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10

리스는 지금 화가 단단히 난 상태다.
물론 그는 벽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지른다거나, 휴지통을 걷어찬다거나, 프린터기를 창밖으로 집어던지는 짓은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깍지 끼고 그저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을 뿐이다. 엉덩이에 종기가 났다는 식의 불편하다는 표정을 빼면 언제나처럼 평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치는 그냥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고용인은 폭발 일보직전으로 펄펄 끓는 기름을 용케도 얇은 사과껍질 하나로 포장 중이다.


핀치는 등을 웅크리고 제일 먼저 그의 급여 이체 내역부터 확인했다.
「내가 실수를 했을 리 없는데. 내가 실수를 했을 리 없...」
설령 착오가 생겨 급여가 제때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리스는 그다지 돈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비싼 양복을 사 입는 법도 없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지도 않는다. 브랜드 시계를 차지도 않고, 최신 가전제품에 열광하는 일도 없다. 오죽하면 나가서 좀 즐겨보라고 핀치 쪽에서 등을 떠밀곤 한다.
「가서 취미 생활을 만들고, 돈도 쓰고, 좀 즐겨봐요, 미스터 리스.」
「섭섭한 소리. 저에게도 취미가 있어요. 내 취미 생활이 뭔지 몰라요?」
물론 알다마다.
차이나타운 콜롬부스 공원에서 장님 노인네와 장기 두는 것을 논외로 하자면.
푹 빠져있는 그의 취미는 무기 구입이다.
식사는 통조림으로 해결하면서도 총기류 구입에는 눈이 뒤집힐 정도의 거액을 투입하고 있다. 지금 민병대를 조직하려는 거냐 놀라서 펄쩍 뛴 적도 있다. 예상 금액에서 0이 세 개가 더 붙었으니 두말하면 잔소리. 어쨌든 금액이 엄청났기에 핀치는 배려심 높게도 이를 급여가 아닌 활동비 내역으로 별도 지급하고 있다
. 뒷동네로 가서 수류탄을 한 박스 구했더니 땡전 한 닢 수중에 안 남았지 뭐예요 - 이런 일이 일어나면 곤란하다.
「시스템은 별 이상 없어 보이는데.」
사람이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하다.
핀치는 자신의 사망이나 행방불명 탓에 리스가 큰 어려움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니까 자금줄이 막혀선 안 된다는 거다, 시스템은 매월 일정 금액을 리스만 아는 비밀 계좌로 자동 송금한다. 만약 핀치의 사망을 확인하게 되면 천문학적인 거금을 추적이 불가능한 루트로 일시불로 지불토록 세팅이 되어 있다. 국가 1년치 예산에 맞먹는 거금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존 리스가 돈 문제로 곤란함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달 월급은 정상으로 빠져나갔네.」
안도하고 슬그머니 뱅크 조회 화면을 닫았다.


