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1-02

정신병 걸린 갓파가 우물통 아래서 정좌하고 써내려가는 괴이한 이야기


마을로 나가려고 하면 늘 신경이 곤두선다. 여자들이 사용하는 긴 망토 모양의 겉옷을 챙긴 핀치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도 감았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면 이 방법이 최고다.
마치 투명한 코끼리와 부닥칠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 - 사람들은 그가 병적인 긴장증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다소 외진 곳에 세워진 그의 집으로부터 마을 광장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린다. 기준을 느린 걸음으로 잡은 건 그의 왼쪽 다리가 불편해서다. 건강한 성인 남자는 15분이면 돌파가 가능하다. 종종 걸음이라면 시간은 더 줄어들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요점은 15분이든 30분이든 그동안 하늘에서 큰 불덩이가 떨어질 리 없다는 거다. 땅으로 구멍이 뚫리지도 않으며, 세찬 돌풍이 불어 숲의 나무를 부러뜨리는 일도 없다. 공룡은 진작에 멸종했고, 주변엔 식인 식물따윈 자라지 않는다. 강도? 음... 그건 좀 현실성 있다. 유령보다 살아있는 사람이 곱절로 무서운 법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그는 곰을 무서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난 25일 무렵 근경에서 커다란 갈색 곰이 목격되었다. 사냥꾼들은 이게 웬 떡이냐 환호했다.
각설하고, 아직까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너무 과민반응 하는 거 아냐?」라는게 마을 주민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정말로 곰이 무서운 거예요? 교수.』
후스코의 질문에 핀치는 감았던 눈을 도로 떴다.
살인 곰? 그런 건 차라리 귀엽다. 핀치가 두려워하는 종류는 전혀 다른 것이다.

파랗게 빛나는 지구를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 아찔한 - 거대한 유리 돔 -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무색투명한 세계 - 사람을 죽이고 삭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무신경함- 완전무결한 - 쓰게 웃으며 도리질했다.
『글쎄다. 나는 아직까지 곰을 직접 본 적이 없어.』
『어? 소문과는 다른데.』
『누가 그러든. 내가 곰을 무서워한다고.』
『경비병 시멘스키가요.』
방금 전 헛소문을 유포한 장본인으로 지목된 시멘스키는 펄쩍 뛰었다.
『틀려. 내가 말한 건 곰이 아니고 곰 같은 여자! 그 둘은 서로 같지 않아!』
낮은 덤불을 좌우로 헤치며 씩식하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후스코와 핀치 두 사람을 충분히 질리게 만들었다. 사람이 다니기 힘든 길을, 그러니까 산짐승들이나 뛰어다니는 곳으로 잘도 걸음을 하고 있다.
이 근방은 경사가 가파르지 않다. 그러나 줄기로 가시가 돋은 종류의 유전자 변이 식물이 많이 자란다.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엔 무리다. 운동이나 해야겠다, 이러고 무모하게 도전했다간 팔뚝이며 손잔등이며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다. 천연의 가시철조망이다.

지혜롭지 않은 짓을 저질렀다며 핀치가 타박했다.
『왜 그런 곳에서 튀어나오는 겁니까, 시멘스키.』
『예? 그야 제 직업이 생선 장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멘스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핀치에게 왜 야단을 맞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투다.
『중앙 정부가 지급하는 소정의 급여를 받는 사람으로서 인민의 안전을 위해 순찰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듣자하니 마을에 움무 상인이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읏샤...』
거기까지 말한 시멘스키는 다리를 크게 벌려 움푹 패인 도랑을 날렵하게 뛰어넘었다.
『아시다시피 움무들은 날강도 짓도 곧잘 저지르니까요.』

움무는 공인된 출생증명서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자들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적게는 넷, 많아도 열 명이 되지 않는 숫자로 무리지어 돌아다니며,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다. 매우 비밀스러운 사람들이며,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
그들을 왜 움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으로선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라서 umm이라는 별 의미 없는 감탄사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움무 상인은 우리 집에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감시하고 있죠.』
후스코가 턱을 들고 코를 으쓱였다. 쇳덩이처럼 몸이 단단한 아버지는 소년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시멘스키는 그건 모르는 거라고 잘라 말했다.
『두 명만 나타났다며. 그렇다는 얘기는 숲속 어딘가에 나머지 움무들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거잖아.』
전자통신 시설은 진작에 사라졌다. 먼 곳의 소식은 움무들의 입으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다. 간혹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어서 주민들은 그들의 방문을 일부러 막지 않았다. 시멘스키는 단추를 누르면 노래가 나오는 둥그렇게 생긴 기계 같은 걸 기억했다. 그게 뭐냐고 묻자 유적지에서 가지고 왔다고 했다.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몰려들자 여자 움무들은 노래를 부르며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춤을 췄다. 젖가슴을 다 드러내며 그녀들이 추는 춤은... 음. 상당히 근사하고 엄청 섹시했다.
『그게 함정이었지. 주민들이 넋을 잃자 그 틈을 타 식량 창고를 털어갔거든.』
교훈이 워낙 혹독해 시멘스키에게 있어 움무는 천둥 벼락과 같은 재앙일 뿐이었다.

『그들이 이번엔 제트-트랜스 전지를 가져왔다고 하더군요.』
『예, 그 이야긴 저도 들었습니다, 핀치.』
『근방에 우리가 모르는 유적지가 있는 걸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시멘스키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지난 15년간 꾸준히 감시하고 확인했잖습니까. 근방에 노아의 구역은 없어요.』
여기까지 말한 시멘스키는 만약을 위해 주변을 더 둘러봐야겠다며 손가락으로 숲을 가리켰다.
핀치는 무사히 잘 다녀오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못 사요.』
대장간은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쇳물을 다루는 곳이니 원래 열이 많기도 하거니와 관리사문관인 카터가 모처럼 도깨비 얼굴이 되어 열변을 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우리 마을의 작황은 상황이 좋지 않아요. 보리와 밀을 사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제트-트랜스 전지라고 할지라도 그걸 살 여유따윈 없습니다.』
『그치만 카터, 빵은 밖으로 나가면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이런 전지는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게 아니야. 암시장에서도 구하기 힘든 거라고.』
『그래서 당신은 배가 고프다는 아들에게 멀건 죽을 먹이고 싶은 겁니까?』
발음을 흘리는 버릇이 있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대장간 밖에서도 알아듣기 쉬웠다. 흥분한 상태라는 증거다.
『윽, 안에서 곰이 화를 내고 있어. 썩 좋지 않은데.』
『교수. 문을 열까요?』
『그렇게 하려무나, 후스코.』
긴장한 핀치는 후스코에게 앞장서라는 신호를 했다.

『오, 후스코. 어서 와라. 심부름은 잘 했고?』
남자 몇 명이 안으로 쪼르륵 달려오는 곱슬머리 소년을 반겼다.
이상한 점은 뒤따라 들어온 핀치에겐 그 어느 누구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Posted by 미야

2012/08/18 17:08 2012/08/1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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