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4 : 풀무불의 노래 7

그래도 운명은 살짝 자비를 베풀어 지나가던 배의 선장을 애꾸눈 잭이 아니라 하록으로 바꿔놓았다. 같은 해적이라도 한시름 놓았다고나 할까. 총포를 쏘아대는 사람의 수가 서른에서 마흔까지 불어났고, 더 많은 인기척에 반응한 렛셔 데몬은 어느 틈엔가 방향을 돌렸다.
몬스터들도 반찬 투정을 한다. 달랑 콩나물 무침만 올라간 밥상보단 고기 산적에 두부 부침, 김말이까지 곁들인 푸짐한 밥상을 선호하는 걸 보면 그렇다. 웰빙보단 기름진 식탁이다. 머리수 겨우 둘뿐인 이쪽보단 숫자가 많은 저쪽이 훨씬 매력적이다 싶자 본체만체하고 반대편으로 몰려갔다.

그라바스는 폭포수처럼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숨을 돌렸다. 살았다.

『누가 고기 산적이고 누가 김말이라는 거지.』
사람을 음식에 비유한 것이 기분 나빴던 모양이다. 유나가 장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 넣으면서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걸 살짝 비켜가면서 쥐가 나려는 종아리를 어루만졌다. 갑작스런 운동에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중이다. 손으로 누르자 단단히 당겨진 힘줄이 나 죽는다 엄살을 부려댔다.
『우리 말고도 테라로 접근하려는 무리가 더 있는 모양이네요. 총포를 저렇게 쏘아대는 걸 봐선 결계 밖 사람들이고요.』

총은 괜찮은 무기다. 앞으로 칼이나 도끼 같은 무기는 사양길에 접어들 거다. 화약을 장전하고 잽싸게 불을 땡기기만 하면 귀청이 떠나가는 굉음과 함께 적이 쓰러진다. 그만하면 작동법도 간단하고, 파괴력도 크다.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대륙 남동부에서 다수가 제작되는 이들 총포의 값은 특별 소비세에 수입 관세까지 붙어 악 소리 나게끔 무지 비싸다. 더하여 아직 개량해야 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에서 총포의 도입은 생각만큼 빠르게 퍼져나가지 않고 있다.
검집에서 칼을 꺼내 휘두르는 속도와 총알을 장전하고 발포하는 속도를 비교하면 이건 토끼와 거북이다. 저칫 실수로 조작을 하는 날엔 총알이 앞으로 나가지를 않는다. 미친 듯이 방아쇠를 잡아당겨도 철컥 소리만 나니 환장한다. 마음을 비우고 처음부터 다시 조작, 어렵게 기껏 쏘았더니 목표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무슨 일이죠?」라고 되묻는 일도 있다. 당연히 장군들은 구관이 명관이라며 신식 무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총신이 엉뚱한 폭발을 일으켜 병사가 다치는 일도 생기자「총포의 도입은 세금의 낭비」라며 원로회에서 대 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앞으로 30년 안에 대륙 어디에서나 일반화는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니어서 여전히 결계 안쪽 사람들은 총포가 뭔지 잘 몰랐다.

귀에 손바닥을 깔대기처럼 가져가 소리의 울림을 최대한 모아봤다.
떼를 지어 달겨드는 데몬에 놀랐는지 탕탕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콩 볶던 소리가 손톱 튕기는 소리로 조용히 잦아들었다. 아무래도 저들은「정면 돌파」대신「작전상 후퇴」를 선택한 모양이다.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모래 언덕 그늘 아래로 내려가 두 다리를 탁탁 털던 유나가 걱정도 팔자라며 잔소리했다.
『쓸데없다. 당연히 괜찮지. 챙이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방물 장수가 아니라는 건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어. 장전과 동시에 발포하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니까.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죽는 사람은 안 나올 거다.』
『심해요, 유나. 의도한 건 아니라지만 저 사람들, 결과적으로 우릴 도와줬잖아요. 조금은 걱정해줘야 의리 아녜요?』
『아까는 고기 산적에 김말이라며. 그러고도 누구더러 심하다는 소리를 하는 건지. 나 참.』

