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 죄는 반복된다

너에 대한 나의 감정? 안심해도 좋아. 원망따윈 하고 있지 않거든. 그런 건 없어. 다시는 홀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신성한 약속을 배반하고 나를 또다시 외톨이로 만들었어도... 뼛조각 하나없이 흔적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해도 난 다 잊어먹었다구. 그런 걸 왜 기억하나.

《으흐흐흣, 영광으로 생각하렴. 내가 가족이 되어주지.》
알고 있어?
당신은 나쁜 여자야.

《으응, 마마.》
《돌았냐!! 나를 마마라 부르는 건 결코 허락할 수 없어. 너와 내가 가족이 된다는 건 엄마와 아들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란 말이다!! 이 바보! 제르가디스.》

부드럽게 움직이던 그 입술의 모양새도 이젠 다 잊어 먹었다. 잔인할 정도로 딱 잘라 말하던 그녀가 당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조차 기억 나지 않는다. 품에 안아줄 적마다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던 포푸리 비누 냄새도... 나는 잊었다. 그런 것 따위, 머리 굴려 생각해봤자 골치만 아픈 것.

《흐음, 그렇다면 뭐가 되는 건데? 내가 남편이고 네가 마누라냐? 그건 아니잖아.》
《우, 우웃!! 그, 그건 그렇지.》

거절당한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다. 하지만 무시하자. 그런 것에 연연해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거든. 상처받았다고 내색하는 건 졌다고 시인하는 것이야. 패배했다고 인정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나는 생각해. 뭐 하러 그래? 멋대로 살자. 어깨 똑바로 펴고 앞만 바라보면 된다.
언제나 그래왔잖아? 나를 기만하는 것.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에게 몇 번이든 반복해서 최면을 걸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강하다. 나는 약하지 않아. 나는 슬프지 않아.

《헤에. 제르가디스? 너 지금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어. 배고파?》
그녀가 내민 한조각의 사과는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마마. 당신이란 여자는...!!

《가우리가 많이 늦네. 나도 좀 출출한데... 우리끼리 먼저 밥 먹을까?》
멀쩡하던 하늘에 갑자기 불길하기 짝이 없어 뵈는 시커먼 연기가 짙은 그림자를 던지우기 시작한다. 그걸 본 마을 여자들은 끼리끼리 모여 하나같이 혀를 끌끌 차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당장 말세가 다가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언제나처럼 석쇠에 눌러 붙어서 바짝 타들어가고 있는 커다란 고깃덩어리와 전투를 한다. 비지땀이 비오듯 흘러내리는 가운데 그녀는 여지껏 포기하지 않고 석탄으로 변해가는 고기를 뒤집으려 기를 쓴다. 뭐, 10년 안에는 가능한 일이긴 하겠으나... 당장은 어림도 없어 보인다. 불에 한참 달구어진 석쇠는 지옥의 유황 불에 지지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치게 뜨거웠고,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요리용 도구는 아이스크림처럼 주룩 녹아 내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바랠 걸 바래자. 덕분에 부엌은 막 폭발하기 시작한 화산 분화구처럼 온통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서 숨조차 쉬기 어려울 지경이다. 뭘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불이라도 난 모양이라고 단단히 착각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착각? 글세... 솔직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미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저마다 이마를 심각하게 접은 채 집 주변으로 몰려와 있었다. 하나같이 다들 커다란 모래주머니나 물이 가득 들어간 양동이를 끌어안고 있는데 이쪽에서 신호만 보내면 당장 달겨들 기세이다. 긴박감 하나는 끝내줬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부엌 창문을 향해 섣불리 물벼락을 퍼붓는 대신, 신중한 태도로 자신들의 행동을 극적으로 자제한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주춤거리고 있는 이유는 멍청할 정도로 지극히 단순하다.

《어이, 제르가디스. 집에 드디어 불이 난거냐, 아니면 이번에도 리나가 세상 말아 먹을 그놈의 요리라는 걸 하는 거냐?》

설탕이 아닌 눈부신 하얀 소금으로 범벅칠을 한 지옥의 맛 화이트 푸딩을 선물로 받아 먹어본 악몽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집안 분위기부터 정탐하기 시작한다. 며칠 전에도 그녀는 욕조 사이즈의 커다란 냄비 하나로 양송이 스튜를 홀라당 태워 먹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못견디게 매워 죽겠군. 이제 포기하고 제발 그만해, 쿨럭. 마마.》
《콜록콜록,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에잇, 이놈의 고기가 왜 이렇게 철썩 들러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는 거야. 속상해 미치겠네. 하지만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야!! 그나저나 제르가디스? 콜록콜록! 크켁켁!》
《뭐야. 오늘 저녁은 석탄구이라고? 그런 건 이미 잘 알고 있어. 켁켁!》
《아니. 그게 아니라... 가우리가 없다 싶으면 날 마마라고 부르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야?》

시커멓게 그슬리다 못해 드디어 불이 옮겨 붙은 고깃덩이를 노려보다 말고 그녀는 이를 악문 채 그렇게 말했었다.

