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02

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던데.
어머, 풀피리를 불면 주시가 얌전해져요.


설양은 잔뜩 으스대는 표정으로 코를 세웠다.
그 유치한 모습에 속으로 투덜거렸다. 전생 34년, 빙의 10년을 더한 입장에선 그가 하는 짓이 꼭 삼촌 앞에서 포켓몬 스티커를 잔뜩 가져와 자랑하는 어린 조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묘하게 썩어가는 내 표정을 봤는지 그가 이마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뒤로 쓱 넘기며 인공감미료 팍팍 버무린 후후 웃음소리를 내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배트맨 없는 세상에서 조커가 웃고 있다. 재빨리 태세를 바꿔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구조조정 희망퇴직을 언급하던 부장님 앞에서 온갖 재롱을 떨던 내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신묘하군요. 설 공자. 선술인가요?”
“별 거 아냐. 잡기지.”

말은 그렇게 해도 더 칭찬해달라는 눈빛을 한 설양은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성격만 좋았으면 여인들 심장마비로 죽어나갔을 귀여운 덧니였다.
웃음을 머금은 설양은 다시 길게 찢은 잎사귀를 입에 물고 아까와는 달리 제법 날카로운 음색을 만들어냈다.
사람 아닌 것들의 귀에는 다르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호루라기 소리를 들은 훈련병처럼 반응하며 같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전원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얌전해졌다. 허옇게 변한 눈을 여전히 뜬 채였어도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버리자 이제 그것들은 걸어 다니는 송장이 아니라 할로윈 데이를 맞아 대문을 장식한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빗자루로 턱턱 치면 뿌연 먼지가 솟구치는 구제불능의 장식품들 말이다.

도대체 이런 흉악한 것들은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채소가게 송씨의 말에 따르면 원한을 품은 시신을 제대로 장례 치루지 않으면 시변을 한다 했다.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니고 달의 기울기에 따른 음기의 양이라던가, 죽은 장소 등 여러 조건이 맞아야 했다. 당연히 그 조건들이 딱딱 들어맞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곳이 아무리 판타지 세상이라도 대낮에 주시가 돌아다니는 일은 결코 흔치 않았다.
그런데 소산은 음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곳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네크로맨서가 암약하는 중이라서 그런 건지, 배달을 하러 갈 적마다 주시가 발에 걷어차였다.

이유가 뭐지. 요 몇 년간 작황이 좋지 않아서인가.’
소산(小産)은
‘산출이 적다’ 라는 뜻 그대로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비가 잘 내리지 않아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전생에 내가 살던 곳과 달라 쌀이 주식이 아닐지언정 아무튼 비가 적으면 밭농사도 꽝일 수밖에 없다.
먹을거리가 부족해지자 산 사람을 상대로 한 도둑질은 당연하고 부장품을 노린 무덤 도굴이 판을 쳤다.
‘덕분에 도굴당한 무덤에서 이것저것 튀어나오는 눈치이기는 한데...’
풀피리에 반응하여 off 상태가 된 주시를 지긋이 쳐다봤다.
글쎄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저들의 수의가 너무 남루했다. 다듬지 않은 숭한 수염을 달고 있는 주시는 심지어 신발을 얻어다 신겼는지 좌우의 짝이 맞지 않았다. 허리띠는 무명이었다. 저들은 저승 가는 노잣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주인 따라 순장당한 아랫사람들이거나, 고귀한 분이 묻힌 장소는 명당일테니 좋은 기운을 얻으려고 가족들이 몰래 가묘를 쓴 시신이라는 건데... 무덤 하나에 몇 명이 들어가는 거야, 진짜.

