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의식은 지독히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묘하게스리 복잡다난했다.
가우리는 법정에 선 증인처럼 최대한 엄숙하게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걸죽한 느낌의 침묵은 일종의 병풍이 되어 그들의 주변으로 활짝 펼쳐졌다.
초조하다.
가우리는 붉은 눈동자의 소녀 앞에서 괜스리 허리가 구부정해지는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리나의 눈이 한층 더 날카롭게 빛나며 가로로 길죽해졌다. 시선은 가우리의 목 부분으로 날아가 콱 틀어박혔다. 비수처럼 날카롭게, 그리고 깃털처럼 가볍게 피부를 스치고 이동한다. 소녀의 집요한 눈빛에 가우리의 뺨이 자동적으로 발갛게 물이 들었다.

마침내 가우리는 자신의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내어미는 것으로 소녀의 요구에 말없이 응했다. 닿을듯 말듯 리나의 가슴께로 가우리의 손가락이 펼쳐졌다. 금방에라도 둥근 가슴을 와락 움켜잡을 듯이 그의 손가락 관절로 잔뜩 힘이 들어갔다.
리나는 필요 이상으로 뻣뻣해진 남자의 손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그럭저럭 괜찮긴 하군. 그런데 이거 비누로 잘 씻은 거 맞아, 가우리?』
『으, 으응.』
선생님 앞에 선 유치원생은 마냥 괴롭기만 했다.
『말투가 수상하다. 혹시 손톱에 물만 묻히고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거 아냐?』
『아냐! 구석구석 벅벅 잘 닦았단 말야!』

검사, 검사.
리나는 꼼꼼하게 가우리의 손바닥을 아래 위로 뒤집어보며 청결 상황을 직접 확인했다.

이것은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치루곤 하는 하나의 의식...
목 뒤로 하얀 수건을 대충 두르고 공동 욕실에서 빠져 나온 제르가디스는 쾡∼한 눈빛으로 연인들만의 장난(?)을 멀찍이 서서 감상했다.

연한 물빛의 파자마 잠옷 차림을 한 리나는 금방에라도 슬리퍼를 벗어서 사람 잡는 도끼 대용품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그 앞에 선 가우리는 오늘도 어김없이「밥」신세다. 머리는 엉키지 않도록 잘 빗었나, 발가락은 냄새 나지 않도록 씻었나, 등짝에 머리카락이 붙지는 않았나... 기타등등.

원래 여자라는 존재는 남자와는 달리 이런 면에서 신경질적인 법이다. 보아라. 걷어올린 종아리에 물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는 지적에 가우리가 본능적으로 겅중겅중 뛰기 시작했다.
「으이그! 그대로 침대 위로 기어올라가려고 그랬냐?!」
서둘러 발 수건을 찾던 리나가 흡사 결혼하지 20년은 지난 마누라처럼 바가지를 긁고 있다. 팔짱을 단단히 끼고서 눈을 부라리는데 금방에라도 마그마를 뿜을 분화구 같다. 성격이 급한 편인 그녀는 아예 발 수건을 들고서 가우리의 종아리를 철썩철썩 후려갈겼다.
우아하지 않은, 솔직히 제르가디스는 그런 리나의 행동 방식이 싫었다.

『자자, 오늘은 그만.』
그래도 다행히 오늘의 의식은 짧게 끝났다. 하루종일 렛셔 데몬 떼거지들을 쫓는다면서 커다란 산 두 개를 한꺼번에 넘은 탓에 몸이 피곤해서이다. 겨우 20골드의 의뢰금을 받고 등산까지 해야 하겠느냐며 펄펄 뛰더니만, 몸은 그렇다 치고 정신까지 축 늘어진 모양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우리는 비누로 발을 씻지 않았다. 옆으로 나란히 서서 때 수건용 철 수세미로 뺨을 문질러대던 제르가디스는 성서에 맹세코 그렇게 증언할 수 있었으며, 리나 역시 눈치는 멀쩡한지라 그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챘다.
하지만 가우리는 얼렁뚱땅 담을 넘어갔고, 리나는 잠자코 눈을 감아주었다.
오늘은 만사가 다 피곤한 날.
나중에 곰을 잡고 오늘은 그냥 자자.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꿈꾸자∼!!』

