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4 : 풀무불의 노래 5

다가오는 땅거미가 흉악하다. 머리카락이 쭈삣 서려고 했다.
정면 돌파는 미친 짓, 그렇다면 얼마나 돌아서 가야 안전할지를 재빨리 생각했다. 머리 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근방으로 제법 커다란 바위산이 하나 있다. 그 바위산을 끼고 길게 우회하면 반 나절의 시간이 낭비된다. 그래도 그곳 지형은 커다란 S자로 휘어져 있어 살아 있는 사람 냄새를 맡고 광분하는 몬스터를 기술적으로 따돌릴 수 있다.
그렇게 하는게 좋겠다고 판단을 내리기가 무섭게「360° 뒤돌아 잽싸게 튀기」를 시도하며 고삐의 왼쪽 줄을 세게 당겼다. 말귀를 알아들은 티카티카 새가 튼튼하게 생긴 앞발을 높게 들었다.

『시간 낭비다. 주변을 빙빙 돌아도 상황은 엇비슷할 걸. 테라는 포위되었다.』
삐걱 소리를 내는 썰매에서 단번에 뛰어내린 여자는 익숙한 태도로 이부에게 은전을 수 십 던졌다.
『여기까지 왔으면 되었다. 이 앞은 걸어서 가마. 이건 수고비다. 넣어둬라.』

손바닥에 놓여진 차가운 감촉에 이빨 날카로운 몬스터는 잠시 잊었다.
테라까지는 아직 꽤 거리가 남았다. 그 수고비 치고는 너무 많다.
과불유급이라 했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그 사랑스러운 것들을 주머니에 넣을 생각을 못하고 이부는 어째서 - 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누군가 나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찾거든 절대로 모른다고 해라.』
『얼씨구?』
『본 적이 없습니다 - 라고 말하는 거다.』
흐응, 그러니까 은전은 순수한 수고비가 아니라 더하기 입막음 값이었나 보다.
이부는 반짝반짝 빛나는 동전 하나를 허공에 던졌다가 도로 낚아챘다. 오랜 관록이 붙은 동작엔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똑바로 간다고 해도 걸어서라면 1시간도 더 걸릴 터인데... 아프신 아버님께 술 한 잔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시체가 되어버리면 곤란하잖소. 뜨끈한 날씨도 그렇고 저놈들 분위기가 영 아닌데 괜찮겠어? 아가씨.』
『괜찮지 않다고 하면 더 태워다 주려고?』
『고렇겐 못하지.』
『그럼 묻지를 마.』
『미안하오. 그럼 잘 가오. 그건 그렇고, 젊은이 당신은 여기서 왜 내리슈.』

덩달아 부산을 떨며 가방을 챙기는 그라바스를 향해 이부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 가방만 끌어내리는게 아니다. 젊은이는 지갑을 열어 은 전 두 개까지 꺼냈다. 환장하겠다.
『착각했어. 댁이 내릴 곳은 여기가 아니야. 다시 올라 타. 목적지까지 총알 같이 데려다줄 터이니.』
『아뇨. 여기서 내릴 겁니다. 일정을 바꾸겠습니다.』
『뭐?』
『성지로 가면 은화 넷을 주겠다고 약속했더랬죠? 마음이 바뀌어 성지까진 가지 않았으니 양심껏 그 절반만 받아요. 그리고 이건...』
연달아 은전 두 개가 하느님의 축복과 같이 이부의 손아귀로 추가로 떨어졌다.
『부탁 하나만 할게요. 혹시 누군가 나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찾거든「테라로 갔습니다」라고 알려주세요.』

왜들 이래! 이부는 울컥해서 매운 고추를 어금니로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헷갈리잖아!』
여자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하라고 했고, 총각은「맞다, 게보린~」을 외치라고 했다. 아니, 그 반대로 아가씨가「맞다, 타이레놀~」이고 총각 쪽이「영구 없다」던가. 아니면 두 명 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머리를 흔들며 짜증을 냈다. 손아귀에 은전이 가득인데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의견을 통일하면 안 될까. 둘 다 봤거나, 아니면 둘 다 못 봤거나.
당장 자리를 떠야 한다는 걸 잊고 이부는 갈등했다. 실수라도 하여 거꾸로 대답하는 날엔 주머니에 든 은전이 무쇠로 만든 장화로 변해 그를 땅바닥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머리가 흙바닥에 닿는 순간, 심판관의 원망스런 목소리가 양심을 향해 속삭일 거다.
왜 헷갈려. 너 머리 나쁘냐. 머리 무지 나쁘지.
아이큐가 50이라 인정할 순 없다.
환장할만한 이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이부는 실랑이를 하며 청년을 잡았다.

