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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31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엉덩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린 흉한 모양새로 자빠져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아, 어쩌지. 방금 뇌가 녹았다.
오금이 풀려 허리 아래로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손가락 하나가 어설프게 움직였을 뿐으로, 서툴게 모스 부호를 치는 것처럼 중지가 까딱였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자면 나 혼자 창피한 꼴을 당한 건 아니라는 거였다.
피리 불던 사나이도 허리가 빠진 모양새로 넘어져 경련을 일으키는 중이었는데 나처럼 뇌에 정지신호가 온 것 같았다. 그는 애가 타는 눈빛으로 떨어진 피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는데 마음만 굴뚝이고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주는 눈치다. 벌벌 떨며 어떻게든 손을 뻗어보려 했으나 욕심이 과했다. 겨우 어깨만 들썩였을 뿐이었다.

딩, 이러고 악기의 줄을 튕기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아까보다 음이 약간 높았다.
소리가 달라지면 충격도 달라지는 건지 코피가 왈칵 터졌다. 농담이 아니었다. 저 소리를 앞으로 두 번만 더 들으면 뇌가 액체로 변해 인근한 눈구멍과 콧구멍을 통해 조용히 흘러내릴 터였다.
나는 제발 그만하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문제는 쇼크가 와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함광군!”
제발 그만 하라는 뜻인지, 아니면 더 해보라고 부추기는 건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오며 한 사람의 이름을 입을 모아 외쳤다.
바닥을 밀며 천천히 기어가던 나는 제발 전자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함광군!”
다행스럽게도 악기의 줄을 뜯는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대신 잘 벼려진 검이 검집을 빠져나올 적의 날카로운 금속음이 그 뒤를 이었다.

“명화부에 불을 붙여라.”
지시에 따라 어둠 속에서 밝은 불빛이 일어났다. 명화부가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장터에서 가짜 도사로부터 사들인 불쏘시개 부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쪽은 청색에 가까운 색을 냈고, 바람에도 쉽게 꺼지지 않았다. 적당한 불빛으로 사야가 확보되자 그 다음으로는 일사천리였다.
흰 색으로 옷을 맞춰 입은 수사들이 별빛을 가리던 장대를 재빨리 걷어냈다. 동강이 낸 장대는 횃불처럼 사용되어 다시 불타올랐고,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주시들의 모습이 더욱 확연해지자 그 다음부터는 일방적인 살육의 장이 펼쳐졌다.
이미 죽었던 것들이니 ‘살육’이라기보다는 ‘처리’가 보다 걸 맞는 표현이겠지만.
두부를 자르는 것처럼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무리 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남사추와 남경의였다. 두 사람은 윗 연배 수사들의 뒤를 따라 빠르게 검을 움직이며 주시를 정리했다. 날렵하고 가벼운 몸동작을 보여주며 그 어떠한 동요 없이 그르륵 소리를 내는 시체들을 베어나갔다. 저 어린 나이에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걸 보니 새삼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떼거리의 습격 탓에 의복이 엉망이 된 금릉을 일으켜 세운 것도 그 두 명이었다.

“쓸데없는 도움이야! 나 혼자 일어설 수 있어!”
고집쟁이가 앵앵거렸다.
하지만 순전히 허세여서 남경의가 일부러 팔을 놓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를 본 남사추가 넘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잘 잡아주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금릉은 고맙다는 인사를 일절 하지 않았다.
대신 화풀이를 하듯 검을 휘둘러 주시를 정리하는 일에 끼어들었다.

“피리요! 저 사람이 피리를 불어 주시를 조정했어요! 함광군.”
시체들을 쓸어내는 와중에 누군가 피리를 주목했다.
나는 약간만 남아있던 힘을 전부 끌어 모아 바닥에 떨어진 대나무 피리를 움켜쥐었다.
검은 옷의 괴인이 당장 그걸 자신에게 넘기라며 야단법석이었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못 넘긴다. 이건 위험한 물건이다.
고소 남씨는 뒤로 빠지고, 운몽 강씨는 이죽거릴 거다.
난릉 금씨는 과장된 헛소문으로 치부할 것이고, 청하 섭씨는... 거긴 망했다.
그렇다면 이 물건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피리를 놓아라.”
함광군이라는 이의 목소리는 음에 고저가 없었다. 듣기만 해선 감정이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았다. 냉기도 없고, 온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고집을 부리며 피리를 놓지 않는다면 남의 사정 봐주지 않고 손을 아예 잘라낼 사람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원한이 서린 눈빛을 하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모르겠냐고!

