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 미싱헌팅 2

내가 편지 봉투에 넣어 리나에게 보낸, 몰래 찢어낸 일기는 다음처럼 시작된다.
- 나는 지금 헌팅당하고 있다.

아멜리아 공주가 손수건을 씹어 먹으면서「오빠에게 꼬리치는 여자가 도대체 누구야~!!」라고 비명을 지르고도 남을 얘기다. 실제로 리나도 맨 처음엔 그리 착각하고「드디어 이 녀석에게 꽃 바람이 불어닥치는구나~♬」라며 반색했다. 성급한 그녀는 축의금 봉투에 금화 닷 푼을 넣고「축하한다, 잘 살아라」라고 적었다. 그 헌팅이 그 헌팅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야 얼굴색이 바뀌었지만, 그 전까진 희희락락하며 미니 스커트에 빨간 루즈를 바른 당돌한 여자를 상상했다.

『미니 스커트에 빨간 립스틱? 그쪽에게 쫓기는 것도 충분히 공포스럽다.』
행여나 미행당한 건 아닌지, 커튼 사이로 눈만 빼꼼 내밀고 밖을 살피던 제르가디스는 코웃음부터 쳤다.
이 남자의 결벽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밥사발 가슴의 여자가 엉덩이를 흔들면 인상을 찌푸리고 도망간다. 저 멀리서「이 아저씨의 운명은 자나깨나 독수공방」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 키메라는 보기와는 달리 꽤나 보수적이다. 여자는 다소곳해야 하며, 남자보다 먼저 프러포즈 해선 안된다고 믿고 있다.
『차라리 총들고 사냥하겠다고 날뛰는 남자들이 훨씬 괜찮겠다.』
『괜찮다고? 그게 괜찮아? 그게 네 취향이었어? 알았어. 다음부턴 총들고 사냥하는 남자를 소개시켜주지. 남자가 좋다는데야.』
리나는 어이가 없다며 팔을 벌렸다.
『내 취미는 오리 사냥입니다 - 라고 자기 소개를 할, 덥수룩한 턱수염의 아저씨를 소개시켜줄게.』
그러니 빨랑 닥치고 의자에 앉으라고 시늉했다.

『커튼은 그만 만지작대고 이리 와서 나에게 말해봐. 어떻게 된 일이야? 제르.』
『별 일 아니야.』
『경고하는데 나에게 거짓말 세 번 하면 후환이 두려워질게야. 그리고 지금은 원 스트라이크야. 별 일이 없어? 옆구리와 어깨에 붕대를 감고, 목에는 밧줄에 쏠린 듯한 상처가 보이는데 별 일이 없으시다?』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어.』
『투 스트라이크.』
손가락마디를 뚝뚝 꺾으면서 리나는 위협했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인간의 여자는 정말로 주먹을 갈길 것이다. 그것도 인정사정 안 봐주고 말이다. 더도 말고 어금니를 부러뜨리고, 콧잔등을 주저앉게 만들 위력으로 펀치를 날릴 것이다. 제르가디스는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방어하듯 손을 내밀고 워워 소리를 냈다.

『리나? 날 도와주려는 건 고맙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야. 혼자서도 잘 해결할 수 있...』
『좋아. 혼자 해결해. 난 옆에서 그저 보고만 있겠어. 하지만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알아야겠어.』
여자는 도끼눈을 부릅뜨곤 조금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제르가디스는 땅 꺼지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말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디크와 션 형제라고 알아?』
『디크와 션? 그런 이름은 아직까진 들어본 적 없어.』
『귀신 잡는 메로우 가문은?』
『오, 갇.』
대륙 남동부에선 알아주는 집안이라고 한다. 마법이 발달하지 않은 결계 밖 세계에서 마물을 상대로 싸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한 마디로 이들은 유별난 별종이었다. 특히나 제임스 메로우는「은탄환 제임스」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고스트 헌터들 사이에선 거의 신화적 존재라고 한다. 목표물을 선택하면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었고, 길게는 10년 이상 공을 들여 어떻게든 사냥을 성공시켰다. 그렇게 어렵게 일을 마무리 하고 나서도 의뢰인에게 막대한 금전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상황이 딱하게 되었다 싶으면 공짜로도 일을 했단다.
수고비는 무조건 금화로 두둑하게 뜯고 본다는게 생활 철칙인 리나가 보자면 완전히 미친 사람이다.

