 약소한 수준의 보복이었고... 심하면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화마를 피해 맨발로 도망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물이 아닌 기름을 끼얹었다.

악마다.
동양인의 핏줄에선 구현될 리 없는 선명한 초록색 눈을 번들거리며 신나게 웃어 젖히는 모습에 나는 DC 코믹스의 빌런 조커를 떠올렸다.
이름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신 양반! 여기 조커는 있는데 배트맨이 없으면 어쩌라는 거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옆 마을에 배추를 배달하러 가는 도중이에요.”
주시를 피해 빠르게 걸으며 꾸벅 인사했다.
사실 설양이 나보다 더 연상인지 연하인지는 잘 모른다. 나는 고아였고, 마찬가지로 설양도 고아다. 생일축하를 해줄 가족이 없으니 생일도 모르고, 당연히 나이도 모른다. 나는 작년에도 열 세 살이었고 올해도 열 세 살로 셈했다. 의도하지 않은 쫄졸 굶는 수행으로 키가 자라지 않은 탓이다.
설양은 나와 달리 많이 먹고 그랬는지 벽곡을 한 나보다는 손바닥 두 뼘이 더 컸다. 그래서 순전히 키만 놓고 내가 동생이었고 자기가 형이라고 했다.
따지기가 귀찮았던 나는 마음대로 그러라고 했다.

휙 소리를 내며 설양이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좋지 않아.
나는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쓰러지지 않은 주시의 숫자를 헤아렸다.
설양이 여기서 재는 체를 하며 한 마리를 쓰러뜨리면 배달 값의 절반이 날아간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호의는 공짜가 아니라고 늘 주장했다.
헐값도 아니라고 덧붙였다.
주시 두 마리면 배달 값 전부를 내 놓으라 요구할지도 모른다.
아 진짜, 그건 정말 아니야.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면 설양이 나뭇잎을 길게 찢어 입에 물었다.
삐잇, 가느다란 풀피리 음색이 흐르자 그 즉시 주시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잣 됐다.
배추값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이제 몸을 팔아야 할 처지에 몰린 것이다.

Posted by 미야

2021/10/13 13:00 2021/10/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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