평범한 말투였지만 목소리에 위엄이 가득했다. 함광군이 다시 경고했다.
“피리를 놓아라.”
경고를 들었음에도 손아귀에 힘을 줬다. 에라, 까짓 것. 아프긴 하겠지만 손모가지 정도는 잘려도 다시 붙는다.
대나무로 만들어져 속이 텅 빈 피리의 표면이 지나치게 구워진 과자인양 금이 가기 시작했다. 뾰족한 부스러기가 살을 헤집는 느낌이 들었지만 멈추지 않고 힘을 더 줬다. 제법 크게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되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피리는 제 형태를 잃어버렸다. 가시가 박힌 손바닥이 쓰라렸지만 이것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도발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함광군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까 원한 깊은 눈빛에 그리 큰 변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짐작하자면 피리가 망가져 아쉽다는 건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뭔가 더 깊고 거대한 원념의 뿌리가 밑바닥 깊은 곳으로 있었다.
아예 모르는 척하고 싶을 정도로 어두운 수렁이어서 숨이 막힌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려야 했다.
이렇게 진득한 어둠을 품은 사람을 ‘빛을 품은 군자’ 함광군으로 부른다고? 다들 돌았구먼.

“묶어라.”
이 사내는 기본적으로 말이 짧았다.
그래도 구체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이런 명령이 익숙한지 수사들이 일제히 달려와 눈에 화상을 입은 남자와 피리 불던 사나이, 그리고 용의자로 지목된 날 곤선삭으로 단단히 묶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함광군. 그건 내 하인이에요.”
금릉이 뛰어와 사람 취급이 하나 잘못되었다고 항의했다.
그런데 어디 가서 비빌 짬밥이 아니어서 함광군이 지긋이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인데 혀가 굳은 눈치였다. 본부장 앞에 선 일개 평사원의 기분을 맛보며 금릉이 한 걸음 후퇴했다. 다른 때 같으면 내가 누군지 아느냐, 외숙에게 이를 거다, 후렴구를 덧붙였겠지만 지금은 꼬리를 내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함광군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관하자 남경의가 대신 끼어들었다.
내가 볼 적엔 어른 앞에서 주제넘은 짓이라는 느낌이었지만 금릉과 소년의 나이가 비슷하니 그렇게 하라 묵인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함광군이 뒷짐을 졌고, 의도치 않게 삼자대면 비슷하게 흘러갔다.

“네 하인이라고?”
눈을 뾰족하게 한 남경의가 나와 금릉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입술을 말아 피식 웃었다.
“무슨 까닭일까. 금 아씨가 거짓말을 다 해가며 사람을 편들어주고.”
“아니거든?!”
“그럼 네 하인이 원기를 모은답시고 밤늦게 공동묘지로 가서 무덤도 파던데 그걸 허락했다고? 사마외도라면 그렇게 치를 떨면서? 말이 되는 소리야, 그게?”
금릉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목소리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구린내, 너 무덤 팠어?!!”
“오해야.”
“들었어? 안 팠대.”
“그거야 끌고 가서 추문을 해보면 알 수 있는 거고.”
남경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기본적으로 쟤는 날 믿지 않았다.

“저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이라고. 이 장소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하지. 게다가 우리는 이 부근에서 사마외도를 추종하는 무리의 뒤를 추적해서 여기까지 온 거거든. 저건 분명 한 패야. 무덤이 연속하여 훼손된 게 식살귀 짓이 아니라는 것도 저 녀석이 흘린 단서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까... 무슨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네가 감쌀 필요가 없다고.”
얘기를 들은 금릉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화가 난 거라기보다는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식살귀가 아니었다고?”
“맙소사. 그 부분이 화를 낼 부분이야?”
“내가 식살귀를 잡겠다고 얼마나 수모를 겪었는...!! 애초에 소문이 왜 그딴 식으로 난 거야!”
“야.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따져야겠어?”
“그럼 여기서 따져야지 언제 따져! 것보다 내 개는?! 우리 꼬마 선자는?!”
“오호라, 이제 네 개도 우리 책임이다 이거지.”