조금은 얼굴이 빨개졌다. 두부 부침에 김말이 운운했던게 사실이니 이러쿵 저러쿵 해도 변명도 못 한다. 청년은 어색함에 어흠 헛기침했고 유나는 그런 바보를 향해 휴대용 물병을 던졌다.
깨끗한 곡선을 그리며 물병은 곧장 그라바스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머리 회전이 느린 걸 보니 뇌에서까지 수분이 빠져나갔나 보군. 이참에 물 보충이나 해둬라.』
『마침 목이 말랐던 참입니다. 찰랑 소리가 반갑군요. 감사합니다.』
그라바스는 기뻐하며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감사는 뭘. 수면제에 설사약, 초강력 근육 이완제에 변비약까지 탔는데 고맙다고 벌컥벌컥 마셔주니 내가 다 부끄럽구먼.』
『푸웃-』
맛있게 물을 마시다 말고 입안에 든 물을 왈칵 쏟았다. 뭐? 수면제에 근육 이완제? 변비약?
입을 벌린 채 놀라서 쳐다보니 유나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주의력이 한참 부족하군. 포장을 뜯지 않은 새 것이 아닌 이상 함부로 입에 넣지 말라고 했었지?』
『뚜껑이 열려져 있긴 했지만... 약을 탔어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는데!』
『무색 무취의 약들도 많아. 그러니 혀를 맹신하지 말도록. 그리고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면서 함부로 마음을 주지 마라. 독이라도 탔으면 어쩌려고 내가 주는 걸 안심하며 넙죽 받아 마시는 거냐. 다행히 이번엔 약을 타지 않았지만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주의해라.』
『우왁~!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예요?』
『병은 안 줬다. 몸에 좋은 충고만 해줬지.』

그라바스는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얼핏 봐선 기껏해야 한 살이나 두 살 연상일 뿐인데 사람을 호되게 흔들다못해 바보로 만든다.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떨구고 싶어졌다. 유나는 몸에 좋은 약이라 했지만 잠자코 입에 넣기엔 그 맛이 너무 썼다. 삶지 않은 쑥의 쓰고도 쓴 맛이었다.
『심해, 심하다구. 세상 사람들 전부를 의심하면서 살라는 거예요?!』
『불신하는게 뭐가 어때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보단 훨씬 낫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쉽게 마음을 주지 마. 안도하는 바로 그 순간에 세상은 너의 코를 베어갈 것이다.』
슬슬 걷자며 신호하면서 유나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바람의 방향을 확인했다.
동풍. 이것은 좋은 징조.
조금은 긴장을 풀고 가방에서 소금 사탕을 꺼냈다. 작은 알갱이를 혀 밑에 두자 강렬한 짠 맛에 머리까지 찡했다. 퉷- 하고 침을 뱉은 뒤, 얼른 다리를 움직여 뱉은 침 위로 모래를 끼얹졌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예, 예.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 밑으로 도적이 숨지 않았나 매번 살피고요. 식당에서 밥을 주문하면서 주방장이 소금 대신 쥐약을 몰래 계란에 뿌리지는 않는지 의심을 해봐야겠군요.』
이죽거리는 말에 유나는 되려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필요하다면 식탁 아래도 살펴보는 거다.』
『난 그렇겐 못 해요!』
『어째서.』
『세상은 아름답단 말예요!』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는다. 차라리 귀찮아서 그렇게까지 못 한다고 투덜거렸으면「아, 그러냐」하고 대충 넘어갔을 거다. 그런데 세상이 아름다워 그리 못 한다고 하니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이거 하나밖엔 없다.
- 대왕 철부지

그 대왕 철부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직도 3/1 가량 물이 남은 물통을 다시 유나에게로 던졌다.
의도하는 바를 모르겠다. 유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입을 대고 마셨던 걸 다시 다른 사람 마시라고 건냈을 것 같지는 않고... (예절 빵점이다) 하여 그녀는 별 생각 않고 물통을 거꾸로 뒤집어 황금 같이 소중한 물을 그냥 모래에 쏟아버렸다.

