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날씨가 무더워진 어느 여름날.
느닷없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나면서 마을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한 상점의 핑크빛 간판이 흔들립니다.
네, 어느 틈엔가 보라색 단발머리의 단아한 청년이 도깨비처럼 갑자기 그 장소에 나타났어요. 그는 커다란 리본 문양이 새겨진 간판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며 잠시 숨을 죽여 봅니다.

[피리아 윌콥트 도자기 전문점]

그 밑으로는 빨간색 잉크로 파격 세일 25%라고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써 붙였군요.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 잘 띄라고 다닥다닥 붙여놓기까지 했습니다. 제법 장사가 잘 되는 편인지 쇼 윈도우는 수려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색색의 예쁜 도자기들이 아기자기 하게 놓여져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군침을 흘리게끔 만들고 있었어요.

청년은 붉은 구슬이 달린 석장을 영 손에 꼬옥 쥐고는 가게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의 목적은 도자기 구입이 아닙니다.
아는 분은 다 알고 계시겠죠? 훗훗. 제로스는 쫑쫑 걸음으로 살그머니 다가갑니다.

그런데 이게 어연 일입니까? 너무 조용합니다.
『이상하네. 이만큼 가까이 왔으면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제로스는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그래요. 평상시라면 문이 벌컥 열리면서 귓청이 찢어져라 피리아가 고함을 질러댈텐데... 썩은 쓰레기통이니 냉동식품 마왕에게 꼼짝도 못하는 말단 관리니 뭐니 난리를 한바탕 피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전천후 마족 탐지기가 고장이라도 난 것일까요?
찬바람이 솔솔 불어옵니다. 옆구리가 허전하군요.

『치잇! 이래가지고는 재미 없잖아. 기껏 장난치러 왔더니 이게 뭐야.』
그렇군요. 피리아는 바보대장 쿠라보스와 함께 가까운 마을로 물품 배달을 나간 모양입니다. 주인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제로스는 허탈한 심정이 되어 가게로 얇은 시선을 던집니다.
척 보아하니 붉은 여우족 지라스 혼자 자리에 앉아 있군요. 테이블 위로는 먼지를 닦아낼 항아리가 두서너 개 놓여져 있고 깨끗한 헝겁도 그 옆으로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지라스는 항아리를 닦기는커녕 이마를 접은 채 펼쳐놓은 공책 위로 부지런히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습니다.
가계부 정리라도 하고 있는 건가?
아항. 그게 아니군요. 그이와 바꿔볼 교환 일기를 작성 중이거나 아니면 연애편지를 쓰는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듯 하네요. 어쨌든 표정이 무척이나 비장합니다.
연필에 힘을 꼭꼭 주어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들여 적고 있군요.
『눈사님. 당신의 이름은 어째서 눈사인가요... 푸하. 이거 상당히 어렵네.』

아이구! 진도가 영 안나가는 모양입니다. 지라스는 연필을 씹어먹으며 머리털을 북북 긁어댑니다. 근처로 빠진 여우털이 수북하네요.
그래. 더 긁어라. 사랑을 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느니라.

아무튼.
제로스는 쓴 입맛을 다시며 뺨을 긁적입니다.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요. 하지만 심심한데... 갈등입니다.

흐음. 그런데 잠깐만요. 이게 뭐죠?
무엇인가가 마족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말았어요.
네. 그것은 가게 뒷뜰에서 혼자 놀고 있는 어느 흑청색의 도마뱀... 이 아니라! 아기 바르가브의 뒷모습이었지요.

도마뱀.
무리도 아닙니다. 황금 용보다 열 배의 힘을 가졌다는 엔션트 드래곤이지만 아직 알에서 태어난지 2년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한 눈에 척 하고 보면 모여라 꿈동산 사이즈의 거대 머리를 가진 도마뱀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그가 인간의 아이같은 형상을 취할 수 있기까지는 적어도 30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그러니 어쩌겠어요. 완전히 도마뱀... 헉. 그, 그래서... 휴우.

제로스는 미소를 짓고는 공간을 가로질러 뒷마당으로 후딱 날아가 버렸어요. 그리고는 손뼉을 탁 치고 시커먼 도마뱀(아니라니까!)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지요.

『어머! 이게 누구신가요? 바르가브씨 아니예요?』
『...』

지긋이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머리 큰 도마뱀.
『저기, 바르가브씨? 저예요. 야수신관 제로스. 바르가브씨? 이봐요.』
허허허! 그런데 반응이 없습니다. 아기 바르가브는 등을 돌리고 앉아 그저 따뜻한 햇볕을 즐기고만 있습니다.
그냥 앉아 있었어요.
계속 앉아 있었죠.

이게 졸구 있나.
약간 쨔증을 느낀 제로스는 석장으로 아기 바르가브의 몸을 쿡 찔러봅니다.
그대로 아기 바르가브가 기우뚱 넘어갑니다.

『와악! 진짜 졸고 있었던 거야?!』
제로스, 깜짝 놀라 엉겹결에 아기 바르가브의 몸을 와락 붙잡았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일 저지르기 전에 막았습니다.

『음냐. 누갸.』
아기 바르가브가 옹알거립니다. 그리고 눈을 부비며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순간 제로스는 할 말을 잃었답니다. 아기 바르가브의 이마 위로 달려있는 커다란 분홍색 리본무늬 머리핀... 그리고 분홍색 아기용 침받이... 쇼크.
아아. 바르가브. 예전의 쌈빡하기만 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느냐. 살랑거리는 작은 미풍에도 꺽어질 것 같던 허리는 또 어디로 증발하였나. 섹시한 나이스 바디는 엿 바꿔 먹기라도 했나. 그래. 아직 어리니까 그건 그렇다고 해두자. 하지만 그 분홍색 머리핀은 무엇이냐. 게다가 주변에 널린 것들은 장난감 밥그릇과 숟가락,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가짜 냄비 세트와 엉성한 모양새의 화덕... 실수로 망가진 것이 분명한 이 빠진 그릇들이 엄청 어지럽게 널려 있으니!