이제 둘은 말로만 으르렁대며 싸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도 싸우려 했다.
그런 다툼이 늘 있었던 일인지 보다 나이 많은 수사들은 개입하여 뜯어말리는 대신 소년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무엇보다 다툼이 난 두 사람 중 하나가 다른 집 자제였고, 무엇보다 금릉의 억지주장에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든 건 남경의 혼자만이 아니었던 거다.
“네 똥개가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아!”
“똥개라니! 꼬마 선자는 작은아버지가 주신 영견이야!”
“누가 영견 이름을 꼬마 선자로 지어. 괴상하잖아!”
그리고 나는 처치곤란의 문제아 취급을 받아가며 곤선삭에 묶여 끌려갔다.

“잠깐만요.”
이 와중에 남사추가 달려와 코피가 번져 엉망이 된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그가 보인 친절에 기대어 마지막으로 호소했다.
“말해도 안 믿겠지만, 나는 저들과 한 패가 아니야.”
“그래요. 분명 도령은... 피리를 감추려는 게 아니라 부수려는 것처럼 행동했죠.”
사추는 제대로 설명하면 아무 일 없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때리지도 않을 거고, 채찍질하지도 않을 거며, 굶기지도 않을 거고, 어두운 광에 가둬두고 방치하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아니, 그게 꼭 그렇게 할 거라는 것처럼 들려 듣는 입장에선 살이 떨리는데. 나, 이대로 괜찮은 건가.

“선배님, 이 아이는 아직 어리고 운몽의 구판연 문양이 들어간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강씨 종주가 사마외도를 혐오하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사술을 추구하는 아이에게 집안 무늬가 들어간 주머니를 그냥 줬을 리 없죠. 사연이 제법 있는 것 같고, 죄를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 또한 없으니 너무 험하게 다루진 말아주세요.”
선배로 불린 수사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떡이고는 곤선삭 잡을 줄을 잡아당겼다.
그 당겨지는 느낌이 어쩐지 효성진 도장에게 잡혀갔을 때를 떠올리게 하여 기분이 착잡해졌다.
거기다 그것으로 나의 수난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와앙.
사건 다 끝난 것도 모르고 바쁘게 뛰어다니던 강아지가 어디에선가 갑자기 쏜살 같이 튀어나오더니 두 눈을 반짝이며 내 다리를 콱 물었다.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끝.

Posted by 미야

2021/11/24 14:04 2021/11/2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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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30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뒷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런데 눈의 모습이 좀 이상해서 초점이 맞지 않고 왼 눈과 오른 눈이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소름끼치기 이전에 상대방이 나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어서 불편했다.
그런다고 해도 뒷문을 열고 나오게 만든다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한껏 느긋해진 마음가짐으로 그에게로 접근했다. 약간의 헛소리를 주절거린 뒤, 적당히 손찌검을 당하고 내쫓기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동전을 뜻하는 저급한 손동작을 취해보이며 헤헤 웃었다.

“나리, 연고 없는 그것을 가지고 오면 이곳에서 값을 후하게 쳐주신다 하여...”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아이코! 언짢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나리의 표정을 보아하니 소인이 헛소문을 들었나 봅니다.”
“누구에게 들었느냐.”
“저는 그저 은밀히 돈벌이를 하고 싶었을 뿐으로... 보시다시피 제 사정이 좋지가 않아서요. 그런데 실수를 한 것 같네요. 나리, 화내지 마십시오. 제가 엉뚱한 착각을 했나 봅니다. 그냥 이대로 갈 터이니 못 본 척해주십시오.”
이쯤에서 뺨 싸대기가 날아들어야 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충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망했다. 검은 갈기의 강아지가 사납게 짖으며 달려왔고, 그 겁 없고 쬐꼬만 녀석은 사내의 가랑이 사이를 쏙 지나쳐 건물 안으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달리면서도 계속 짖어 흡사 모양새가 도둑을 잡으러 가는 것 같았다.
나도 당황했는데 남자는 오죽했겠는가.
저 새끼 잡으라며 사내가 몸을 비틀어 돌렸다. 나는 뒷문 도로 닫지 말라고 발을 밀어 넣었다. 순간적으로 우리 두 사람의 동선이 뒤엉켜 모양새가 아주 우스워졌다.
이 마당에 남의 말 절대 안 듣는 금릉이 밥상에 밥숟가락을 얹는다며 뛰어들었다.
절대로 내가 그린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다. 골치가 다 아파왔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카레 돈가스 매운맛 2번인데 이래서는 조리해서 나오는 음식이 우유 없이는 먹을 수 없다는 마라탕 매운맛 7번이 될 판국이었다.