가만히 이를 지켜보던 청년의 눈이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안에 든 물을 버릴 거라고 예상은 진작에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렇게 하길 원했던 건 아니었나 보다.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그라바스는 화가 단단히 났다는 걸 감추지도 않을 채 몸을 핑글 돌려서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봐? 그라바스.』
『됐어요!』
『왜 신경질이야.』
『몰라요!』
『어린애.』
『그래! 나는 철부지 어린애다. 그러니까 어른인 댁은 평생 그러고 살앗!』
저주하듯 외치며 젊은이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을 가로막았다.

여자와 남자는 40분간을 그렇게 말 없이 걸었다. 앞서거니뒤서거니 땅과 하늘이 하나로 녹아든 대지를 꾹꾹 밟아가며 가파지는 호흡과 싸웠다.
아지랑이 탓에 시야가 굴절되었다. 커다란 바위가 하늘에 둥둥 떠있다. 정확하게는 떠있게 아니라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겠지만 - 여하간 유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때마침 뜨거운 바람까지 불어닥쳐 눈을 감아야할지 떠야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후드를 한층 더 깊숙이 눌러쓰고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봤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도착했어야 한다. 걱정하며 고개를 들었다.
근처에 바다 비슷한 것도 없는데 쏴아- 하고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그 다음으로 인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입으로만 호흡하려 노력하면서 커다란 배와, 활기찬 항구와, 갈매기를 상상했다.
혹시라도 오늘 저녁에 신선한 회를 먹을 수 있으려나. 그게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군침이 돌았다.
그러고보니 배가 고프다.

『생선 좋아하나.』
예기치 않은 질문을 받은 그라바스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보아하니 여기서 생선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투다. 앞서 말싸움을 한 탓도 있어 뺨이 퉁퉁 부어 있었다.
『사막엔 물고기가 없어요, 유나.』
대신 말라 비틀어진 뼉다구는 있다. 무슨 암초인양 툭 튀어나온 뼈에 발이 걸려 넘어질뻔한 것이 이것으로 두 번째. 첫 번째 것은 티카티카 바위 새의 뼈인 듯했고, 지금의 것은 추측하자면 아마도 드래곤의 뼈가 아닐까 싶다. 오래되기도 되었고 그 크기도 어른의 앉은 키만큼은 되었다. 엄지발가락에서 피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제자리에서 동동 뛰었다. 드래곤의 화석을 캐는 사람이라면 심 봤다며 기뻐했겠지만 별 관심이 없는 그라바스에겐 남의 발톱을 아프게 만든 웬수일 따름이었다.
『뜬금 없이 뭐예요. 생선이 먹고 싶은 거예요?』
절룩거리며 언덕을 내려갔다. 거치적거리는게 많아 성가셨다. 곳곳에서 발목을 후려치며 딴죽을 걸었다. 모래를 뚫고 튀어나온 뼈들 중 일부는 오랜 풍화 작용 끝에 날카롭게 마모가 되어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마구 밟고 지나갔다간 발바닥에 빨간 오선지가 그려질 판국이다. 끙끙대며 엉덩이를 뒤로 돌리고 재주껏 미끌어졌다. 불안해 보이던 모래 바닥이 순간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아차 하는 사이에 바닥 아래로까지 추락하면서 입안으로 모래가 가득 찼다.

『퉤엣, 퉤!』
『너야말로 모래가 먹고 싶은 거냐.』
『그렇게 웃지만 말고 손이나 잡아줘요.』
『싫다. 혼자서 빠져나오도록.』
이미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고 있으면서도 말은 그렇게 차갑게 하고 보는 유나였다.

가까이에서 물의 냄새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근방으로 푸른 녹색이 보였다.
기적의 오아시스, 테라다.

Posted by 미야

2006/06/28 15:41 2006/06/28 15:41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71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1919 : 1920 : 1921 : 1922 : 1923 : 1924 : 1925 : 1926 : 1927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0483
Today:
328
Yesterday:
1861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