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 테이블」은 세일룬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장소라고 알려진 곳이다.
왕가의 자랑이자 세일룬의 비보(秘寶).
엄청난 너비의 왕실 정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희디 흰 테라스는 전통적으로 세일룬 왕가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이 차지하게끔 되어 있는 장소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검은 머리카락의 왕세자비가 갓 태어난 아멜리아를 강보에 누이고 자장가를 불러주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지금은 행방을 알 길 없는 첫째 공주 그레이시아의 열 번째 생일 파티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일동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는 푸른 나무들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다. 코를 간질이는 건 형형색색의 꽃들이 뿜어내는 고운 체취다. 눈을 떠도 꿈을 꾸는 것 같고, 눈을 감고 있어도 꿈을 꾸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번민을 씻어버리라는 듯, 정경은 그저 푸르고 또 푸르다.

제로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붓에다 물감을 찍어 빠렛트에다 잘 섞었다. 10호 남짓의 작은 사이즈의 캔바스를 눈앞에 두고 답지 않게 예술적 행위에 도취된 상태였다. 턱을 만지며 음, 소리를 내었다. 주의해가며 가로 세로 방향으로 붓질을 시작했다. 손목의 스냅을 사용하여 슥슥 물감을 칠해 넣는 일이 빠르고 경쾌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정원의 모양새를 한참동안 응시한다. 먼 옛날에 세일룬의 여왕이, 그리고 왕비가, 나아가 그녀들의 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눈동자로 초록을 품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붓질을 재차 시작한 마족을 두고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이는 나무는 시원한 초록인데.
곁눈질로 보아하니 그가 바르는 색은 주황이다.

『풍경화가 아니었던 거야?』
『실례의 말씀을. 이건 인물화인데요.』
어이, 어이. 그러면서 왜 엄지손가락을 들고 나무의 실제 크기를 어림짐작하고 있는 겨?
『에? 세일룬의 궁정 화가는 늘 이렇게 하던데요.』
엉뚱한 흉내내기를 하고 있다는 건 짐작도 못한 마족은 뭐가 잘못되었느냐 오히려 반문이다.
『아멜리아 씨에게 선물로 줄 그림입니다. 최선을 다할 겁니다.』

최선을 다 하겠단다.
칭찬을 해주어야 할 좋은 자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르가디스는 진심으로 우러나는 격려의 말을 던질 수가 없었다.

대서양 한복판에서 거대 우주선이 떠올랐다.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아씨들이냐.
아님 멋지다 마사루?

마족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농담도. 마사루는 황금색 방울 귀걸이를 하고 있진 않죠.』
『하지만 리나도 이런 얼굴은 하고 있지 않다구. 아니면 네 눈엔 리나가 이런 모습으로 보이는 거야? 그렇다면 너, 필히 안경 써야 해.』
『으음.』

제로스는 붓질을 멈추고 짧은 고민에 잠겼다.
전혀 안 닮은 건가. 측면으로 보면 한 14% 정도는 비슷한 거 같기도 하다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정면에서 보면 그림 속의 인물은 비비 원숭이와도 닮아 있다.
이제 제로스는 머리를 긁어대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좋다. 문제를 인식했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고쳐놓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 짝짝이로 그려진 좌우 눈동자와 옆으로 길게 휘어진 코라도 바로 잡도록 하자. 그러면 살구색 물감을 잔뜩 풀어서...

『틀려. 그래선 더 이상해질 뿐이다. 하여간 네놈의 미적 센스라는 건 엽기와 사촌이군.』
『이게 뭐가 어때서요. 내가 보기엔 하나도 나쁘지 않구먼.』
『저리 비켜. 내가 시범을 보여주지. 자고로 예술이라는 건 말이다...』

제르가디스는 마족으로부터 붓을 빼앗아 붓질 다섯 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검은 먹구름의 강림을 깨달았다.

『아, 아, 그, 리, 리나. 이, 이것은...』
『내가 마사루냣!』

저편에서 제로스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홍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리나에게 멱살을 잡힌 소년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Posted by 미야

2006/03/25 10:37 2006/03/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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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na 2006/03/26 08:54 # M/D Reply Permalink

    맨날 스토킹만 하다가 이렇게 글을 남기네요..
    정말 미야님 글 센스는 경지에 오르셨다고 할 수 밖에. 이번 습작 역시 너무 마음에 듭니다.

  2. 비밀방문자 2006/04/18 02:45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미야 2006/04/18 16:55 # M/D Permalink

      모르니까 내버려 두는 거예요. (웃음 <- 웃음이 나오냣?!) 수정했습니다. 지적에 감사드려요. 고백하자면 제 맞춤법 및 띄어쓰기 점수는 낙제점이랍니다. 인터넷으로 테스트에 응했다가 믿어지지 않는 점수에 절망했었죠. 초등학교 3학년 시절까지 받아쓰기를 잘 못했던 과거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할까, 지금도 화- 한 얼굴로 [옳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시네] 라고 적으려다 움찔. [올바른] 이 맞는 표기법이지만 버릇처럼 틀리게 적는 말들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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