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 of interest (25)

핀치가 림보를 떠나 바깥 걸음을 하는 건 리스나 당사자나 그렇게 반기는 상황은 아니다.
「내가 하는 동작을 잘 봐요, 핀치. 이렇게 엄지손가락을 갈무리 해뒀다가 상대의 눈을 깊게 찔러 안쪽으로 뇌가 닿을 때까지 후벼...」
「No Thank you.」
「스스로 몸을 지킬 테크닉 하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내 몸뚱아리 하나는 건사할 수 있어요, 미스터 리스.」
「어떻게요. 당신은 총을 사용하지도 않고, 빠르게 뛸 수도 없고, 주먹질도 전혀 못 하죠. 그러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둬요. 이건 간단하면서도 유용한 기술입니다. 얼굴 찡그리지 말고 자세히 보세요. 이렇게 손가락으로 상대방 눈을 푹...!!」
그렇게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 수도 있는 흉악한 기술을 전직 CIA 요원으로부터 전수받은 핀치는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도로변에 주차된 렌트 차량을 향해 접근했다. 오른손에는 노트북을, 왼손으로는 커다란 쇼핑백을 든 채였다.

『실례합니다.』
조수석 쪽으로 접근하여 문을 열고 차량 안으로 들어갔다.
시트는 다리를 길게 뻗을 수 있도록 위치가 미리 조정되어 있었고, 차량 내부에선 감귤 계열의 방향제 냄새가 풍겼다. 테이크-아웃 커피 냄새가 날 거라고 추측했던 핀치는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지만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는 상황에서의 카페인 섭취는 재앙에 가까운 일임을 금방 상기하고 싸구려 감귤 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핀치는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리스는 정면을 주시한 상태로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숨을 돌린 핀치는 이마에 솟아난 땀이 식기가 무섭게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전원을 켰다. 그 옆에서 리스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투로 나트륨 덩어리의 과자를 내밀었다. 먹으라고 꺼낸 것은 물론 아니고 - 핀치는 지방과 소금 범벅의 프링글스를 전부 비닐봉투에 쏟아버린 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포장용기에 손가락 크기의 무선 네트워크 장비를 재주껏 끼워 넣었다. 이 와중에도 리스는 오로지 정면만 주시했다.

『WPA-PSK 암호화 방식을 사용하고 있군요. 핸드쉐이킹을 시도해서 인증키를 잡아보도록 하죠.』
『21시가 넘으면 순찰대가 정기적으로 이 앞을 지나갑니다.』
핀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낯선 자동차에 수상해 보이는 성인 남자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 순찰경관이 신경을 곤두세우겠군요. 그 이야기를 꺼낸 의도를 알겠습니다.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중이라고 거짓말하기는 싫으니 작업을 서둘도록 하죠.』

해킹 능력은 뛰어나도 상대적으로 자판을 조작하는 일에는 둔하다. 홈 네트워크 침입은 꾸준하면서도 다소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열어본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확인했고, 메일을 탐색하고, 다운로드한 파일을 열어 내용을 들여다보고... 아직까지는 평범했다. 앤은 15세 소녀다운 방식으로 구글 검색을 했는데 15세의 남학생이 아닌 여학생이라는 점에서 섹스, 포르노 등의 검색 단어는 빠져 있었다. 에드워드와 벨라, 트와일라잇에 흥미가 있었고, 과제를 위해 큐비즘 양식과 다다이즘에 대한 자료를 검색했다. 메일함은 만원이었다. 등록된 친구 계정이 몇 있었고, 쇼핑 광고물이 제법 되었다. 언뜻 보아 심각한 내용은 없었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핀치는 일단 앤의 메일 계정을 통째로 훔쳤다. 그 다음으로는 홈스쿨 과제물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고... 음악을 자주 다운로드 받았다. 불법 다운로드한 동영상도 있었는데 대다수가 눈이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캐릭터가 나오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요즘 여자애들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생각도 잠시,「아무리 만화라지만 왜 사람 머리카락을 선명한 분홍색으로 색칠한 거지?」의아하게 여겼다.

만화에서 관심 끄라며 리스가 끼어들었다.
『압축된 비밀 파일 같은 건 없나요, 핀치.』
『잠깐만요. 앤이 자주 접속하는 사이트의 주소를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애들이 잘 가는 게임 사이트인가요.』
『글쎄요.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요.』
핀치는 노트북 각도를 움직여 리스가 화면을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검정색의 바탕에 시든 붉은 장미.
어디로도 링크되지 않는 화면에 글귀가 적혀져 있다.

《미지의 신의 제단에 쓰여진 것은 그 첫 글자 하나라도 읽으려 하지 말라.》
그리고 단락이 끊기고 한참 아래로 내려가 다시 짧은 글이 이어졌다.
《난 그 미지의 신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도 알고 있다.》

핀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G.K. 체스터튼.』
리스는 처음 듣는 이름인 듯했다.
『그게 누굽니까.』
핀치는 살짝 당황했다.
『어... 흠. 리스 씨는 브라운 신부를 모릅니까?』
『교회와는 인연이 없어서요.』
『아니 아니, 종교가 아니라 탐정인데요.』
『체스터튼 씨가요?』
『아니오. 그쪽 말고 브라운 신부가요.』
『신부님이 탐정이라고요.』

이대로 한참 가도 동문서답이 계속될 것 같다.
핀치는「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얼굴로 리스의 팔을 툭툭 쳤다.
리스의 독서량이 기대 수준 이하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거고...
핀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건 이거다.

『체스터튼이 쓴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에 나온 내용입니다. 그런데... 곤란하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책에서 언급한 그 미지의 신의 이름은 바로 사탄입니다.』

Posted by 미야

2012/06/19 16:09 2012/06/1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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