『미친 사람이지. 그게 어디 정상이냐. 저속령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국에 공짜 서비스가 웬 말이냐. 내 말이 맞지? 가우리.』
『어, 그런가. 여차하면 전 재산을 뜯어내는 너보단 정상인 것 같은데...』
『시꺼! 원래 싼게 비지떡이야! 비싼만큼 그 값을 하는 거라고.』
뭘 몰라 반박하는 가우리에게 매섭게 핀잔부터 준 뒤, 리나는 어흠 헛기침 했다.
『아무튼 그 은탄환 제임스는 나이가 들어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은퇴를 한건지, 아님 사고로 죽은건지는 아는 바 없어. 관심도 없고. 고스트 헌터들과 마주칠 일 자체가 없었으니까. 다만 듣기론 그 아들이 최근에 가업을 물려받았다고 해. 디크와 션은 그 은탄환 제임스 메로우의 아들들이야.』
『에게~ 그렇다는 말은 파릇파릇 애송이라는 거잖아.』
『네가 몇 살 적에 드래곤 슬레이브를 최초로 발동시켰는지는 기억하고 있는 거냐. 나이와 실력은 비례 관계가 결코 아니지. 애송이라고 무시했다간 큰 코 다치는 거다. 동생인 디크는 그렇다치고 형인 션은 장난이 아니라고. 열 두 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고스트 헌터 일을 했다고 하더군. 실력은 어지간한 마법사 뺨쳐. 마법력은 가지고 있지 않은데 그걸 무기로 죄다 커버한다. 어디서 듣도 보지도 못한 걸 잔뜩 가지고 있더군. 속도도 빠르고, 살상력도 있어서 곤란할 지경이야. 이 어깨 상처...』
제르가디스는 쓴 웃음을 지으며 붕대로 감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뭘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한 방 맞았는데 리커버리 주문으로도 치유가 잘 되지 않아. 인간인 부분은 회복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반복해서 덧나는 것 같더군.』
『그럼 큰일이잖아!』
리나는 걱정하며 제르가디스의 셔츠 자락을 번쩍 들어 올리려 했다.
뭐, 곧장 저지당했지만.
제르가디스는 아녀자가 사내 옷을 함부로 벗기는게 아니라며 허겁지겁 벽쪽으로 물러섰다.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네가 은탄환에 맞아야 하는 건데.』
『몰라. 아마도 걔네들 눈엔 내가 사람으로 안 보였던 모양이지.』
『그거 무지 괘씸하군!』
리나는 진심으로 분노해하며 버럭 고함질렀다.
『이유도 안 가르쳐주고 생 사람을 잡으려 한단 말이야?! 비록 머리카락이 철 수세미라고 해도! 몸의 2/3이 딱딱한 돌이라고 해도! 피부색이 새파랗다고 해도! 눈깔이 번들번들 빛나는게 수상쩍긴 해도!』
『리나. 방금 난 네 말투로 무지하게 상처 받았어...』
『사람처럼은 안 보여도 사람 맞잖아!』
『아예 상처에 소금 뿌려.』
『어떻게 널 때려눕힐 수 있냐구!』