『잔소리 집어 치우고 썰매에 올라 타. 어딜 도중에 내려. 댁은 나랑 같이 성지로 간다. 아무렴 내가 300마리에 육박하는 데몬 떼거리 앞에 손님을 떨궈놓고 줄행랑을 칠 거 같냐. 사람 잘못 봤어.』
『왜 나만 잡아요! 저쪽은 내렸잖아요!』
『잡을만 하니까 잡았어. 댁은 무기도 없잖아.』
『무기가 없긴.』
이를 증명한다며 가방을 열어 뭔가를 찾았다.

처음엔 식칼이라도 꺼내려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밖으로 드러난 물건은 나무로 만든, 2단으로 접히는 봉이었다. 최대로 펼친 길이는 1미터, 마른 걸레질을 꼼꼼하게 해서 반들반들 윤기가 돈다. 신혼 집 주방 창문 커튼 봉으로 쓰면 딱이겠다. 애들 장난하는 나무 막대기와 비교하자면 거기서 거기다. 몬스터를 상대로 승부를 걸어봄직한 듬직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아이들이 과제를 빼먹었을 적에「죽을래, 아님 숙제할래」위협용으로 휘두르면 적당할 것 같다.
이부는 막대기와 그라바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순간 귀에서 마른 소금이 사각 소리를 냈다.

농담도 심하다.
이부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여자가 선수를 쳤다.
『사일라그의 신성수 플라군의 자녀목 가지를 깎아서 만든「여행의 수호자」라는 상품이군.』
『앗! 이걸 아십니까.』
『반갑게 말할 것도 없다. 그걸 모르면 간첩이니까.』
『멋지죠? 친한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은 귀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너... 그 물건의 사용법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거냐.』
『알다마다요.』
그라바스는 나무 봉을 멋지게 들고「가면 용사 드래곤 핑크」의 자태를 흉내냈다.
자! 덤벼라, 악당! 정의의 용사가 널 용서하지 않겠다.
옆으로 누운 8자로 휘두르자 꿀벌이 날갯짓하는 붕붕 진동음이 났다.
『여행의 수호자라니, 이름도 근사하지요? 이참에 멋지게 휘둘러볼 생각입니다.』

자세는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만... 유나는 실소했다.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군.』
잘 모르겠다. 그라바스는 머리를 긁었다. 이걸 휘두르는데 설명서부터 읽어야 하나. 대장간에서 파는 장검엔 설명서가 붙지 않는다. 검집에서 유려한 은빛의 몸체를 꺼내기 전에 필히 그 설명서를 읽어야 한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다.
방금 다듬은 날이 날카롭습니다. 실수로 손을 베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엉뚱한 사람을 향해 휘두르는 일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이 주의 사항을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모든 민, 형사상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단단한 바위 및 골렘 등을 향해 내리쳐 발생하는 물건의 파손에 대해서는 제조사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기타등등.
『설명서요? 이런 걸 휘두르는데 설명서를 읽어야 합니까?』
『이리 줘봐라. 올바른 사용법을 가르쳐 주겠다.』
유나는 어린애로부터 봉을 빼앗아 들었다.

1, 나무 봉을 지면 위에 똑바로 세운다. 이때 균형을 잘 잡는 기술이 필요하다.
2, 살짝 손가락을 떼고 나무 봉이 우연한 방향으로 쓰러지길 기다린다.
3. 15분을 기다려도 쓰러지지 않으면 1번부터 다시 시작하는데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4, 나무 봉이 쓰러진 방향을 향해「이쪽입니다! 신탁이 내려졌습니다!」라고 말한다.
5. 그리로 걸어간다. 이때 뛰어도 무방하다. 힘들면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다.