바로 그 순간이 제르가디스의 뱃속이 엉망으로 긁히는 순간이었다.
리나와 가우리. 이 어린애와도 같은 철부지 연인들은 살포시 눈꺼풀을 감고 스치듯 말듯 입술을 마주한다. 격렬한 포응도 없고 서로를 음미하는 탐색전도 없다. 아주 간단하고도 평범한... 옹알이를 하는 갓난쟁이처럼 입술을 모으고는 일부러 다른 사람들 들으라며 쪼옥∼ 소리도 낸다.
그렇게 단순한 것이 그들의 굿 나잇 키스.
헤벌쭉 웃는 그들은 서로의 눈동자에 맺힌 자기네들의 건강한 모습을 확인하며 내일 또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가볍게 휘파람을 부는 가우리는 싱긋 웃으며 방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어린애마냥 손을 빨빨빨 흔들고 있다. 리나는 짐짓 뒷짐을 지고 뺨에 가벼운 바람을 넣고 있다.
개구쟁이들 같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적어도 키메라의 눈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제르가디스는 주먹을 폈다 접었다 하며 잠시 몸을 숨겼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역시 그랬다. 위가 단단해지면서 오그라든다. 명치가 아프다. 못 견디게 그게 싫었다.

《바보 같은 사람. 원하는 건 스스로 능력껏 쟁취하는 거라고요. 나를 좀 보라고요. 가지고 싶어요? 그럼 뺏어요. 소유하고 싶나요? 그럼 호주머니 안으로 그냥 집어 넣으라고요. 도대체 뭐가 문제람?》
마족의 사고방식이야 초등학교 1 더하기 1 수준이다. 말이야 쉽지! 뒷통수에다가「임자 있음!」이라 팻말을 붙여놓은 여자를 무슨 수로? 제르가디스는 짙게 그림자진 얼굴을 아래로 숨겼다.

한 가닥의 애정을 구걸하기엔 자신의 처지가 지독하게 처량 맞지 않은가.
차라리...
차라리.

『얼레. 이게 어딜 도망가! 제르가디스.』
몰래 뒷걸음질 쳐서 소리소문 없이 그냥 사라지려던 소년을 그녀가 얼른 낚아챘다.
『나도 잘 씻었어, 리나.』
그의 목소리는 한 없이 시큰둥했다.
『말은 잘 하지.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아! 어젯밤에도 칠칠맞게스리 입가에 치약거품을 하나 가득 매달고서 욕실에서 그냥 튀어나온 주제에!』
『그, 그거야 네가 제로스랑 말다툼 하고 이, 있으니까 서둘러 나오느라... 녀석이 또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막으려... 녀석은 기회만 잡으면 너에게 항상 나쁜 짓을 하려고 하잖...』
『시끄럽다. 얌전히 하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봐.』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며 손가락을 빙빙 돌려 강아지 훈련을 시킨다.
비참하다. 제르가디스는 슬프도록 한숨을 푹 내쉬며 그 자리에서 한바퀴 빙글 돌았다.
왈왈∼♬
소년은 험상궂은 인상을 하고 소녀를 쏘아 보았다.

『감상은?』
『퍼펙트.』

《그런데 왜 나에겐 굿 나잇 키스를 해주지 않아?》

소년의 입이 한자나 앞으로 튀어나왔다. 결코. 졸라댈 생각은 없다. 어린애처럼 삐지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조금 불만일 뿐.
매일 밤 죽어라 뺨을 문질러서 가뜩이나 거칠은 피부를 억지로라도 매끄럽게 매만지는 것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라고 죽어도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입술이 딱딱한지라 그녀가 그 촉감은 싫어하지는 않을까 매일 노심초사해 하며 그 대책을 고민한다는 것도 죄다 비밀이다. 가우리와 비교 당한다는 생각에 심장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것도 혼자서 삭힐 것이다.
그는 검사다. 근육과 살갗을 베어내는데 마음을 왜 못 베랴.

그래도 한 가닥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소녀는 소년을 생각하고 있다. 그 증거는 생각 외로 명백하다.

『쉬이. 악몽은 물러가라. 쉬이.』
그것은 아주 어릴 적 리나가 고향에서 전수 받은 일종의 미신이었다. 다소 아프도록 엄지손가락을 쥐고 꾹꾹 눌러댄다. 그녀는 졸린 눈을 부며가며 제르가디스의 엄지를 죽어라 찍어눌렀다. 하얀 반달이 드러난 그의 손톱이 보라색으로 변하도록 살벌하게, 집요하게, 이를 악 물고는 마음을 가득 담아 눌러댔다.

사실 상당히 아팠다. 하지만 소년은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손가락을 잘라가겠다고 해도 그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는 결코 반항하거나 하지 않았다.

『됐다. 이것으로 오늘 밤에도 악몽은 꾸지 않을 거야.』
『응.』
쓰리고 얼얼한 감촉의 손가락을 얼른 입에 물고서 소년은 웅얼댔다.
『좋은 꿈꾸고∼. 잘 자. 제르가디스. 내일 아침에 보자.』
도라마타 리나 인버스 다운 난폭한 굿 나잇 인사.
그래도 소년은 그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전부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는다.

어둠이 길게 드리워진 밤.
타앙.
문이 닫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