『소꿉놀이...입니까?! 바르가브씨.』
『우아. (^-^)』
아기 바르가브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까딱거립니다. 순간 제로스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힙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우느라, 부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호오. 이건 뭐죠? 밥 짓는 연습이라도 하는 건가요?』
『아니. 반찬 만들었쪄. 오늘은 참치 넣구 보글보글이야.』
『세상에. 이런 걸 하고 놀다니요. 전쟁 놀이는 하지 않나요? 사내라면 무릇 칼 싸움을 하면서...』
『아니. 그런 거 하면 엄마에게 당장 때찌야.』

알겠습니다. 이름하여 떡잎 시절의 인성 교육이라는 거군요. 폭력을 싫어하는 (누가?) 피리아가 아기 바르가브에게 비 폭력적 놀이를 하도록 권장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젠 바르가브가 아니라 바르테일러, 아니. 바르테이나라고 이름을 고쳐 불러야 하겠군요.

제로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근처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던 그릇 하나를 줏어들었습니다. 누런 색이었고 더러운 먼지가 가득한 램프였어요.
『아무리 도자기점 아이라지만... 남자 아이에게 이런 그릇들을 가지고 놀라고 하다니. 역시 나이가 어려서 그러나, 엄마로는 영 빵점이네. 게다가 이렇게 지저분한 걸 아이더러 가지고 놀라고 하면 어떻게 해. 위생 개념이 엉망이군. 이런 걸 아이가 쪽쪽 빨아대서 나중에 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구?』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짐짓 램프를 손등으로 문질렀어요.
순간.
허연 증기같은 것이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면서!!
붐밤, 붐밤, 붐밤!

『우.하.하.하.하.하!! 우.하.하.하.하.하!!』
이게 뭡니까. 허연 연기가 점차 형상을 갖추더니만 커다란 거인으로 변했습니다. 뻘건 팬티를 입고 있었고 초록색의 망토를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씩하게 잘도 웃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백사의 나가양의 웃음소리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제로스는 얼이 빠진 나머지 램프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뭐야. 이계에서 온 마족인가! 피리아는 남 몰래 이런 것도 키우고 있었단 말이야?!』
『우하하하하!! 우하하하하하!!』
계속해서 웃고 있는 거인.
『정신 공격이다!』

그런데 거인이 웃음을 딱 멈추었습니다. 그러더니만 물끄러미 아기 바르가브를 보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바르가브의 꼬랑지를 응시하고 있네요.
『도마뱀 구이! 바바는 도마뱀 구이를 가장 좋아해!』
군침을 삼키던 거인이 덤벼들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램프의 거인이 아기 바르가브의 꼬리를 덥썩 물었습니다. 아기 바르가브는 짧막한 비명을 지르며 냅다 주먹을 휘두릅니다. 뻐억 소리가 나면서 거인의 어금니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집니다.
『와악! 압둘라 주인님! 살려주셔요!』
주먹질 한 방에 거인이 안개가 되어 사라집니다.
(아냐! 바바가 엄청 약해 빠진 거란다. 아는 분은 다 알지요? 호호호! ^0^;;)

제로스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이빨자국이 선명한 꼬리를 매만지고 있는 아기 바르가브를 응시합니다.
『역시 당신은 우리들 마족에겐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겠군요. 수왕님께 일차적인 보고를 올려야 할지도 모르겠는... 어라! 왔다, 왔어!』
이야.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거대 짐짝을 등에 지고 있는 피리아의 모습이 언덕 너머로 나타나고 있었거든요. 제로스는 실실 웃으며 피리아 등뒤로 공간 이동을 시도합니다. 그리고는 하얀 색 장갑을 낀 손으로 살며시 피리아의 목덜미를 슬쩍 만져봅니다.

『피리아는 못난이∼♡ 이 목덜미에 때 좀 봐라.』
『꺄아아아아!!』
접시 깨지는 와장창 소리가 제법 요란합니다.
열 받친 피리아는 이빨 빠진 접시들을 단발머리 마족을 향해 휙휙 집어 던지며 쓰디 쓴 눈물을 삼키고 있습니다.

『너 때문이야! 또 깼잖아! 이 썩은 쓰레기 마아족!! 이번 달도 적자잖아! 바르가브 우유 값도 얼마나 나가는데! 도저히 용서 못한다! 이야압!!』

아세요?
어느 마을에 도자기 전문점이 하나 있는데요. 괴물들이 장사를 하며 살고 있다는 소문으로 아주 유명하답니다. 엄마는 예쁘게 생겼는데요 성질이 포악하죠. 아들은 깜장 도마뱀이구요, 부하는 여우랑 푸른 피부의 괴물 파충류랍니다. 가끔가다가 잘 생긴 청년이 놀러오는데요, 그 날은 마을 사람들이 죄다 언덕으로 올라가 돗자리를 깔고 앉아 밤 하늘의 레이저 쇼를 무료로 감상하곤 하죠.

오늘도 사람들이 먹을 걸 싸가지고 언덕을 슬슬 올라옵니다.

『제로스, 제로스! 용서 못해! 당장 이리 오지 못해애애애!!』
『어머, 장난한 걸 가지고 뭘 그러셔요. 피리아님도 참! 포~악도 하셔라.』
석양이 곱게 진 하늘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불빛이 아름답네요.
그렇게 해서 피리아 윌콥트 도자기 전문점은 한층 더 유명해지고 있었답니다.

쫑. 두서없는 글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