달팽이가 토악질한 광경을 방금 전에 목격한 듯한 그라바스를 뒤로 하고 유나는 시범을 끝마쳤다.
『이상이다.』
『우와악~! 이거 뭐야아아~!! 막스밀리엄! 날 물 먹인 거야아아아~?!』
『설명서를 자세히 읽지 않은 네가 잘못이다. 비싼 걸 선물한 사람을 왜 욕해.』
『그치만, 그치만! 막스밀리엄 말이 반드시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제발 옆으로 새지 좀 말고 목적지까지 똑바로 가라는 뜻이었겠지. 짐작컨대 여차하면 도중에 마차에서 내리거나, 무리에서 혼자 빠지거나, 말 없이 다른 배로 갈아타고 그랬지? 그대의 행적이 훤히 보인다. 오죽했으면 지인이 이런 걸 다 선물했을까.』
『그려요. 난 길 잃어버리는게 취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어디 두고 보자! 3계급 강등이닷!』

이를 갈아대는 청년 앞에서 유나는 쌀쌀맞게 말했다.
『두고 보자고 하지만 말고 이참에 본국으로 당장 돌아가. 여행의 수호자까지 왔던 길로 돌아가라고 신탁을 내리고 있잖아. 이쪽이다. 어서, 어서! 네가 착한 마음에 날 도우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네가 있으면 오히려 걸치적 거린다.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바보를 돌보는 취미는 나에겐 없다. 돕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돕는 것이다. 자! 썰매에 다시 올라타라. 앞으로 좋은 여행이 되길 빌겠다. 상냥한 별빛이 그대와 함께 하길.』
『있어요.』
그러겠다는 대답으론 안 들린다. 유나는 가만히 눈썹을 찡그렸다.
『다시 한 번 더 말해라.』
『데몬과 싸운 적이 있어요.』
『미니 슬라임?』
『농담 아닌데.』
유나는 그라바스의 어깨로 두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의 키는 엇비슷해서「찍어 누른다」는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기백이라는 것이 있다. 선명한 적갈색의 - 마치 경동맥에서 힘차게 뿜어져나와 막 굳기 시작한 인간의 피와도 같은 빛깔을 가진 그녀의 눈동자가 짙은 어둠을 뿜었다.
『나도 장난 아니다, 그라바스. 해파리 미역과 장난쳤다고 렛셔 데몬에게 덤벼도 되겠거니 생각하면 안된다. 혹시 죽고 싶은 건가. 자살 방법치곤 창의적이지만 칭찬해줄 생각은 들지 않아.』
『내가 왜 죽고 싶어 한다는 겁니까, 유나. 난 앞으로 인구에 회자될 멋진 사랑을 할 겁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사부님과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습니다. 그 전까진 죽으라고 해도 못 죽어요.』

표정을 달리하고 맨 손으로 화살을 쏘려는 듯한 동장을 취했다.
『모든 생명을 키우며 대지를 품는 어머니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유나의 표정도 덩달아 달라졌다. 저것은 카오스 워드, 마법 주문이다.
『바람과 대기의 정령, 내 친구 바.바.라.는 내 손에 모여 적을 무찌르는 화살이 되어라.』

바람의 정령을 친한 척하며 바.바.라.라고 불렀다는 건 둘째다.
쉬익- 하고 순식간에 공기가 몰려들었다. 그라바스는 적당히 기다린 다음, 퉁 하고 화살을 쏘는 동작을 취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화살보다 천 배는 위력적이다. 압축 공기 덩어리에 맞은 렛셔 데몬 다섯의 머리가 순식간에 찢겨 나갔다.

『마법사였나!』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크게 동요한 유나는 눈을 동그랗게 했다.
『그런데 왜 검정 망토를 안 걸치고 있지? 마법사라면 목 깃을 세운 검정 망토를 입어야 하잖아. 더워서 벗은 건가. 하지만 가슴이 훤히 보이는 셔츠는? 오망성의 문신은? 가죽으로 만든 부츠는? 해골 무늬가 들어간 밸트는?』

어디서「마법사는 이런 겁니다」라는 불량 설명서라도 읽은 건가.
바람으로 만든 두 번째 화살을 날리기 전에 그라바스는 허리를 삐긋했다.
뭡니까, 그 해골 무늬 밸트라는 건!

Posted by 미야

2006/06/23 12:00 2006/06/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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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r 2006/06/25 02:13 # M/D Reply Permalink

    어디서 설명받은거죠, 저런 악취미의 마법사; 혹시 이 시대에는 마법사가 드문걸까요. 아무것도 없는데 화살을 쓰는게 멋졌어요! 엄청 강력하고 특별한 무기같은 인상을 준달까-.-; 그라바스는 금속을 못쓰는 사람답게(?) 부드럽고 온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것 같아요. 게다가 낭만적이고. 유나랑은 완전히 반대군요. 하지만 동시에 곧고 의지가 강해서 굉장히 멋져요. 부드러운 카리스마... 두 사람이 이뤄낼 멋진 조화가(혹은 투닥거림?)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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