잡생각이 너무 길었던 듯하다.
입 다물고 있는 시간이 길다고 느낀 설양이 맨질거리는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아이고 우리 빌런님! 반사적으로 침 바른 혀를 나불거렸다.
“이런 능력을 두고 겨우 잡기라뇨. 그럴 리가요. 선사의 말씀으로 겸양도 도가 지나치면 기심이 생긴다고 하잖습니까. 결코 잡기가 아닙니다. 걸람은 이런 거 처음 봅니다. 부럽습니다. 대단한 능력이에요.”
멈추지 않고 부럽다, 멋지다, 놀랍다, 갖은 양념을 다 쳤다.
근사하다 다음으로 어떤 미사어구를 덧붙이면 좋을까 전전긍긍하는 사이, 설양이 쥐고 있던 풀잎을 툭툭 날려버렸다. 그는 내 입바른 말을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렸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걸은 주시가 그다지 무섭지 않은가봐. 다른 년놈들은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느라 바쁜데 용감하게도 주먹으로 머리를 후려치다니. 대단해.”
“어, 뭐...”
“혹시 아는 얼굴이었나?”
“에? 아뇨.”
“괜찮아. 난 다 이해 해. 언젠가 걸레라고 손가락질하며 널 때린 적이 있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저 새끼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머리부터 쳤겠지. 암, 암.”

오해다.
하지만 바로 잡기가 참 뭐했다.
저쪽 세상 좀비를 떠올리고 일부러 머리를 노렸어요, 라고 할 수는 없잖는가.
그런데 이 이야기를 빼면 냅다 머리부터 갈긴 걸 설명하기가 참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급소라고 여기는 부분을 공격하기를 회피하는 법인데 목, 머리, 심장, 사타구니처럼 민감한 부위를 주저함 없이 노렸다는 건 애초에 상대에게 큰 원한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곁눈질로 머리 망가진 주시를 훔쳐봤다.
알던 사람인가? 동네 사람이었나? 잘 모르겠다. 게다가 흙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다. 여인이 붓으로 눈썹만 그려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던데 이런 조잡한 눈썰미로 나 때린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볼 것 같나. 그리고 평소 괴롭히며 밥 안 준 사람이 어디 한 둘이어야지.

“그런 거 아니에요, 설 공자. 그저 짜증이 나서... 저런 게 길을 막고 있음 배달이 늦어지잖아요.”
“오, 그래?”
“배달이 늦어지면 뜨신 밥 먹기 힘들단 말예요. 나 하나 때문에 일부러 국을 데워줄 사람들도 아니고. 것보다 요즘 주시가 많이 돌아다니네요. 위험하게. 설 공자님도 그렇다고 느끼죠?”
가자, 말 돌리기.
희극적인 분위기를 더하고자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과장님 컴퓨터에 음란 동영상 들어가 있어요. 무슨 대단한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일주일 전에도 채소를 배달하다 주시가 돌아다니는 걸 봤었거든요. 이쪽이 아니라 선동요 방향이었어요. 자세히 본 건 아니지만 비틀비틀 걷는 모습이 여느 술주정뱅이와는 달랐기에 똑똑히 기억이 나요.”
“저런.”
“진짜라니까요, 설 공자. 가는 길목에 누군가 큼지막하게 부적도 붙여놨더라고요. 얼마나 잔뜩 붙여놓았던지 벌레가 잔뜩 앉은 모양새였어요. 아무튼, 소문으로는 선동요 사람들이 약양 상씨 세가에 도움을 요청할 거래요. 이 부근에서 요괴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약양의 상씨 세가밖에 없으니까요.”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상씨 집안의 대문도 본 적도 없다.
가솔의 숫자만 무려 7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런 대단하신 분께서는 송씨네 구멍가게에서 채소를 주문하지 않는다. 그러니 따로 배달을 갈 일도 없고, 호기심에 기웃거렸다가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 상씨 세가 앞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 들은 얘기가 있었다.
가주의 성품이 난폭하여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있음 노인이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고 때린다는 거였다. 뼈를 부러뜨리고 근육을 상하게 만든 뒤 사거리 한 가운데 내던진다며 객잔 주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락랑이 말해준 적이 있다.
그게 정말이냐고 묻자 락랑은 ‘그럼 가짜겠니?!’ 라며 앙칼지게 말하고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파하며 눈물을 글썽이자 ‘뚝 그치지 못해?!’ 야단치며 엿기름을 바른 누릉지를 주었다.
‘먹던지 울던지 하나만 해!’ 락랑은 내 귀도 잡아당겼다. 손맛이 매웠다.

잠시 그렇게 누릉지의 맛을 떠올리고 있는데 설양이 예고도 없이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공자의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입안이 말라붙는 기분이다.
누릉지는 사라지고 대신 자리를 차지한 건 크립토나이트 – 초록색으로 빛나는 수퍼맨의 약점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1/10/14 16:37 2021/10/1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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