여전히 초점이 잘 맞지 않은 눈으로 날 쳐다보던 남자가 부리나케 문을 움켜잡았다.
그가 원하는 건 내가 발을 끼워 넣어 닫지 못하게 된 뒷문을 닫는 거였다. 서둘러 발을 빼지 않으면 발이 뭉개질 참이었다. 나도 젖 먹던 힘을 내며 뒷문을 꽉 움켜잡았다.
보았느냐. 이것이 배추 250근을 배달하던 팔뚝의 파워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그냥 갈 테니 못 본 척 해주십시오. 저도 어디 가서 입 뻥끗 안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습니다. 저기요, 사장님. 맹세코 소문 안 나게... 꽤액!”
힘은 남들보다 곱절로 세도 몸무게는 체중미달이었다.
사내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나를 한손으로 들어 그대로 반으로 접어버리려 했다.
금릉이 번쩍 달려와 니킥을 날리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얇은 뼈가 동강이 났을 뻔했다.

“구린내! 엎어져 있지 말고 일어나!”
편석 바닥으로 거침없이 내던져진 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한쪽 뺨과 이마가 몹시 쓰라렸다. 내팽개쳐지면서 편석에 피부가 갈린 모양이었다.
“금릉, 이 망둥어 꼴뚜기 같은 놈... 얌전히 보고만 있으랬지 누가...”
“구린내! 빨리 일어나라니까!”
금릉이 늘어진 내 몸뚱이를 짐짝처럼 끌고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보통 이 경우엔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니었나.
가까운 곳에서 강아지가 사납게 짖고 있었다. 금릉은 그 소리를 따라 거침없이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무릎으로 명치를 맞은 사내가 거기 서라고 고함을 질러댔고, 이제 식탁으로 올라온 음식은 위장이 녹는다는 불짬뽕 매운맛 10번이 되었다.

가까스로 눈을 뜨고 보니 그 어디에도 불빛이라 할 게 없어 진짜로 폐가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텅 비어있는 건 아니었다. 마당 한 가운데로 거대한 닭장처럼 철책이 빙 둘러져 있었고 그 속으로 헐벗은 남자들이 저마다 술 취한 것처럼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죄다 얼굴은 시퍼랬고, 눈은 썩은 동태 눈깔이었다. 몸을 흔들다 옆 사람과 부딪치면 그르륵 그르륵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뭐야 이건! 좀비가 닭장 안에 바글바글하잖아!’
금릉과 내 인기척을 알아차린 좀비 하나가 철책에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동자가 절반은 썩었으니 앞을 볼 리 없는데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며 이를 딱 소리를 내어 물었다.

“금릉아. 여기는 폐쇄된 감찰소라며. 감찰소라는 게 원래 이런 거 모아놓는 곳이야?”
“너, 바보냐?! 그럴 리가 없잖아!”
금릉이 옆으로 날 밀치며 소리쳤다.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번쩍이는 칼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방이 무기를 들었으니 금릉도 검을 빼들었다. 그런데 내가 봐도 금릉이 열세였다. 일단 주변이 너무 어둡다는 게 문제였다. 불을 켜두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솟음 장대 위로 천을 커튼처럼 걸어 작은 별빛까지 차단했다.
금릉은 재주가 빼어난 편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적과 대치할 정도로 수련을 한 건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온 검 날의 빛을 보고서야 가까스로 막기만 했다. 남자의 실력이 수준 아래라서 다행이었다. 솜씨가 좋았더라면 어림짐작만으로 검을 막는 일도 쉽지 않았을 터였다.

“신호탄! 금릉아! 신호탄 같은 거 없어?!”
“그런 촌스러운 건 하인들이나 가지고 다니는 거야!”

내가 진짜 여기서 무사히 나가면 학부모 면담 간다.
품을 뒤져 가짜 도사에게서 받았던 불쏘시개 부적을 꺼내들었다. 손바닥에 대고 짝 소리 내어 박수를 쳤다. 요령이 없어서인지 반응이 없었다. 그럼 더 세게 간다. 다시 박수를 짝 쳤다.

주황색 불꽃이 솟구치자 바로 코앞으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낯빛이 감마선에 오염된 헐크 색깔이었다. 아무래도 걸어 다니는 시체가 철책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코앞으로 다가온 역겨운 녹조라떼를 힘껏 떠밀었다. 덕분에 불타는 부적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기껏 얻은 광원이 제 역할도 못해보고 사그라졌다.
괜찮다. 별 거 아니다. 당황하지 말자. 공짜로 얻은 부적이 아직 두 장이나 남았다.

