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54

※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번호는 작성 순서를 의미하며, 일부 설정은 원작과 같지 않습니다. 전체 공개 정책이 변경되어 아자씨들이 눈 맞으면 비번 걸어둡니다... 그래봤자 비공 개수가 없음. ※


기계는 번호를 제공함에 있어 이쪽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때려죽인다 해도 자야겠어요.』
사흘 연속 철야로 무리를 한 리스는 항복을 선언했다.
수중에 해결이 나지 않은 번호, 그러니까 리스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또 다른 번호를 쥐고 있던 핀치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가서 그만 쉬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메모지를 공처럼 굴려 리스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재빨리 양복 주머니 속에 넣었다.
깔깔해진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 있던 리스는 집으로 돌아갈 기력도 없었던지 도서관 구석에 이불을 깔고 그대로 드러누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단 잠이 들자 미동조차 하지 않아 시체로 착각할 지경이다. 양말과 신발도 벗지 않은 채였다.
매트리스 대용품의 접이식 쿠션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곳은 눈을 붙이기엔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다. 바닥에선 차디찬 냉기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칙칙한 빛깔의 군용담요는 포근함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래도 3시간 정도 재웠다가 흔들어 깨워 집으로 돌려 보내는게 좋을 것이다. 몸살이 나서 도저히 못 움직이겠노라 호소하면 근처 호텔에 전화를 걸어 방을 하나 잡을 생각이었다.
무리를 해서 좋을 거 없다. 사람은 피로가 쌓이면 능률이 저하되는 법이다.

시계바늘을 쳐다보던 핀치는 동시에 자신의 신체리듬도 따져보기 시작했다.
현장을 직접 뛰어다녀야 하는 리스보다는 사정이 괜찮기는 해도 사흘간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납덩이처럼 몸이 무거웠다. 카페인이 잔뜩 들어간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고 불면증 걸린 토끼처럼 컴퓨터 앞을 지켰지만 약물에 의한 속임수가 사라지자 더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체력고갈과 스트레스는 잦은 근육선통을 불러와 틈만 나면 발가락이 저릿저릿 아프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그렇게 쥐가 나면 10분가량은 신음소리도 못 냈다.
『나이는 속일 수 없군.』
생각 같아선 곤히 잠든 리스를 옆으로 밀치고 그리로 가서 벌러덩 드러눕고 싶었다.
하지만 핀치는 참을성이 많은 사내다. 머리꼭대기까지 담요를 뒤집어쓴 동료를 곁눈질로 쳐다보곤 구도하는 성직자처럼 자세를 가다듬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말라붙은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기계가 보내온 9자리 번호의 주인을 서둘러 찾기 시작했다.

여자는 먼젓번 주요 용의자와는 달리 꼭꼭 숨어있지 않았다. 반대로 광고에 자기 이름을 실었다.
《윙필드 탐정사무소》
이름만 보면 남자로 생각하기 쉽다. 그녀도 그걸 노렸던 것 같다. 놋쇠로 만들어 붙인 사무실 문패엔 미스, 혹은 미세스라는 호칭이 지워져 있었다. 몰개성적인 디자인과 글씨체에선 묘한 익명성이 느껴졌고,「비밀보장」이라는 케케묵은 표현마저 진지하게 보이는 효과를 자아냈다.
뭐, 그런다고 해봤자 광고와 현실은 서로 같지 않은 경우가 흔한지라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비좁고 초라한 응접세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집기비품의 허름함으로 미루어 보아 그다지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으리으리한 대리석 바닥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해서 뒤돌아 나가버릴 그런 분위기다.
눈껍질이 용접한 쇠붙이처럼 서로 달라붙을 지경인 핀치는 제일 먼저 소파로 눈길을 주었다. 아아, 낡은 건 둘째고 푹신해 보인다. 가서 누워봤으면.

