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럽게 불어오던 한줄기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자연 그대로가 아닌 마법으로 꾸며진 인공적인 것이긴 했지만 피부에 와 닿는 감촉만은 시원스러웠다.
따가운 햇살을 등지고 앉아 색색의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난 정원을 감상하던 청년은 느긋하게 고개를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앉은 길죽한 모양새의 의자는 푹신거리고 편안하게 보였다. 둥근 모양새의 머리가 어디로 되돌아 갈지 몰라 근심에 빠진 황새의 그것처럼 불규칙적으로 흔들거렸다. 잘은 모르지만 얼핏 보기엔 꽤 깊이 잠들어 버린 것 같다. 다소곳이 드리워진 속눈썹엔 꽤 짙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칠칠치 못하게 다리와 팔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끄떡거리는 모습은 흡사 신나게 공차기 놀이를 하다 지쳐 잠든 개구쟁이 어린애를 연상시켰다. 비록 생기발랄하진 않았지만 그 어디에도 근심 걱정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천진난만한 천사의 얼굴은 죽음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만 가고 있었으며 주변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이상할 정도로.

《묘한 기분. 꽃향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지만... 이름만 장미 정원이지, 이렇게 많은 꽃들 속에서 꿀벌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니. 실수야. 상상력이 부족했어.》

숨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눈을 감고 늘어진 청년의 옆에 얌전히 앉아있던 소녀는 그때까지도 빳빳이 세우고 있던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댔다.
웃고는 있었지만 어딘가 약간은 질렸다는 식의 표정...
이윽고 그녀는 팔목을 덮는 장갑을 낀 손을 옆으로 길게 뻗어 청년의 짙은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이 기분 좋았던지 청년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유나는 조심스럽게 청년의 뽀얀 피부와 핑크빛 뺨, 풍성하게 귀밑자락을 덮은 귀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눈을 깜빡거렸다.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진 것. 살아 있지 않은 것.》

유나는 그의 미소를 눈여겨보며 최대한으로 얼굴 근육을 움직여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플라스틱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은 가면처럼 거의 변화가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는 익숙치 않은 그녀의 얼굴은 아주 괴상해 보였다. 비록 자신과 마찬가지로 헛껍데기 육체라고는 해도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제로스의 아름다운 얼굴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굳이 그만하면 자연스럽게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라면 몰락한 왕국의 귀족 여식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우아하게 찻잔 세트나 다루는 기술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은근히 속이 상했다.

-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대는 왜 이런 나를 만들었나?

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태평스럽게 차나 마시면서 일종의 관상용 물고기 역할을 하는 것뿐이었다.
가짜로 만들어진 장미 정원, 그리고 정교한 문양으로 장식된 순백의 테이블과 의자.
거기서 그녀는 그가 내려준 드레스를 입고 언제까지나 앉아만 있는다.
정해진 기간이 다 찼을 적에... 인간 소녀는 백랍의 인형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고급 장난감이다. 유나는 나즈막히 한숨을 내쉬며 백자 찻잔을 들어올리며 안에 담긴 액체를 소리없이 한 모금 들이마셨다. 찻잔 속에 담겨진 맑은 황갈색의 액체에선 향수병을 몽땅 엎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지독한 장미 향기가 풍겼다.

『차는 다 식었을 거예요. 유나.』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채로 제로스가 말했다.
《응?》
그의 지적에 유나는 그제야 자신이 두 손으로 감싸 쥔 찻잔이 싸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항상 끼고 있는 흰 장갑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차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식어있었다.
그녀는 공주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조그마한 장난감 찻잔을 얌전히 테이블 위에 내려다 놓고 다시 허리를 폈다. 만약 커다란 적갈색의 눈동자를 깜빡거리지만 않는다면 지금의 그녀 모습은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커다란 도자기 인형 그 자체였을 것이다.

