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사요코>를 읽는 중. 아직 중간 정도밖에 못 넘겼다.
뭐시다냐, 이건 여고괴담... 이 아니라 남녀공학 괴담이다.

책을 읽는 도중에 엉뚱하게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코엑스 자리로 삽질 들어가기 전인 삼성동은 공중 목욕탕 옆으로 닭장이 있었을 정도였다. 지금은 부잣집 동네라고 해도 30년 전엔 꽤나 웃겼다. 휭~한 벌판 한 가운데로 아스팔트 도로를 닦기 시작하여 만사가 어수선한 그곳으로 고목이 되어 가운데로 구멍이 난 밤나무가 몇 있었고, 주위로 썩은 물이 고여 영 마르지 않았다. 언젠가 큰 물이 난 흔적이라던데 정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 여하간 지금은 죽고 없는 사촌 오라버니와 가끔씩 그곳으로 가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거기서 놀고 왔다고 하면 엄마가 싫은 표정을 짓곤 했는데 사실 대낮에도 머리카락이 쭈삣거렸으니 상당히 안 좋은 장소였던 건 맞다.
개발이 다 무엇이다냐. 흉한 땅은 아스팔트의 냄새와는 상관 없이 꼭 말썽을 부른다.

어느 날엔가 젊은 여자가 무서운 모습으로 살해당해 그 근방으로 버려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사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잡초를 헤치고 다니던 걸 먼 발치에서 보았다. 이유도 모르면서 갑자기 무서워져 오도도 떨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은 그 장소에 아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해보는 것이 애들의 심정인지라 어느날인가 작정하고 그 풀밭으로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버렸다.
벌렁벌렁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오줌 누는 자세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날씨가 쌀쌀했다. 추웠다. 그리고 어딘가에 붉은 핏자국이 있을 것 같아 매우 무서웠다.
한 10분 정도를 그렇게 있었을까... <별 거 아니잖아>라고 생각하고 훌훌 털고 집으로 돌아간 나는 보란 듯이 큰 열을 내고 드러누워 이틀을 학교에 가지 못 했다.

그때의 마른 잡초들이, 풀들이 바람에 흔들릴 적에 내던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강아지처럼 낮은 눈높이로 바라봤던 그 때의 살벌한 풍경이 무슨 까닭인지 머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이것이 죽은 여자가 보았던 마지막 광경이라는 걸 깨달았을 적에 어쩐지 슬퍼졌다. 나는 아름다운 걸 보면서 죽고 싶다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못할 이런 칙칙한 땅에선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범인은 잡혔을까. 그건 모른다.
다만, 지금의 으리번쩍한 코엑스와 삼성동을 떠올릴 적마다 그때의 기억과의 괴리감 때문에 어리둥절해지곤 한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가던 내 어릴적 모습까지, 모두가 환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괴담이라는 건 아마도 이런 것이겠지.
흐린 기억과 강렬한 단편적 기억이 엉망으로 맞물린...
여섯 번째의 사요코다.

Posted by 미야

2007/02/08 20:33 2007/02/08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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