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 마탑요시2-1

선생님이 출석부로 머리통을 때리면 그 아픔보다는 울분 때문에 눈물이 나는 법이다. 하물며 신발이다. 어쩌면 개똥도 밟았을 물건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는 걸 깨달은 사내는 소매춤으로 눈가를 가렸다. 많고 많은 것들 중에 하필이면 신발? 서럽게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울긴 왜 울어, 이 친구야. 이건 기쁨의 소식일세. 보시게, 기다리던 이들이 와주시었네.』
시골 총각 발란틴과는 반대로「깡통」과「영감」은 희희락락한 표정을 지었다. 기쁨이 더욱 큰지라 머리통이 아프다는 건 잠시 접어 두었다.
『오늘이 정확히 15일째지? 2주일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하루 오버했군.』
『마제스쪽 갈림길이 좀 헷갈립지요. 푯말 수리가 제때 되질 않아 길이 익숙치 않은 여행객들은 이곳이 아닌 요만 계곡으로 잘못 방향을 틉니다.』
『아, 그 망할 안내판! 나도 실수한 적 있지. 그런데 일단 계곡 방향으로 끝까지 갔다 싶으면 왕복 사흘이잖소.』
『저치들 길눈이 참으로 밝았나 봅니다. 실수를 깨닫고 도중에 왔던 길을 되돌아 온 듯하군요.』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러면서「깡통」은 리나 인버스를 반갑게 쳐다보... 사실은 여성의 가슴 부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대어본다.
17세* 성장기임을 망각한 초초초 스몰 A컵.
필라멘트 전구에 환한 불이 들어온다.
제피리아 출신 마도사가 분명.
본인 확인 절차를 끝마친「깡통」은 친교의 악수를 청했다.
『와하하. 처음 뵙겠소이다, 리나 인버스씨.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인사는 뒷전이다. 리나는 양말 바람으로 달려와「깡통」사제로부터 붓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형수님, 불쌍한 아이들이 굶고 있소」라며 하소연한 흥부의 뺨대기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철물점에서 사 가지고 나왔을 법한 붓은 새 물건답게 제법 뻣뻣했다. 당황한 사제가 어이쿠, 어이쿠 소리를 내며 질겁을 했다. 돼지털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는 금방 붉어졌다. 밥주걱으로 때린 자리엔 밥풀이라도 남았지만 이쪽은 생채기밖에 안 남는다.
궁여지책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일보 후퇴에 저쪽은 이보 전진으로 반응한다. 반복되는 철썩철썩 소리에 정신이 없다. 감정이 끼어 매맞는 아픔이 곱절로 커졌다.

뒷짐만 지고 있던 제로스는 뚜껑도 따지 않은 풀 깡통을 들어 돌멩이처럼 내리치려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리나를 말리려 들었다.
게다가 승려에게 손찌검을 함부로 하고 있는 여자를 본 주민들이 놀라 까무라치는 시늉을 하고 있다.
이쪽 결계 밖 동네에선 승려의 지위가 월등히 높다. 머리만 박박 민다고 아무나 중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공부를 곱절로 많이 해야 한다. 아는 것이 많으니 할 일도 많다. 일손이 부족한 일부 마을에선 그들 사제들이 행정 업무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는 시골 주민들은 그래서「선생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접한다. 신심이 부족하야 절간 문지방을 넘는 일이 없을지언정 먼 발치에서 사제 그림자만 보고도 존경을 담아 절을 한다.
이 마당에 어떤 미친 년이 나타나 승려복을 입은 사제를 개 패듯 팬다?
전후 사정은 아무도 고려 안 한다. 오로지 리나만 죽을 년 된다.
『자자, 이제 그만~ 깡통은 내려 놓으세요. 그걸로 때리면 머리가 깨져요.』

그런데 그거 참 이상타.
맞은 사람이 아니라 때린 사람이 후후 숨을 불며 울고 있다.
남의 머리통에서 뽑아낸 한 웅큼의 머리카락도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없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을 해봐. 내가 댁더러 임포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기분 좋겠어?!』
『그야... 음. 기분은 썩 좋지 않겠죠. 당신이 화내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떤 상황.』
『현재 거주지가 불명확한 사람을 찾아 빠른 시일 내로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하는 상황입지요. 그래서 고민 끝에「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수 없다면 그쪽에서 직접 찾아오게 만든다」라는 고전적 방법을...』
『납득했어. 그건 좋다 이거야. 하지만 그 많고 많은 문구 중에「가슴 납작」이 뭐야.「슈퍼급 마도사, 리나 인버스」라던가.「롱 다리의 미소녀」등등으로 광고하면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치기라도 한다든?! 꼭 이런 식으로 불을 질러야 만족할 거야?!』
『롱 다리는 아니잖소. 나는 거짓말은 하지 못 하오.』
『닥쳐!』
『게다가 지상 최대의 마도사님,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모 등등의 칭찬 일색으로 떠들면 본 척도 하지 않을 거라고 세일룬에서 미리 언질을...』
『세일룬!』