이때 스윽, 스윽,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이 난리통에 바지런히 청소를 하는 건 아닐 테고. 갑자기 빛을 본 눈이 어둠을 낯설어하여 사물이 죄다 흐릿했다. 그런 나와는 반대로 상대는 매우 능숙하게 섬돌을 밟고 내려왔다. 그가 걸을 적마다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스윽, 스윽, 이러고 독특하게 끄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옷자락이 매우 긴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부적을 꺼내 짝 소리 내어 손뼉을 쳤다.
불꽃이 타오르자 어둠에 잠겼던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었는데 무장은 하지 않았고 대신 상황에 맞지 않게 손에 대나무 피리를 쥐고 있었다.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그가 피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본능적으로 피리를 불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숨을 불어넣은 악기에서 쨍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공기가 바뀌었다. 피리 소리는 차갑고, 기괴했으며, 얼얼했다.
좋지 않은 것들이 피리소리를 듣고 저마다 웅성거리며 동요했다. 그리고 나 또한 저 밑바닥으로부터 동요했다. 귀 안으로 집게벌레가 잔뜩 들어가 살을 물고 뜯으며 쟁알쟁알 떠드는 느낌이었다. 아프다기 보다는 소름끼쳤다.
덕분에 쥐고 있던 부적을 또 떨어뜨렸다.
시야가 다시 어둠에 잠겼고, 바로 옆에서 터벅터벅 걷는 소리가 들렸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넙죽 엎드렸다. 피리소리에 반응한 주시가 딱딱 턱을 놀리며 공격의 대상을 찾고 있었다.
‘느리다.’
장르가 좀비물인 건 맞는데 고전 흑백영화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었다. 이게 ‘부산행’이라던가, ‘킹덤’이였으면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바로 물어 뜯겼을 거다.
제일 가까이 접근한 주시의 바로 등 뒤로 바짝 붙어 요령껏 그것의 팔을 잡아당겼다. 딱딱 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던 주시가 당겨진 팔을 덥석 물었다. 예,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쇼. 빈틈을 노려 그대로 내뺐다.

주시들의 움직임이 영 신통치 않자 피리소리가 더 가파르게 변했다. 조급해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런다고 해도 빠르게 뛰는 법도 모르는 좀비들이 음색에 맞추어 더 빠르게 움직여줄 것 같지는 않았다. 저것들은 그냥 느려 터진 굼벵이들이었다.
상대적으로 마음을 놓고 금릉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쪽은 주시보다 곱절에 곱절로 빠르게 뛸 수 있으니 차분하게 잘 피해 도망을...
“놓아라! 놓으란 말이다!”
순간 이마를 쳤다. 전장에서 황금 투구를 쓰고 있는 화려한 외모의 장수가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어느 멍청이가 제대로 갑옷도 걸치지 않은 말단 군졸을 잡겠다고 설치겠느냔 말이다. 애초에 나라는 존재에는 관심이 없었고, 피리소리를 들은 주시들 전부가 팔을 뻗어 금릉을 잡겠다며 아우성이었다.

아이의 낯빛이 새파랬다. 좋아하는 아이돌을 향해 팬들이 달려들어도 식은땀이 난다던데, 달려오는 그것들 전부가 좋다고 달려드는 것들도 아니었고 사생팬도 아니었다.
금릉은 필사적으로 앞뒤로 검을 휘두르며 거리를 벌려보고자 기를 썼다. 그런데 들판에 굴러다니는 더러운 시궁창 취급이나 받는 주시의 무서운 점이 바로 칼로 베이는 정도로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거였다. 피와 살이 튀어도 어차피 그것들은 시체다.
피리의 곡조가 가파르게 오르락 거렸다. 이제 금릉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포위망이 더 좁혀졌다. 금방에라도 목덜미를 잡힐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애가 얼마나 고집쟁이면 살려달라는 말을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개가 짖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건물 안에서인지, 밖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 또한 눈앞에 있는 주시의 등짝을 잡아당기며 개처럼 짖었다.
시체가 입고 있던 낡은 옷이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졌다.
‘틀렸어! 이럴 게 아니라 저 망할 피리 소리를 당장 그치게 해야 해!’

