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성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인 직업 - 그게 직업이 맞긴 맞느냐 심각하게 반문하면 할 말이 없다만 - 어쨌거나 모든 여성들이 홍조 띈 뺨으로 환호하는 그 이름은「공주」다.
수십 겹의 비단보 아래 속에 숨겨진 작은 강낭콩 때문에 잠을 설치는 이, 그 이름은 공주.
숟가락보다 무거운 건 들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을 적에 자기 손으로 단추를 채우는 일 없다. 화사한 꽃을 가득 장식한 방에서, 보석이 달린 왕관을 쓰고 웃기만 하면 된다. 편안한 비단 의자에 퍼질러 앉아, 남들이 가져다 주는 과자와 꿀만 먹으면 된다.

『지금 농담해요? 쟁반 가득히 과자와 꿀? 편안한 비단 의자에 퍼질러 앉아?』
아멜리아의 눈썹이 송충이의 그것으로 변해갔다.
『아침 6시부터 눈 부비고 일어나, 하루에 8시간씩 꼬박꼬박 많은 사람들을 만나가며, 산더미처럼 쌓인 결재 서류에 하나하나 싸인을 하고 있건만!』
잉크가 묻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탕- 하고 때렸다.
『그거 어느 나라 공주 이야긴가요. 혹시 돼지 나라 공주 아닌가요.』

구석에 앉아「왕실 업무 보조」를 무보수로 자처하고 있는 우리의 키메라 군은 신임 대사 임명장의 덜 마른 잉크자국을 섬세하게 닦아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제피리아에서는 꽤나 유명한 집구석이라지만, 그래도 평민이잖아. 리나가 가진 왕족에 대한 판타지는 그래서 일반 서민들의 유치찬란한 그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그깟 일로 흥분하면 젊은 나이에 혈압약을 상복해야 한다. 릴렉스. 이 모든 건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다. 제르가디스는 씩씩대는 아멜리아 공주더러 (싯 다운, 플리즈) 어서 앉으라는 시늉을 해보이며 다시금 잉크자국 닦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뭔 놈의 신임 대사 임명장이 예순 다섯 장이나 된다. 그는 이제 막 마무리 작업을 끝마친 서른 한 번째 임명장을 왼편으로 옮겨놓고는 서른 두 번째 임명장을 집어 들었다.
이거 봤냐. 그대를 로레나 왕국의 신임 대사로 임명하노라.

『뭐시여? 그래도~ 펴엉~민.』
소년으로부터 서른 한 번째 임명장을 건네받아 준비된 봉인함에 넣고 풀을 바르려던 리나의 눈이 도끼눈으로 변해갔다. 눈초리만 살벌해졌던가, 목소리도 고압적으로 낮아졌다.
『이봐, 제르. 우리 아버지가 제피리아 고액 납세자 리스트 랭킹 8위라는 건 알고 있는 겨? 그것도 - 이건 순전히 집안 비밀이지만 - 유능한 세무사와 공모하여 탈세를 한 탓에 그놈의 랭킹이 2단계 내려가 있는 거라고. 자랑하는 것 같아 좀 그렇지만, 나는 한다면 하는 대단한 집안의 딸이야!』
『그러십니까. 그런데 그 대단하다는 집 여식이 고작 생각한다는게「공주 = 놀고 먹는다」라니까 하는 얘기야. 네 녀석의 공주에 대한 사고 방식은 한참 잘못 되었어. 이 세상엔 백마를 탄 왕자가 없는 것처럼, 공주는 솜사탕만 먹고 살진 않아. 아멜리아처럼 일이 너무나 바쁜 나머지 오랜만에 같이 놀자 찾아온 친우더러「죄송하지만 이웃 나라 장관에게 보낼 이 편지 봉투에 풀 발라 주는 걸로 제 일을 도와주세요」라고 하는 공주가 진짜 공주인 거야.』

하앙. 그러신가요. 리나는 고개를 까딱했다.
『그래. 납득했어. 줄줄이 늘어진 예산 집행 목록 확인은 나 몰라라 하고 달아나 뜨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궈서는 장래 희망이「정의의 여왕」일 수는 없겠지.』
허나 말이다.
『제르가디스?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하자. 피리오넬 왕자님의 애마는 흰색이야.』
『그랬던가. 허나 피리오넬 전하는 왕자가 아니라 산적이라고 네 입으로 그랬잖아.』
『산적이라고는 안 했어. 오크라고 그랬지.』

아멜리아가 듣다 듣다 펜대를 힘차게 부러뜨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 자꾸 이러시면.』
『...』
『점심 없어욧!』
무서운 협박성 발언에 쫄은 키메라군과 악덕 상인의 딸은 잠자코 봉투에 풀 바르는 일에 열중했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세일룬 왕궁을 방문한 손님들은 아멜리아 공주가 비단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뿔딱지가 제법 났던 것 같다.
바쁜 업무는 잠시 미루고 물 좋은 온천에서 물장구를 치고 놀면 안 되는 건가.

