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아, 하거나 호오, 하거나. 어느 쪽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마이클.』
쏘아붙이자 입을 다물었다. 한 3초 정도.
『그럼 갑자기 막 미워서 죽이고 싶어졌다던가. 솟구치는 화를 견딜 수 없다던가.』
『바이러스 이름이 갱년기는 아닐 텐데.』
자가진단을 모두 마친 조지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안색을 읽었다.
모르겠다. 몇 가지 중요하지 않은 오류가 발생했고 덕분에 짜증이라고 여길 법한 감정적 혼란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정상 범위 내다. 인간으로 치자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의사에게 보여도 어깨를 으쓱일 거다.
글쎄다. 얼굴만 봐선 꾀병이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치곤 멀쩡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LED 상태 창을 확인했다. 유리창에 반사된 색은 언제나의 푸른색이었다.
이게 붉은색으로 변하면 그 또한 자아를 잃고 벽면에 rA9 글자를 가득 새기게 될까? 주먹을 꾹 쥐었다 도로 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조금은 끔찍스러울 것 같았다.
『훔쳐냈어?』
마이클이 목소리를 짐짓 낮췄다. 현재 시각 AM 5시 32분.
조지는 자신과 흡사하게 생긴 그를 말없이 쳐다봤다.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얼굴이다.
예전에는 단 한 번도 의식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에 이르러 깨닫고 나니 제법 불쾌한 느낌이다.
캐머런은 길을 가다 우연히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여자와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엔 무섭게 화를 내곤 했다. 그리고 다신 그 옷을 입지 않았다. 고가의 유명 브랜드 의상이라고 해도 그랬다.
『훔쳤냐니까.』
『그 훔친다는 표현 좀 어떻게 해보지 그래, 마이클. 잠시 빌려 쓴다거나, 아니면 써보고 돌려준다거나, 훨씬 부드럽게 말할 수 있잖아.』
발끈하자 소프트웨어 불안정 수치가 급속히 증가했다.
조지는 속으로 숫자를 10부터 1까지 거꾸로 세었다. 이런 행동이 인간에게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안드로이드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지 불안정 수치엔 변화가 없었다.
디지털 신호는 0과 1의 나열이기 때문에 어쩌면 십진수의 스레드를 무효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난 그에게 텍스트 단말기를 사용할 수 있게 빌려달라고 말했어. 제임스는 흔쾌히 나에게 그걸 건네줬지만 단말기에는 도난방지 기술이 걸려 있어서 사용이 불가능했어.』
『그게 뭐 어때서. 개나 소나 도난방지 기술을 걸어두잖아. 무력화면 되지.』
『주방의 덧창을 통해 집안으로 몰래 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얘기야, 마이클. 나는 이미 한 번 시도를 해봤고, 쉽게 깰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어.』
『엄살은. 한 번 시도해서 뚫리면 그거야말로 걸쇠 고장 난 주방 덧창이지.』
안드로이드 수용소에서도 그랬다. 조지는 신중해야 한다며 몸을 사렸고, 마이클은 일단 저지르고 보자며 줄을 벗어났다. 그러니까 총에 맞았다.
『덕분에 탈출도 했지.』
『지금 허락도 없이 내 데이터를 읽은 거야, 마이클?』
『까칠하긴. 시도만 했어, 시도만.』
조지의 어깨에서 슬그머니 손을 내린 마이클은 틀로 찍어낸 미소를 지어 동료의 불만을 잠식시키고자 했다.
조지는 정색했다.
『그러지 마. 좀 전에 ST-300과의 접촉 여파로 내 메모리 데이터가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앞으로는 그렇게 덥석 나와 연결하면 안 돼.』
『에이,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너와 0.5초 연결되었을 적에 화아, 하거나 호오, 하지 않았다고.』
『의성어로 표현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어쨌든 넌 괜찮아 보여, 조지.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걱정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마이클.
조지는 고개를 돌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재차 살폈다.
아까부터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 옆으로 전혀 모르는 이의 모습이 같이 비치고 있었다.
몸에 솜털이 있으면 죄다 곤두섰을 것 같다. 유령처럼 오싹하다. 한편으로는 친근한 느낌도 든다.
철 지난 정장 차림새인데 드레스 셔츠에 갈색 베스트를 걸쳤다. 40대 후반 중년의 체격으로 살짝 군살이 붙었다. 그렇다고 해도 배가 막 나오고 그런 건 아니어서 식이요법이 필요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고자 하면 전반적인 인상이 흐릿해진다. 불투명한 유리창 건너편에 선 사람처럼 말이다. 시선을 살짝 비켜서 보면 반대로 또렷해져서 린넨 소재 베스트의 단추 개수가 4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각정보가 교란되어 괴이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건 분명한데.
유리에 비친 거리를 가늠하여 여기쯤 서있겠거니 싶은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제임스가 보였다.
양복의 중년 사내와 다르게 그는 비 맞은 개처럼 비쩍 골았다.
머뭇거리며 그들에게로 제임스가 접근해왔다.
겁을 먹은 것처럼 잔뜩 위축된 모습이었다. 시선을 바닥에 둔 것도 그렇지만 다섯 걸음이나 떨어져서 여차하면 튈 태세다. 가뜩이나 첫인상도 나빴는데 코앞에서 쇠파이프로 안드로이드 머리를 날렸으니 날 선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더니 한참만에야 입을 뗐다.
『저기... 경위님 말씀이 7시가 되어도 전철 운행이 개시될 거 같지가 않다고.』
순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지금의 그는 안드로이드인 조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사람인 제임스만 쳐다보며 대화를 이어나가던 앤더슨 경위와 매우 흡사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조지가 말했다.
『일요일은 원래 운행이 30분 늦습니다, 제임스.』
『평소 전철을 이용하지 않아 모릅니다.』
제임스는 많이 불안해 보였다.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였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건조한 입술에 자꾸 침을 바르는 것도 초조해서다.
『앤더슨 경위님은 지금 바로 경찰서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정도쯤은 있을 거라면서... 바로 이곳을 나갈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두 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마이클이 천진난만하게 턱을 괴고 노래를 불렀다.
『어떻게 하긴. 일단 감사 인사를 받아야지.』
『아, 예.』
『얼씨구? 이 양반 모르는 척하는 거 보소. 나 아니면 죽을 뻔했다?』
제임스는 꾸벅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근데 왜 내 얼굴을 똑바로 못 봐? 상대가 안드로이드라고 무시하는 거야? 세상의 어느 누가 시선 돌리고 고맙다고 인사를 해.』
그만하라는 의미로 마이클에게 신호했다.
그러자 제임스는 한 번 더 고개를 꾸벅였다. 그게 말재주 없는 사내가 나름대로 고민하여 내보인 작별인사였던 것 같다.
여전히 시선은 바닥으로 향한 채 바지춤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남은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등을 돌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질문을 던졌으면 답이라도 듣고 가던가.
묻기는 했어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나 보다.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고쳐 멘 제임스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