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아빠의 비밀 통장

마음이 어지러울 적엔 몸을 움직이되, 단순 노동을 공략하라 - 집청소를 하면서 트럭으로(농담) 잡동사니를 버렸습니다. 출판년월이 1960년대인 썩은 책들과 스크랩한 누런 신문들, 오빠가 공부한다면서 샀던 책들, 자료랍시고 모아뒀다가 그 효율성을 상실한 채 잊어버린 자료들이 잔뜩 쏟아져 나와서 속칭 돌돌이라고 하는, 거 뭐랄까, 구루마... 하여간 바퀴 달린 바구니에 세 번씩 실어다 재활용 수거통에 던졌습니다.

이 와중에 오래된 통장이 책갈피에서 떨어졌는데요.
잔액이 500,000원이 좀 넘습니다. 평화은행이면 지금은 합병되어 없는 은행이군요.
오마나. 아빠의 용돈 통장이닷~ 비자금 통장이구놔~
그런데 잔액이 전부 있는 건지 확실하진 않습니다. 마지막 기장일이 1996년이거든요.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지금은 우리은행이라고 합디다.
우리은행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물어봤습니다. 상당원이 에~ 또~ 연속하십니다. 저도 답답합니다. 비밀번호 모르죠, 주민등록번호 말소되었죠, 통장 잔액조차 아리송하죠.
엄마도 옆에서 에~ 또~ 연속하십니다. 세상에. 갑자기 돌아가신 탓도 있겠지만 쇼크로 우울증에 빠져 유품 정리를 끝까지 안 하신 겁니다. 아빠 물건을 모아둔 서랍을 뒤져 이번엔 오래된 신한은행 통장을 보여주시는데 거기에 생뚱맞은 100,000원이 찍혀 있습니다.

- 어쩌라굽쇼?
- 있는지 알아보고 있음 찾자.
- 어뜩게요?
- 가족이면 여러 증명서를 가져가서 찾을 수 있어. 포기하기엔 푼돈이 아니잖니.
- 이보십시다. 10년이 넘었잖아, 10년이!

엄마 성격이 내 성격이라는게 여기서 증명되는군요. 봉인해두고 여기까지 끌고 오다니.
아빠의 여권이라던가 수첩 같은게 여전히 서랍에 굴러다니고 있는데 말이죠... 시간이라는 건 흡사 마법 같군요.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은 다시 어제가 된 듯한 이상한 기분입니다. 불혹이 지난 아빠의 사진은 내가 모르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아빠가 쓰던 가계부(...)도 발굴해서 봤습니다. 남자의 다이어리는 터프하군요. 영수증 붙이고 "냉장고 대금" 이러고 끗. 아무리 게을러도 나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고요, 아부지...

Posted by 미야

2009/09/22 16:54 2009/09/2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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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엘리바스 2009/09/23 02:19 # M/D Reply Permalink

    그 시대의 아버님께서 가계부를 쓰신다는게 오히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거 참.. 그렇군요.. 돌아가신 분의 계좌금액이라니..

    그래서 우리나라 은행에는 돈을 넣어놓고 찾아가지 않은 돈(휴면예금)만 해도 1조원이 넘는다지 뭡니까.

    아 놔.. 그럼 은행들은 그 돈 다 자기들이 날로 먹는건가..ㅠㅠ

    ps. 휴면예금을 조회하려면 인터넷으로 주민번호와 이름만 넣어도 된다지만 아버님께선.. 그렇군요.. 어렵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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