- 원래 온천에선 물장구를 치면 안됩니다 -

에이, 표준 도덕 규정은 잠시 옆으로 치우고.
마침 온천으로 유명한 미레시보로부터 20% 요금 할인 티켓까지 날아왔다. 리나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풀 바르는 손동작을 느리게 했다.
그곳 관광 진흥 협회에서 인쇄한 광고지에는 세 명의 선녀가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그리며「거칠거칠한 피부를 백옥으로~」라고 호언장담 하고 있었다. 악성 피부 건조증 환자마저 비단 뱀으로 변신을 시켜줄 거라나 뭐라나. 결혼을 앞둔 처녀들의 피부 에스테 코스로 전격 추천! 물론 온 가족들이 함께 와서 다 같이 몸을 풀고 가도 좋다. 5인 이상 단체가 되면 요금 할인율은 더욱 커진다. 거기다 특색 가득한 31종 온천이 골라 먹는 재미까지 제공한다.

『황금으로 탕 내부 전부를 치장한 골드 라운드 온천. 당신의 눈이 부시다. 썬글래스 착용 의무화...』
리나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에 다시금 서류 결재에 열중하던 아멜리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아저씨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건 알콜 도수 23도 곡주가 들어간 청주탕. 자랑 섞인 주인의 변에 의하자면 탕에 앉아 뜨거운 증기를 지나치게 많이 들이키면 어지럼증 = 취기가 돌 수 있으니 넘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것...』
리나는 이제 거의 외우다시피한 내용을 줄줄 꿰기 시작했다.
『체질에 따라 맞춤 서비스, 각종 약초 구비. 웰빙 허브 써비스...』
「오오」내지는「하아」라는 의미불명의 짧은 호흡 소리가 뒤를 따랐다.
『핫 터보에서 사랑을 속삭여요. 낭만에 죽고 낭만에 사는 러브리 2인 전용 온천. 먹으면서 즐기자. 둥둥 쟁반 로마식 온천... 후식으로 칵테일 무료 서비스! 유황 성분 함량이 월등히 높아 잘 낫지 않는 피부병도 박멸 가능한 안티 아토피크 탕~탕~탕~!』
광고에서의 에코 효과음까지 카피한다.

『그거 좋군! 박멸 피부병!』
제르가디스의 탄성에 같이 자리한 여성들의 표정이 확 나빠졌다.
『기다려. 골렘과의 합성은 피부병이 아니지 않았어?』
『물론 키메라 합성 자체는 피부병이 아니지, 리나. 하지만 바위에서 이끼가 자라나면 그건 꽤나 가렵다구. 나도 사람이라서 겨드랑이에 땀이 차는데 말이야. 한번 생긴 이끼는 핀셋으로 뽑는다고 쉽게 해결이 되지 않아.』
『겨, 겨드랑이... 이, 이끼...』
옆에 앉아있던 리나는 순식간에 10미터 이상을 달아났다.
덕분에 소년은 대단히 상처를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 소녀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파괴력이 막강한 핵폭탄이 아닌 조그마한 크기의 바퀴벌레니까 말이다.

『더러운 병이 아니라구!』
벌겋게 달아올라 소년은 주장하였다.
『이끼란 말이야!』
그러면서 다리까지 동동 굴러가며 분개하였다.
『그 정의롭지 못한 행태가 다 뭐냔 말이다, 너!』

그치만 그것은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아멜리아는 산더미 같은 결재 서류를 냅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자! 왕녀를 따르라!
『안티 아토피크 탕을 서둘러 예약하세요, 리나 씨!』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지갑을 꺼내 반짝이는 금화를 리나의 손에 쥐어줬다.
『여드름 및 각종 트러블에 좋은 천연 비누를 목욕용품 전문 가게에서 취급하고 있을 거예요.』
『오렌지 향으로?』
『박하 향.』
『맡겨만 주쇼!』
리나는 매우 기뻐하며 서둘러 자리를 정돈했다.
부끄러움으로 기다란 두 귀가 땅바닥에 출렁 떨어진 키메라 소년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치고.
『거 봐. 내가 뭐랬어. 이게 직효라니까.』
라고 작게 속삭였다.

Posted by 미야

2006/03/18 11:25 2006/03/1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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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lsra 2006/03/20 09:57 # M/D Reply Permalink

    재미있어요~~ 골렘과 합성된 몸에 땀이... 날 거 같지 않은데... 리나와 제르 합작으로 아멜리아를 속여먹은 모양이네요 ^^ 제르 노력했구나~

  2. 시나 2006/03/22 18:19 # M/D Reply Permalink

    미야님께서 블로그로 축소하시면 앞으로 미야님 작품의 구경은 하늘에 별 따기가 되는 것인가라는 제 안이한 걱정은 기우라는 생각이 들어 무척 기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미야님 특유의 글체는 입속에서 달짝지근한 꿀차를 음미하는 느낌이에요. 아, 왠지 기쁜 하루입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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