황급히 몸을 돌려 검은 옷의 사내가 서있던 마당을 향해 뛰었다.
썩은 내를 풍기는 팔이 튀어나와 내 몸을 낚아채려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부적을 꺼내어 쥐고 세차게 박수를 쳤다.
짝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다. 동시에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던 사내가 튀어나와 제 주인을 지키려는 듯 검을 가로방향으로 후려쳤다.
아까도 말했지만 처리곤란의 더러운 쓰레기 취급이나 받는 주시의 무서운 점이 바로 칼로 베이는 정도로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거였다. 피와 살이 튀어도 어차피 나는 시체다.
살갗이 베어나간다는 감촉을 고스란히 맛보며 팔을 뻗어 불타오르는 부적을 사내의 눈구멍으로 있는 힘껏 쑤셔 넣었다.
“으아아악~!!”
 
부하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자 검은 옷의 보스가 황급히 피리를 입에서 떼어냈다.
이제 그와 나 사이의 간격은 다섯 자 길이밖에 되지 않았다.
목표물은 저 피리다. 나는 손을 뻗어 피리를 붙잡으려고 -

바로 그때 먼 곳에서 쟁! 하고 현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몸이 뻣뻣해졌고 거짓말처럼 기운이 죽 빠져버렸다.

Posted by 미야

2021/11/23 15:22 2021/11/2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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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9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동물을 싫어하진 않는다. 직접 키워본 적은 없어도 개는 귀엽고, 고양이는 예뻤다.
그런데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남의 종아리를 잘근잘근 씹고 있는 개는 하나도 안 귀엽고 하나도 안 예뻤다.
“......!!!”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았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 것이어야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괴성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고꾸라졌다.
아직 어린 강아지라고 해도 이빨은 날카로웠다.
문제는 얘가 사람을 물고도 그저 재밌는 장난으로 여기고 있다는 거였다. 검은 갈기를 가진 강아지는 흡사 간식을 조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살기는 요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왜 잘근잘근 물어뜯는 거냐곳! 내 종아리는 간식용 닭가슴살이 아니얏!

다리를 질질 끌고 몇 걸음 걸었다. 강아지도 질질 끌려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바닥에 누웠다. 강아지도 따라 누웠다.
아니 진짜 얘가 왜 이러는 건지 알려줄 사람?
나는 입안으로 주먹을 쑤셔 넣었다. 저 수상한 저택에서 집 지키는 용도랍시고 이 어린 강아지를 풀어 키우며 ‘맹견 조심’ 안내 문구를 붙였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비명을 지르면 필연적으로 사람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있었다. 그럼 우르르 몰려나온 사람들에게 뭐라고 할 건가. 한 푼만 줍쇼?

갑자기 개의 무는 힘이 달라졌다. 열심, 열심, 열심, 이러면서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다.
덩치는 조랭이떡 같은 게 고집은 또 대단해서 싫다고 했더니 더 꽉 물었다.
“살살, 제발 살살! 따라갈 테니 제발!”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리 멀리 가진 않았다는 점이다. 높은 담장을 따라 모서리를 돌고 나자 씹고 있던 나를 퉤! 뱉고, 제 주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앙앙 짖었다.

“꼬마 선자야, 조용히 해. 쟤는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가끔씩 이상하게 굴더라.”
높은 담벼락을 절반쯤 기어 올라간 소년이 짖지 말라며 손가락을 하나 세워 입에 가져갔다.
“쉬, 쉬! 것보다 뭘 끌고 온 거야. 그건 요괴가 아니잖아. 식살귀를 찾으라니까 거지를 물고 왔네.”
날 보고 거지라고 하는 건 괜찮지만 일단 담벼락에서 내려온 뒤에 뭐라고 했음 좋겠다.
이제 나는 근심에 젖었다. 개가 짖고 있고, 개 주인으로 보이는 이는 도둑처럼 담을 넘는 중이다. 발을 딛은 부분의 회석이 떨어져 증거도 충분했다. 소란을 알아차리고 집안에서 사람이 나온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개와 놀다 실수로 공이 안으로 넘어갔는데 죄송하지만 주워다 주시겠어요?