《미안. 내가 너의 잠을 깨웠니?》
순간적으로 눈동자 안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그녀의 도톰한 입술 위로 근심이라는 빛깔이 떠올랐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웃으려고 했을 적에는 괴물 같기만 하던 것이 지금은 그럭저럭 제법 인간답게 보이니 말이다.

제로스는 인형처럼 앉아 있는 소녀를 향해 괜찮다는 시늉을 해 보이며 의자에서 몸을 뒤척였다.
『아뇨. 사과하실 것 없어요. 눈만 감고 있었을 뿐인데요, 뭘.』
《그렇지. 너는 잠이라는 걸 자지 않지.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어.》
길고 가냘픈 자기 손가락을 딱딱 소리가 나도록 꺾어 대던 제로스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간 장난감 소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로 초콜릿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어 밀면서 한 번 먹어 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이거 먹어 봐. 맛있어.》

제로스는 조용히 팔짱을 끼고서 앉은 의자에 더욱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친절하고 상냥하게라... 원래의 얼굴 주인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태도였다. 그녀와 똑 닮은 여자는 툭하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일수였고 여차하면 목을 졸라대다가 조금만 수가 틀린다 싶으면 초강력 울트라 펀치를 휘둘러대곤 했었다. 이런 식으로 과자를 먹어보라 권하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다. 악의로 가득차서 독약을 넣은 과자를 선물했던 적은 몇 번 있긴 있었지만.

픽 소리 내어 웃으며 흘러내린 앞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뭘 비교하겠다는 건가, 천연보석과 대충 만들어낸 플라스틱 반짝이는 애초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 것 아니었던가.
스스로를 다그치며 물결무늬가 아로새겨진 갈색의 덩어리 - 과자라는 것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여자가 만든 과자는 부드럽게 씹혔다. 허나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제로스는 눈을 돌려 같이 과자를 먹는 유나를 관찰했다. 씹고 삼키는 동작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인형이나 마찬가지인 그녀의 얼굴에선 간식을 먹는 여느 소녀의 즐거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제로스는 가만히 과자 위로 조심스럽게 혀를 굴려보았다. 그래도 깨끗한 어항 속의 모래처럼 입안에서 까슬거리는 감촉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마도 유나는 이러한 촉감이 마음에 들어「맛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입안에 굴러다닌 것들이 음식이 아닌 정원에 굴러다니는 진흙 덩어리였더라도 유나는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각설탕이든, 흙덩이든. 혀 위에서 굴러다니는 감촉만이 전부.
먹는다는 것... 안타까웠다. 저 인형 얼굴의 원래 주인이라면!

《흉내내기. 어쩔 수 없다. 난 이것밖에는 못해.》
제로스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얌전히 소곤댔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생각과 달리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상관 없어요. 당신은 그저 거기에 앉아 나만을 위해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제로스는 당신 얼굴이 마음에 드니까. 유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여기에 머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날 기다려주고... 나만을 바라봐주고...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가치가 있죠.』
제로스는 손을 내밀었다. 어린 여왕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걱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사랑스런 청년.
그리고 그런 그만의 장난감 공주님.

『내가 원하는 것...』
《네가 원하는 것... 정말 그게 다야? 내가 이곳에 앉아 언제까지나 널 기다려주는 것이? 그게 정말 네가 진실로 바라는 거니? 제로스.》

잠시 잠깐의 휴식. 여름의 산들바람.
그가 원했던 것...
너무 오래 전 이야기였다.

그녀의 얼굴은 한층 더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마침내 생기를 다 잃어버린 유나는 숨쉬기조차 멈추었다.
그들의 주위를 둘러싼 바람조차 힘을 잃었다.
시들지도 않는 장미꽃이 그날따라 흉칙하게 보이는 건... 어쩌면 그건 바람이 멈추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흘러가야만 하는 것이 흘러가지 않는다. 멈춘 것. 비 정상적인 것... 죽은 것.
제로스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작은 손을 가만히 놓아버렸다.
그들 사이로 바람이 멈추었다.

사실 바람은 아주 오래 전부터 멈추어 있었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