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1-06

움무 상인의 눈으로 보았을 적에 핀치는 무어라 정의하기가 애매한 사내였다.
바들바들 떨고 있다는 걸 어둠 속에서도 알아차릴 정도다. 무척 겁을 내고 있다. 그런데도 그 시선을 결코 아래로 내리지 않는다. 반대로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사형장으로 끌려나오는 이국의 공주처럼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강해 보였느냐, 전혀. 전부 허세다. 가느다란 막대기를 들어 딱 소리가 나게 치면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무너질 것만 같다. 말 그대로 여성용 망토를 입은 저 남자는 스틸스에겐 한 줌 꺼리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무 상인은 오랜만에 제대로 긴장했다.
이유? 그런 건 모른다. 다만 동물적 감각이 모공을 좁히고 털을 세우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기다려도 늦길래 여기에 있는 책들 제목을 잠시 살펴봤지. 헨리 아일랜드의 문학 이해, 고전주의 소네트 전집, 정통 신미학주의 도해... 원래 하던 일이 뭐였나?』
『글자를 읽을 줄 아나요? 놀랍군요. 글자를 아는 움무는 흔치 않은데.』
『조심해.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하는 건 좋지 않아.』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핀치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떨림도 커졌다.
『과, 관료였던 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잘난 사람은 아니니까요. 당신은 이곳에 있는 책들을 보고 절 대단한 존재로 부풀려 생각했을지 몰라도 전 그저 한때나마 중앙에 적을 둔 적이 있는, 나이 든 퇴물일 뿐입니다.』
『흐음, 내 생각은 다른데. 그쪽 거주지에 주민 등록을 한 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 아닌가. 소위 말하는 특권 계급이었다는 얘기잖아. 그런데 머리가 살짝 돈 것도 아니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중앙에서 벗어나 이런 파리 날리는 변두리까지 왜 흘러왔지?』
『그건...』
『말하기가 곤란한가?』
생각과 달리 핀치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정부로부터 강력한 처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호오? 비리 사건?』
움무 상인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더 해보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핀치는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조물거렸다.
『중앙은 안전한 곳입니다. 방어 시스템 탓에 그곳으로는 미친 롭이 침입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거금을 들여 중앙의 거주 등록증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거주 등록증이라는 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종류가 아니지요. 하지만 시골 사람들은 자세한 걸 몰라요. 그래서 저는 등록증을 구해다 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뇌물을 받았습니다.』

움무 상인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핀치는 때리지 말아달라며 애원하듯 등을 둥글게 말았다.
『무서운 놈.』
『나쁜 짓이었다는 걸 압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나는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그런게 아니잖아!』스틸스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순진한 시골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쉽게 속였겠지만 나에겐 통하지 않아. 그 말을 하면서 순간적으로 왼쪽 아래를 쳐다보더군. 이미 알고 있겠지? 사람의 뇌는 두 개의 큰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네. 하나는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담당하고, 다른 하나는 논리나 수리 같은 걸 담당하지. 하는 역할이 각각 다른 탓에 눈동자 방향을 보면 사람의 머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능해.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한 거라면 두 눈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향하게 되지. 그런데 방금 자네는 과장된 손짓을 보이며 왼쪽 아래를 보았어. 다시 말해 지금 말한 내용을 즉흥적으로 열심히 지어냈다는 거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뱀 같은 자식, 표정이 변했어... 됐어! 내가 관심 있는 건 칩이다. 중앙의 관료였다면 이식된 마이크로 칩을 가지고 있을 터.』
『칩이라니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네 말은 전부 거짓이다. 닥치고 오른손을 내밀어 손등을 보여줘.』
『싫...!!』

스틸스가 팔을 뻗어 핀치를 잡으려 했다.
핀치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움무 상인이 그의 목으로 팔을 두르는 것과 핀치가 소매춤에서 꺼낸 스프레이 통의 분사 스위치를 누른 건 거의 동시였다.
『으아악! 으악!』
겨자와 고춧가루를 2 : 5 비율로 섞어 만든 최루액이었다. 눈에 들어가면 죽을 지경으로 맵고 따가워서 눈물이 펑펑 솟게 된다. 찬물에 빨리 씻어내지 않으면 자극을 받은 피부로 붉은 발진이 돋는다. 치한 퇴치용으로는 아주 그만인 물건이다.
『당장은 괴롭겠지만 생명에는 지장 없어요!』
내뱉듯 설명하고 들입다 튀었다.

하지만 어디로? 심장이 쾅쾅 뛰었다. 허겁지겁 집밖으로 뛰어나온 핀치는 동서남북 방향을 순서대로 쳐다보며 패닉에 빠졌다. 잠시나마 눈이 먼 것처럼 되어버린 스틸스는「잡히기만 하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버리겠다!」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단순 협박은 아닐 것이다. 사내는 단단히 화가 났고, 핀치를 붙잡는 순간 사냥한 뱀의 껍질을 벗겨내듯 그를 다룰 것이다. 목숨이 위태롭다. 핀치의 눈빛이 흐려졌다. 아니, 어두워졌다. 몸의 떨림은 한층 더 심해졌다.
이대로 마을로 뛰어가 도움을 요청해? 무리다. 긴장 탓에 왼쪽 다리가 뻣뻣해졌다. 나름 빠르게 뛴다고 해도 남들 눈엔 겅중거리며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걷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가지고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붙잡히게 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숲으로 - 좋은 생각은 아니다. 경비병인 시멘스키야 제 앞마당처럼 돌아다니곤 했지만 몸이 불편한 그에게는 무모한 도전이나 마찬가지다.
핀치는 황망하게 벌린 두 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빠르게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은 너무 멀다. 핀치의 눈빛에는 괴로움과 원망이 가득했다.
『도와줘. 누구라도 좋으니까... 도와줘, 네이슨!』
당연한 얘기지만 이쪽에서 목놓아 불러봤자 하늘은 대답이라는 걸 할 줄 모른다.

겨우 덤불 하나를 뛰어넘는데 얼굴에 생채기가 생겼다. 이곳에 자라나는 식물들은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가시가 많고, 뻣뻣하다. 일부 식물의 진액은 피부병을 유발한다.
손가락으로 뺨을 더듬었다. 피가 나고 있다. 하지만 상처에 신경을 써선 안 된다.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하면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돌뿌리에 발이 걸렸다. 무릎이 힘을 잃자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핀치는 몸의 자세를 바로잡을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나뭇가지가 얼굴을 확 덮쳤다.
『개 같은 놈! 꼭꼭 숨는다고 못 찾아낼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움무 상인이 반 광란 상태로 집밖으로 뛰쳐나왔다.
뒹굴며 넘어진 핀치는 격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 * * CSI 드라마에서 나온 내용을 떠올려 적은 내용이지만 최근 연구에선 눈동자의 움직임으로는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무리라고 합니다. 그보다는 신체 동작 - 손의 움직임처럼 그 사람의 몸짓을 눈여겨 보는게 더 효과적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눈빛은 어색하다고 믿고 있지요. 그리고 시선을 피한다는 속설과 달리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경향이 있다고도 합니다. 쓸데없이 붙는 사족.

Posted by 미야

2012/08/23 12:54 2012/08/23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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