손가락 마디 관절을 두둑 꺾는 소리가 두렵다. 정말로 사람 잡을 기세다. 엉겹결에 세일룬의 이름을 입밖에 낸 남자는 자신의 부주의함을 저주했다. 이 여자라면 세일룬 왕도로 달을 떨어뜨리고도 남겠다. 달을 떨어뜨리지 못하면 최소한 원한의 굵은 우박이라도 내리겠다.
「가슴 납작」이라 한 마디만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올 거라 꼼수를 내놓은 세일룬 관계자도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더냐.
쉿.
다쳐.
자칫 잘못되는 날엔 필립오넬 전하 및 세일룬의 백성들이 두꺼운 솜 이불을 뒤집어쓰고「온다, 온다, 리나 인버스가 온다」며 떨게 된다.

억지로라도 분위기를 바꿔보자. 남자는 간사한 미소를 흘렸다.
『이렇게 서서 얘기만 나눌 것이 아니라 어디 들어가 식사라도 같이 하십시다. 가만 있자, 2시가 좀 넘었군. 시간이 어중간하니 가볍게 교자 만두라도 드시지요. 제가 한턱 내겠습니다. 그런데 그쪽에 계신 검사님은 홀로 점심을 거르셨소이까? 보아하니 엄청 많이 시장하신 듯하온데...』

배가 많이 고파 보인다?
제로스는 뒤돌아 금발의 검사를 바라보고는「어랍쇼?」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다. 창백한 안색이 그리 보기 좋지 않다. 가만히 배를 끌어안고 있는데 다른 각도로 보자면 배가 아파 그런 것도 같다. 하지만 이 남자가 배앓이를 하는 건 본 기억이 없다. 비누를 삼켜 잘도 소화시키는 남자다.
마족은 안스러이 쯧쯧 혀를 차며 가방을 열어 비상 식량인 초컬릿 바 하나를 꺼냈다.
『오무라이스를 세 접시나 드셨으면서 벌써 배가 꺼졌어요? 자요.』
친절히 손수 그 포장지를 벗겼다.

『아마 그게 아닐 걸.』
가만히 있던 구스틴 영감이 표정을 달리하고 앞으로 나섰다. 뭔가 짐작가는 것이 있었는지 의사 선생님처럼 정색하고 싫다는 가우리의 혀를 억지로 잡아당겼다.
일행은 깜짝 놀랐다.
잡아당겨진 혀의 색이 거짓말처럼 하얗다.
영감은 혀를 끌끌 차며 눈꺼풀도 뒤집어 보았다.
『요세이님? 이자는 쿼터입니다. 그래서「반응」을 보인 겁니다.』
『뭐라고! 이거 큰일났군. 내가 부축할테니 도와주시오.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봅시다.』
『알겠사옵니다. 검사? 토할 것 같으면 참지만 말고 미리 말하시오. 어지럽거나, 메슥거리거나, 눈앞이 빙빙 돌아도 말하시오.』
가우리는 갑작스런 환자 취급에 뻗대며 반항했다.
『이봐? 왜들 이래. 난 병에 안 걸렸어.』
꽃가루 알레르기라도 일으킨 것처럼 몸이 나른하고 어지럽다. 평상시의 베스트 컨디션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 죽어가는 중환자 취급을 받을 까닭이 없다.
이마를 만져봤다. 차갑다. 아주 차갑다.
가우리는 이것 보라며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열은 없다구.』

요세이라는 자가 표정을 달리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차갑다는게 문제요. 앞으로 체온이 더 내려갈 거요. 아~아주 나쁘죠.』
『에?』
『내버려두면 앞으로 반나절만에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처럼 꼼짝도 못하게 될 거요. 가사 상태, 말 그대로 의식도 없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되지요.』
『에에?!』
『그리고 한달 뒤엔... 그 실터럭 같은 가냘픈 호흡조차 멎어...』
요세이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새파랗게 눈을 부릅떴다.
『죽습니다.』
『으에에에~?!』
『죽습니다!』
『으에에에~!!』

바로 이것이었나.
저들 사제들이 체면 불구하고「당신 가슴 형편 없네」타령을 하면서까지 리나를 황급히 불러들인 까닭이란 것이?
포장지를 벗겼으니 도로 가방 속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 가우리에게 먹이려던 초컬릿 바를 한 입 베어물고 제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에게 치명적인 -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 뭔가가 있는 겁니까?』
『예, 있어요.』
그러면서 시골 총각 발란틴은 등 뒤로 보이는 고색찬란한 하얀 탑을 어깻짓으로 가리켰다.
『 한 마디로 웬수죠.』


천천히 가기로 하고 작정하여 조각조각 내고 있습니다. ^^ 내킬 적마다 쓰는 것도 신선하네요.

Posted by 미야

2006/04/25 14:23 2006/04/2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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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우 2006/04/26 04:46 # M/D Reply Permalink

    '온다온다 리나 인버스가 온다'에서 뒤집어졌습니다 으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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