「돈 문제는 아니고. 그렇다면 뭐지. 혹시 치통이 생겼다거나...」
베어를 쳐다보는 척하고 리스의 얼굴을 훔쳐봤다.
「흐음, 그건 아니군. 치통은 확실히 아니야.」
이제 핀치가 가진 가상의 리스트는 겨우 두 개의 줄만이 그어졌을 뿐이다.
「그럼 집주인과 또 싸웠나?」
생일선물이랍시고 준 박스터 스트릿에 위치한 아파트는 진작에 버림을 받은 눈치다. 리스는 그곳으로 잠을 자러 가지 않는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 차분하게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그러질 못했다. 핀치 딴에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전직 CIA요원 기준으로는 합격점과는 거리가 먼 모양이다. 실망.
아무튼 리스는 예의 습성을 바꾸지 않고 여느 때처럼 세 곳의 안전가옥을 번갈아가며 사용했고, 수시로 숙소를 갈아치웠다. 최근에는 현금으로 월세를 내는 퀸즈의 싸구려 아파트에서 나와 모텔 장기 투숙객으로 들어갔다. 자의로 그런 건 아니고 천장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쫓겨났다. 배관이 낡은 건 리스 탓이 아닌데 불운이 겹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집주인은 수리를 위해 문을 열어달라고 아우성쳤고, 리스는 기계가 뱉어낸 번호를 추적하느라 사흘 연속 외근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걸 두고 싸운 눈치다. 아니, 리스가 일방적으로 야단을 맞았다.
「집안에 코카인이라도 숨겨뒀수?! 아님 시체라도 있는 거요. 이 굼뜬 흰둥이야! 아래층은 이미 물이 철철 넘쳐 한강이라고! 급하다고 했음 펄떡 달려왔어야지!」
리스는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화를 내지 않는다. 흥분한 관리인이 손바닥으로 그를 떠밀었는데 묵묵히 당하고만 있었다. 반격하면 관리인이 다친다. 마약상도 아닌 남자를 3층 창문 밖으로 내던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릎에 총 두 발을 쏠 수도 없다.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그래. 내가 놓친 부분이 바로 그거야. 극한에 몰리지 않는 이상 존은 화를 내지 않아. 모텔 침대에서 바퀴벌레가 단체로 춤을 췄다고 해도 콧방귀조차 뀌지 않을 걸. 보다 심각한 다른 문제... 예를 들자면 일라이어스에게서 으스스한 내용물의 소포가 왔다거나.」
머리를 쫑긋 세우고 나름 요령을 부려 리스를 다시 훔쳐봤다.
「그런데 이 가설엔 문제가 있지. 일단 일라이어스가 존에게 감정이 있어도 그 사내는 치사하게 움직일 성격이 아니라서...」
그리고 바로 그때 핀치와 리스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순간 리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새삼스럽게 그의 키가 무척 크다는 걸 깨닫고 핀치는 졸아붙었다.


『아니, 왜, 왜, 그러니까. 저기.』
『만지지 말아요, 핀치.』
『뭘? 뭘요?』
『다친 곳을 손으로 자꾸 만지면 상처에 좋지 않아요. 이리와요. 차가운 물수건으로 부기를 빼야겠어요.』
『응? 다친 곳?』
이틀 전에 길에서 묻지마 추행을 당했다.
그래봤자 애들 장난이라서 핀치는 가볍게 흘려보냈다. 혈기 왕성한 장난꾸러기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는데 당시엔 무서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우 웃겼다. 세상에, 그러니까 녀석도 다리를 저는 나이 많은 아저씨와 입을 맞추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거다. 하기는 해야겠고 - 망할 아이패드, 얼어죽을 내기 - 박력 있게, 짧고, 굵게, 한 방에, 이러다보니 어색한 키스따위가 아니라 무슨 자동차 접촉사고 비슷하게 되어버렸다. 돌진해서 박치기를 했군 - 네이슨이 살아서 이 이야길 들었다면 웃다가 호흡곤란으로 무덤으로 직행했을지도.
그리고 비밀인데 놀람이 가라앉자 핀치 또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아이들은 정말 사고를 잘 친다.
윌리엄이 열 두 살이 되던 해에 겨우살이 아래서 핀치에게 했던 키스도 아주 고약했었다.
그때는 윗입술을 물렸다.
네 아들은 코브라라며 네이슨에게 화를 냈던 기억이 있다.

『핀치?』
『아, 미안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했군요. 그런데 이거, 겉보기와는 달리 그렇게 많이는 안 아픕니다.』
신경 쓸 것 없다며 손을 휘젓고 방긋 웃었다.
그래봤자 리스는 그 웃음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더 냈다.
『웃지 말아요.』
『응?』
『그렇게 웃지 말라고요.』
그리고는 강압적으로 차가운 물수건으로 핀치의 코 아랫부위를 전부 덮었다.


화를 내는 포인트가 워째 많이 이상한 것 같은데.
핀치는 심기 불편한 고용인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존?』
대답 대신 씩씩거리며 의자를 가까이 끌고 와 핀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는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의미로 오늘 날짜 신문을 넓게 펴서 읽는 척했다.
말주변이 없는 남자가 화를 내면 진짜지 답이 없다.
속으로만 끓고 왜 화가 났는지 이유를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커피 가게에서 맛있는 와플을 먹으려고 했는데 다 팔리고 하나도 안 남았다?」
핀치의 리스트에서 다시 줄 하나가 그어졌다.
「실수로 개똥을 밟았다.」
글쎄다. 줄을 수백 개 그어봤자 어차피 정답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Posted by 미야

2012/10/26 10:08 2012/10/2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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