“무슨 소리야. 도둑질이라니. 여긴 사람 사는 집도 아닌데. 말투가 괘씸하군.”
소년이 발끈하더니 올라타던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적반하장 격으로 화를 냈다.
아니, 지금 화를 낼 사람이 누구인데. 댁의 개가 날 물었다고.
손으로 종아리를 쓸어보니 작게 구멍이 뚫렸다. 살짝 검붉은 피도 베어 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 소년에게 피를 보여주었다. 피라고 하기엔 색이 지나치게 검어 흡사 연필 검댕처럼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구멍 났다.
“네 강아지가 날 물었어.”
“아직 훈련이 덜 되어서 그래.”
소년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다.
“훈련이 덜 된 개를 데리고 도둑질을 하려 하다니. 미친 거 아냐?”
“너 바보냐? 여긴 집이 아니라 기산 온씨가 오래전에 세운 감찰소잖아. 저기 걸린 간판 안 보여? 폐쇄되어 문 걸어잠군 감찰소에 뭐 훔쳐갈 물건이 있다고 도둑질을 하겠... 어라.”
달빛에 비친 내 얼굴을 알아보고 개 주인이 펄쩍 뛰었다.
“이게 누구야. ‘구린내’잖아? 약양에 간다던 놈이 왜 여기에 있어?”
부잣집 귀한 도련님 금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삿대질했다.

시간과 장소가 매우 적절치 않았다. 강아지가 둘이서만 놀지 말라며 앙앙 짖었다. 금방이라도 뒷문을 열고 사람이 나올 것만 같아 가슴이 쫄깃거렸다.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일단 장소를 옮기자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금릉도 새벽부터 짖는 강아지가 부담스러웠는지 그러자 하고 내 뒤를 따라왔다.

“어떻게 된 거야?”
적당히 떨어진 골목길에서 우리 둘이 동시에 말했다.
좋다. 레이디 퍼스트. 나는 질끈 눈을 감고 금릉을 향해 먼저 말해보라고 했다.

“소문에 이 부근으로 식살귀가 나온다고 해서 잡으러 왔어.”
열 세 살짜리가 공덕을 쌓겠다고 아주 몸이 달았다.
선부의 가정에선 어디까지를 상식으로 여기는 건지 모르겠으나 주변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어른이 있다면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은 10대 아이들이 밖을 돌아다니기엔 매우 늦은 시간이었다.
애초에 10대 아이가 귀신을 잡겠다고 날뛰는 것부터가 나에겐 이해 불가능이긴 하다.

“식살귀? 그럼 산으로 올라갔어야지. 다른 수행자들은 무리를 지어 다 산으로 올라가던데?”
팔짱을 낀 자세로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금릉이 심통이 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굴만 봐도 대충 견적이 그려졌다. 의욕 하나는 드높았으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식살귀를 잡는 도사들끼리 경쟁이 치열해서 일찌감치 흥이 깨진 거다, 이 녀석은.
“흥! 실력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만 잔뜩 몰려 있더라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 말도 있잖아? 이 귀하신 몸이 그런 놈들과 같이 뛰어야 할 이유를 못 느끼겠더라고.”
말은 저렇게 했지만 정작 산에서 내려온 이유는 어른들이 아직 어려 보이는 이 소년을 사냥에 끼워주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날 더러 방해하지 말고 저리로 가라 고함치던 머리 허연 수사를 떠올리자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고지식한 수사는 그저 자기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릉을 깐봤을 거다. 때로 어떤 자들은 재산이나 실력 이전에 나이를 권력으로 따지는 법이다.

“아항, 어른들에게 밀려났구나.”
“아니거든?! 산에 있어봤자 얻을 소득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아서 내려온 거야!”
주인이 목소리를 높이자 검은 갈기의 강아지가 덩달아 장단을 맞춰가며 옆에서 깡깡 울었다.
주인더러 힘을 내라는 건지, 아니면 약을 올리려는 건지, 개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내 시선이 개에 꽂힌 걸 알아차린 금릉이 코를 으쓱였다. 비싼 개인가 보다.
“결정적으로 개가 산속에서 짖지 않았어. 이 개는 작은아버지가 주셨는데 아직 새끼지만 매우 영험한 영견이야. 아무나 키울 수 없는 매우 귀한 개지. 얘는 귀신을 보고 요괴를 물어. 꼬마 선자가 짖지 않았으니 산 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그래서 다른 선사들은 허탕 치라 하고 나 혼자서 내려왔어.”
“영견? 날 향해선 짖던데? 물기도 했고.”
“아직 새끼라서 그래. 어리니까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금릉이 무릇 사내라면 사소한 건 가볍게 넘겨야 하는 법이라며 타박했다.
결국 이놈은 개가 날 물었다는 점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일도 없는 거구먼. 캬아...