《그럼 날 제르가디스 오라버니라고 부를 테냐? 나의 귀여운 누이여.》
《크아악! 그래, 내 아들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래, 내 아들아!》

우리가 피를 나는 한 가족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나는 그렇게까지 불안해 하고 그러지 않았을 텐데. 내가 당신의 아이라면... 나는 버림받지 않았을 거야. 생판 남인 남자를 아빠라 하고 생판 남인 여자를 엄마로 하고 다시 태어났다면... 그러면 나는 가우리와 함께 한 침대에서 잠든 너를 봐도 그저 행복해 할 수 있었겠지. 얼마나 좋아?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고,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고...

외롭다.

《이봐, 가우리가 배반하면 넌 어떻게 할 거야?》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앉았냐?! 당연히 죽여버려야지!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면 난 리나 인버스가 아니야.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헤에, 무서운데. 그러면 내가 널 배반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때려줄테다.》

단호하면서도 어딘지 묘하게 시큰둥한 대답. 알고 있어, 리나?
실망했었다. 나는 차라리 너에게 살해당하고 싶었다. 그러나 넌 결코 나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칼을 들이댔지...

리나는 말했다.
《응.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하지만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한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가우리도 내게 말했어.
《리나가 열 아홉이 되면 그녀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려고 해. 뭐, 그 전에 아기가 생기면 일정은 더 빨라지겠지만... 핫핫핫. 이래뵈도 나 잘 참고 있거든. 저, 저기. 제르가디스? 왜 가만히 있어? 축하해 주지 않을 거야? 응? 이봐, 뭐라고 말 좀 해줘.》
《축하받고 싶어?》
《응!》
가우리는 웃었다. 일말의 불안감을 가득 담고서... 그는 웃었다.
《제로스는 뭐래? 그놈도 축하한다고 말해줬어?》
《그거야 당연하지!》
《헤에∼!! 정말? 생각 밖이군. 그래, 놈이 뭐라고 그랬어?》
《자기는 마족이래.》
《뭐... 뭐야, 그, 그거. 그게 전부야?》
《응! 그러니까 너도 제로스처럼 우릴 축하해줄 거지?》
미안하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절실하게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후우... 나는 키메라야.》
인간의 감정이라는 거... 그러니까 난 무시할 거다.
《응! 고마워!》
가우리는 웃었다. 무척이나 행복하다며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모르겠다. 외롭다고 느끼는 건 어디까지나 고약스런 환상이 아닐까... 착각이라구.
내가 지금 떨고 있는 건 단순히 추워서 그런 것 뿐이다. 모닥불에 몸을 녹이면 이 기분 나쁜 떨림도 다 사라질 거야. 금방 괜찮아질 거야... 분명 그럴 거야. 흉하게 인상 찌푸리지 마. 난 그저 추워서 그런 것뿐이야... 그래. 그렇지?

지금처럼 모닥불 하나 피워놓고 혼자 앉아 있노라면 졸음에 겨운 나머지 하품 하느라 정신이 없던 그녀의 옆모습이 자동적으로 생각난다. 약간은 부어 오른 눈꺼풀에 장난꾸러기 모래 요정이 밤새 뿌려놓은 잠 오는 마법의 가루가 잔뜩 묻어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부비며 가루를 힘겹게 털어내곤 한다.

《우아아암. 정신이 하나도 없다. 우이!》
《리나? 졸리면 더 자도록 해. 내가 깨어서 옆에 있어줄 테니까.》
《우우, 아냐. 교대해야지. 너도 자야 할 것 아니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어깨에 기대어 꾸벅꾸벅 잘만 졸던 아이. 곤히 잠든 가우리가 엉덩이를 벅벅 긁는 소리에 맞추어 리나의 고개가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밤은 깊어가고 나는 한줌의 체온을 구걸하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건 아주 오래 전 이야기.

타오르는 모닥불 위로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던지다 말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또 혼자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
마마는 나를 버렸다.

《제르가디스? 내가 너의 가족이 되어주지. 그러니까 쓸쓸해 하지 마. 응?》

...... 거짓말쟁이. 마마,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여자야.

훗, 너에 대한 나의 감정? 걱정하지 말아. 원망따윈 눈꼽만큼도 없거든.
이건 어디까지나 사실이야.
난 그저 당신이 죽어서도 천국에 가지 못하도록 매일 밤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어. 귀신이 되어도 좋고 망자가 되어도 좋으니까 이곳에 남아주길 원할 뿐이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 리나 인버스.
원망따윈 없다. 나는 이미 모든 걸 다 잊어버렸다... 이건 사실이다.


PS: 오래 전에 1인칭으로 써본 걸 손봤습니다. 해적판으로 가지고 있는 코우가 윤의 [겐지] 8권을 보다 즉흥으로 룰루랄라∼♬ 끄적인 놈인데 프랜드 녀석이 이걸 읽고 말하길, [신파잖아!] 라고 딱 잘라 말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