『어떻게 오셨죠? 먼저 전화를 주셨던 분인가요?』
곱슬머리의 30대 후반 연령의 여자가 모서리 작은 방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른손에 아무런 표기가 되어있지 않은 파일을 하나 들고 있었다. 언뜻 보아 윙필드 탐정의 비서라고 착각하기 쉬웠지만 사전 조사를 끝마친 핀치는 그녀가 월급을 받는 직원이 아닌 사장 본인이라는 걸 알고 있다. 물론 정식으로 소개받기 전까지는 아는 체 하지 않을 작정이다.
전화라는 단어에 반응, 핀치는 테이블에 올라가 있는 표준 모델의 유선 전화기로 눈길을 주었다.
『저어, 오기 전에 전화를 먼저 해야 하나요?』
여자는 질문을 듣고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아무래도 다른 분과 착각을 한 것 같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곳은 예약이 필수인 치과병원이 아니니까요. 괜찮으시다면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은 편에 속했고 듣기 좋은 깊은 울림이 있었다.
핀치는 말 잘 듣는 착한 소년이 되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의자로 향했다.
기다리라 해놓고 여자는 다시 나왔던 방으로 사라졌다.

처음부터 많은 걸 할 생각은 없다. 반듯하게 앉는 척하며 엉덩이 아래로 손을 내려 능숙하게 도청기를 설치했다. 카메라까지 달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으나 아직은 그럴 기회가 아니다. 여자는 금방이라도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책상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들켜봤자 좋은 소리 못 듣는다. 게다가 핀치 생각엔 사무실 안에 이미 감시 카메라가 달려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탐정 사무소 안이다. 무선 신호만 해킹할 수 있다면 번잡스럽게 이쪽에서 카메라를 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잘 돌아가지 않는 목을 움직여 대략 이쯤이겠거니 짐작되는 부분들을 쳐다보았다. 쓸데없이 큰 그림 액자는 작은 디지털기기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아니면 장식용 도자기 화병은 어떨까. 위치로 보아 아주 적격이다. 아니면 절반가량 내려온 창문의 블라인드 뒤로 감춰뒀을 수도 있다.
감시 카메라를 상상하자 기분이 나빠졌다.
「직접 찾아온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을지도.」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고 있는데 안쪽에서 캐비넷을 닫는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다시 빠른 걸음으로 돌아온 윙필드의 손은 이번엔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사무적으로 미소를 지으며「핀치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아무개 씨처럼」출입구를 마주보는 위치를 골라 앉았는데, 일반적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는 모양이 사뭇 달랐다. 덕분에 핀치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대화를 하게 생겼다. 그다지 편한 느낌은 아니었다.

『제 소개를 하죠. 데보라 윙필드입니다.』
그녀가 솔직하게 직구를 던져왔다.
핀치는 가만히 생각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놀란 척을 약간 하는게 좋겠지.
『여자 분이셨군요.』
『더블브레스트 양복을 입고 모자를 쓴 탐정이 아니어서 놀라셨나요.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뒤로 생략된 말은 다음과 같다. 여자라서 일을 맡길 수 없다 생각되면 나가셔도 좋습니다.
그리고는 1분가량 어려운 침묵을 지켰다. 아무래도 의뢰인에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찬스를 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녀는 손가락을 깍지 낀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불편한 1분이 그렇게 지나갔고.
탐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미행을 당하고 있으신 거죠?』
지어낸 용건을 그럴듯하게 털어놓으려던 핀치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네? 제가 미행을 당하고 있다고요?』
『키는 185에서 189cm 가량. 보통 체격에 짧게 다듬은 머리. 언뜻 봐선 사복 경찰 비슷해 보이지만... 분위기로 보아 경찰은 아닐 것 같군요. 자, 그래서. 당신은 누구에게 쫓기고 있는 거죠?』
워우워우야. 핀치는 당황한 상태에서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집으로 돌아가라며 깨워서 내보냈다. 리스가 그를 따라왔을 리는 없다.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럴 리 없습니다.』
『하지만 짐작가는게 있으신 거죠.』
측면으로 앉은 여자가 핀치의 안색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제가 미행하는 사람의 외모를 묘사했을 적에 당신의 눈이 좌우방향으로 희미하게 움직이더군요. 특정 사람을 떠올리고 계셨던 거에요. 동시에 몸을 딱딱하게 긴장시켰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창문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어요. 보통 미행당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밖에 누가 있는지 관심을 두게 되죠. 그리고 그 관심은 창문을 쳐다보는 동작으로 이어져요. 하지만 당신은 창문이 아닌 나를 보고 있네요.』
여자가 다리를 꼬았다.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있지도 않은 마누라 뒷조사를 해달라는 이야기는 까먹었다. 순간 핀치의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Posted by 미야

2013/01/08 11:34 2013/01/0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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