추적은 석달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늦은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대수대에서 미적미적 손을 씻으며 눈을 흘끔거리는 남자 둘이 보이더란다. 먼지가 잔뜩 낀 셔츠에다 낡은 부츠를 신고 있었다. 눈빛은 날카로웠다. 평범한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아 내심 긴장하고 있는데 키가 작은 쪽이 큰 쪽을 향해 텃짓으로 신호하더란다. 행여나 여행객들을 퍽치기하는 건달들인가 싶어 제르가디스는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고 했다. 후드를 눌러쓰고 빠른 걸음으로 가까운 수풀로 몸을 감췄다.
『그런데 뻥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들입다 총을 쏜 거지. 이건 무장 강도들이다 싶었어. 그래서 마법으로 무장해제를 시키려고 봄디 윈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는데...』
키가 작은 쪽이 단도를 던져 어깨를 맞춰버렸다.
『정확하게는 맞고 튕겨 나갔다고 해야 옳겠지. 단도 같은 걸로 내 피부를 꿰뚫을 수는 없으니까.』
피멍이 들었고 얻어맞은 자국이 쓰라렸다. 하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마법 제어가 잘 되지 않았어.』
손안에 모여졌던 마법력은 순간 붕괴되어 사라졌다. 어처구니가 없어 재 시도를 해봤다. 역시 잘 되지 않았다. 천둥 벼락을 날릴 모션을 취했는데 쉭 소리를 내며 옆으로 마력이 새어나갔다. 마력이 봉인당한 건 아니었지만 제어할 수 없었다.
『엉망진창이었다구. 달거리 시즌의 네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하더군, 리나.』
『그딴 건 이해하지 마.』
『음, 정확히 뭐라고 그랬지? 마법도 쓰지 못하는 식충이가 된 듯한 기분이라고 그랬던가.』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나도 그랬어. 가슴도 작고, 목소리만 큰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
『이 자식! 거기서 가슴 얘기가 왜 나와!』

내가 몰래 뜯어낸 그의 일기는 그리하여 이렇게 이어진다.
- 마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리나는 단호하게 셔츠를 벗으라 명령했다. 단도에 맞은 상처를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는 거였다.
『봐서 뭐. 연고라도 손수 발라주게?』
쓰게 웃으며 그는 거부했다.
『냅둬, 이미 할 수 있는 치료는 끝냈어.』
『우리 사이에 뭘 부끄러워 하는 거니. 벗어, 벗어. 훌렁 벗고 빨리 이 의자에 앉아.』
『싫어, 의사 선생. 가까이 오면 성희롱으로 고소해 버리겠어.』
『어쭈?』
『냅두라니까.』
가까이 오면 그 손을 물어뜯을 기세로 제르가디스는 몸을 사렸다.

왜 그가 물벼락 맞은 고양이처럼 구는 건지 모르겠다며 리나는 화를 냈는데...
사실 난 그 까닭을 진작에 알고 있다.
실은 그 상처는 성스러운 다비드의 별 문양을 피부에 남긴 채 서서히 썩어들어가고 있다.
「리나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죽여버린다」라는 눈빛으로 날 노려본 뒤, 제르가디스는 지금쯤 꽤나 아플 거라고 짐작되는 어깨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짐작하기로는 그가 당한 기술은 파마(破魔) 저주의 일종이 아닐까 싶다. 제대로 제어할 수 없음에도 억지로 마법을 사용하려 하면 할수록 상처가 무섭게 덧난다는 증상을 봐선 아마도 그게 맞을 거다. 마력에 반응하고, 그 상대를 착실하게 갉아먹는다.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저주다. 데몬이나 몬스터를 상대로 하는 기술인만큼「그냥 봉인하고 말지」수준의 친절함은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 피 말리는 고통을 주다가 확실하게 끝장내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진다.
사태는 제법 심각해서 나는 그가 상처를 아예 도려내고 말까 고민하는 것도 지켜봤다. 피해 부위가 더 커지면 목숨이 위태롭다. 차라리 한쪽 팔을 전혀 쓰지 못하는 팔 병신으로 사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던지 그는 칼날을 불에 새빨갛게 달구다 말고 신음했다. 그리고 울었다.

그래서 난 그의 일기장을 훔쳤다.
리나를 불러왔다.
내 장난감이 내가 아닌 다른 자에 의해 망가지는 건 딱 질색이다.
울어? 어디 한 번 더 울어보시지.
팬티를 벗겨 그 날로 세일룬 왕궁에 소포로 부쳐버릴테다.

『뭐, 뭐야. 불안하게. 왜 그렇게 웃는 거냐, 제로스.』
『글쎄요, 제르가디스씨. 나는 지금 왜 웃고 있는 걸까요.』
여전히 날 맹렬히 쏘아보고 있는 제르가디스를 향해 씨-익 웃어보인 뒤, 리나의 신호에 맞추어 그에게 덤벼들었다.

Posted by 미야

2006/11/03 15:39 2006/11/0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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