“그러는 너는. 내 하인이 되기 싫다며 약양으로 간다고 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네 하인이 되기 싫다는 말을 한 기억은 없다만.
애가 엄한 현실 왜곡을 하며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도 잘 씻지 않아 구린내가 난다며 코를 쥐었다.
살짝 억울했다. 씻는 걸 열심히 하지 않은 건 맞는데 얼마 전 묘지를 파는 바람에 더러운 걸 묻혀 와서 악취가 좀 나는 것뿐이다. 그 전까지는 사흘에 한 번 꼴로 개울가에서 세수도 하고 찬물로 사타구니와 겨드랑이도 잘 닦았다.

“사람 일이라는 게 항상 잘 풀리는 법은 아니지.”
“그럼 지금까지 구걸을 하고 다녔어?”
“구걸은 무슨... 세상 구경을 하고 다니는 거지. 그러다 친절한 분들에게 밥도 얻어먹고.”
“그게 구걸이지! 그런데 구린내 너도 참 요령이 없다. 밥을 얻어먹으려면 부뚜막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집을 골랐어야지. 보다보다 문 닫은 감찰소 앞을 기웃거리며 밥 얻어먹을 궁리를 하는 놈은 처음 봐.”
감찰소가 뭐 하는 장소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사람 없는 폐가라는 금릉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거든. 뒷문이 열리고 시체를 몰래 운반하던 사람이 들어갔다 사례비를 받고 도로 나왔다.

“뒷문이 열렸었다고? 구린내 네가 잘못 봤겠지.”
감찰소는 일종의 파출소 역할을 하던 장소였던 것 같다.
예전에는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잡아와서 벌을 주던 곳이라고 했다.
그러다 수사들이 점차 타락해 나쁜 짓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잡아와 제멋대로 처벌했기에 지금은 감찰소에 머물던 기산 온씨들을 모두 ‘죽.이.고.’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술법을 써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고 한다.
‘하여간 이 세계는 뭐든지 극단적이야. 감찰소에서 일하던 사람을 파면하는 게 아니라 전부 죽였다고?’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지다.
거기다 몰살한 수사들을 제대로 장례를 치룬 것도 아니고 감찰소 내 너른 부지에 합장하여 개개인의 구별 없이 묻었다는 거다. 그게 벌써 십년도 더 지난 옛날 이야기란다.

“그래서 안에 뭐가 있을지 살펴본답시고 문 닫힌 건물의 담을 올라갔어?”
“소문만 무성한 산속보단 이쪽이 훨씬 더 그럴듯하잖아. 악령이 나와도 하나도 안 이상하지.”
언젠가 금릉의 부모님들을 한 번 만나 면담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아이를 잘못 키웠다.
공덕을 쌓겠다는 욕심도 이해를 하고, 본인 실력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것도 다 이해하겠다.
10대니까.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담을 넘는 건 진짜 아니거든.
아무리 오냐오냐 자란 도련님이라서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무단침입은 좀 그렇잖아. 얘는 진짜 어른이 확실히 잡아주지 않음 커서도 사고뭉치가 되고도 남겠어.
무엇보다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담을 넘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걸 얘는 모르나?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당연히 잘못했지. 금릉, 넌 조심성을 키울 필요가 있어.”
“뭐?! 조심성을 키워?!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어?!”
“그래, 너 잘났다. 그래도 조심성 없다는 말은 사실이야. 일단 내 말을 하나도 안 믿는 눈치니까 저 건물 안에 진짜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 단, 가까이 있지 말고 멀리서 숨어서 보고 있어. 개가 소리 내지 않도록 잘 지키고. 그럼 잘 봐.”

그렇게 말하고 조심해가며 뒷문으로 다시 접근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무 장대로 문을 통통 건드렸다.
그리고 ‘나리, 잠시만 나와 보세요. 제가 의장지기 아래서 막일을 하는 심부름꾼인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이틀밖에 되지 않아 신선해요.’ 남이 들어도 뜻 모를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인기척이 없자 장대로 다시 문을 통통 건드렸다.

“뭐야 너는. 무슨 헛수작인데.”
포기할까 싶을 즈음에 뒷문의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한 뼘 정도 열렸다. 빙고.

Posted by 미야

2021/11/22 12:33 2021/11/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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