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Kiryu Misao의 그림 동화

왕자 제로스는 올해 열 여섯이었지만 여자를 싫어했다.
특히 왕자는 자기와 같은 귀족 계급의 여자들을 끔찍하게 여기곤 하였다. 왕자의 눈에 비친 그들은 허영심에 가득차 예쁜 드레스와 구두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바보들이었다. 머리를 높게 틀어 올려 갖은 장신구로 치장을 하는데 그 무거운 걸 이고 다니느라 하도 고생을 한 나머지 허리 병으로 고생한다는 사실이 역겹기만 했다. 최신 유행에 목을 매달고 분가루를 덕지덕지 얼굴에 처 발라 피부병을 자처하고... 머리가 욱씬거리도록 향수를 뿌려대는 것도 불만이었다. 제로스 왕자가 보기에 귀족 여식들의 행동거지는 그저 못 마땅할 뿐이었다.

왕비 제라스는 아들이 어서 결혼하여 떡두꺼비 같은 손주를 어서 안겨주었으면 하고 내심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왕자의 그런 상태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혼기에 접어든 처녀들이 왕궁 밖으로 길다랗게 줄을 섰지만 왕자는 본 척도 하질 않는 것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왕자가 호모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제라스 왕비는 얼마 전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문을 떠올리고는 치를 떨었다. 제로스 왕자가 시종인 제르가디스랑 눈이 맞았다나 어쨌다나.

『아들이여. 그냥 눈 딱 감고 결혼을 해보는 것이다.』
『머리 속은 텅텅 비었으면서 잘난 척이나 하는 여자들은 딱 질색입니다. 사치나 부리면서 남자들에게 아양 떠는 그녀들과 뭐 하러 결혼을 합니까. 정략 결혼은 싫습니다, 어머님.』

제로스 왕자의 고집을 왕비조차 꺽을 수가 없었다. 대가 끊어지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건만 왕자는 산더미처럼 쌓인 혼담을 죄다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만.
왕자가 여자에겐 관심이 없고 남자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바야흐르 청소년기에 접어선 제로스 왕자는 대다수가 그러하듯 여자들의 봉긋한 가슴만 봐도 가슴이 설레곤 하였다. 깔깔대며 웃는 여인네들의 머릿내음에 답답함을 느꼈고, 은밀하게 아리따운 소녀와 키스하는 자신을 상상하기도 하였다. 도서실에서 남 몰래 야한 프랑스 연애소설을 꺼내 읽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했으며, 시녀나 시종들의 은밀한 밀회 장면을 목격하고는 마구 방망이질 하는 심장 (아랫도리가 아니구?) 을 다독거리기에 한바탕 애를 먹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연 일일까.
무도회장에서 잘 생긴 처녀들이 끈질기게 달라붙기만 하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치는 것이었다. 저절로 눈빛은 싸늘해졌고 입술은 한 일자로 꽉 다물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이해 불가능 사태였다.

『세간에서 널 두고 뭐라고 그러는 줄 아느냐, 왕자여. 너의 마음은 얼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어머님. 저도 그러고 싶어 그리 된 것이 아닙니다.』

짜증이 난 왕자는 좋아하는 황금 공을 들고 왕성 뒷뜰로 자리를 피해 버렸다. 연못가에 가서 어린애마냥 황금 공을 튀기는 장난을 하다보면 조금이나마 복잡해진 마음이 가라앉곤 했기 때문에 왕자는 자주 공 놀이를 즐기곤 하였다. 탁탁탁... 손과 바닥 사이를 규칙적으로 오고 가는 공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노라면 침착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왕자는 홀로 깊은 생각에 사로잡혀 기계적으로 공을 만졌다.
드리볼, 드리볼, 탁탁탁.

그런데 이런 저런 생각이 깊었던 모양이다. 아차 하는 사이에 왕자가 던진 공은 손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데굴데굴 굴러 연못에 빠져버렸다. 제로스 왕자는 퍼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번쩍 처들었다. 그러나 황금 공은 이미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보이지도 않았다. 연못은 제법 깊이가 있었다. 함부로 손을 내어 밀거나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로스 왕자는 잠시 뺨을 긁적이며 난처해 했다.

『어이? 뭐가 잘못됐냐?』
누군가 씩씩하게도 말을 걸어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구석진 곳으로 어연 꾀재재한 복장의 어린 소녀가 숨 죽이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커다란 적갈색 눈을 깜빡거리며 히죽 웃는데 이가 새하얗다. 제로스 왕자는 깜짝 놀랐다. 왕궁 안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소녀였다. 가슴이 두근 움직였다.

『저의 황금 공이 연못에 빠졌어요. 굉장히 비싼 물건인데... 황금으로 만든 거예요.』
『오오!! 황금!』
소녀는 그야말로 눈을 번득였다.

남루한 차림새... 게다가 반말투.
왕자는 잠시 긴장했다. 쥐구멍으로 드나드는 좀도둑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던 왕성 근위병의 불평이 새삼 떠올랐다. 팔을 걷어부치며 생글 웃는 빨간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아하니 필링이 딱 왔다. 이 소녀는 좀도둑이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이 있어서는 안될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제로스와 당당히 눈을 마주했다. 제로스가 사람을 불러대며 소동을 피우지 않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는 투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그녀가 씨익 웃었다. 엉겹결에 제로스도 웃고 말았다.

『그 황금 공 나 주라! 연못에 빠졌다며. 내가 건져갈께. 그래도 되지?』
『저어... 그 연못은 꽤 깊어요. 잘못했다간 빠질 거예요.』
『괜찮아, 나 자맥질을 아주 잘 하거든. 오죽하면 사람들이 날 개구리 리나라고 부르겠냐. 팔딱팔딱 뛰기도 잘하고 헤엄도 잘 치니까 개구리 같대.』

리나는 조막만한 가슴을 탕탕 두둘기며 으스댔다.
왕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막무가내였다.

마침내 제로스 왕자가 말릴 틈새도 없이 개구리 리나는 연못에 발을 집어 넣었다. 물은 깊어서 아이의 목덜미 위까지 금새 차올랐다. 그래도 리나는 겁 먹지 않고 재주껏 다리를 움직여 진흙 투성이의 연못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돌아다녔다. 날씨도 추웠건만 네 발로 물을 저으며 황금 공을 찾았다.

노력은 헛되지 않아 그로부터 약 15분 후에 리나는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공을 머리 위로 들어 보이며 힘차게 만세를 불렀다.
더러워진다는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씩씩하다.
제로스는 그만 뻑 갔다.

『왓핫핫핫, 찾았다아아아!! 이젠 내 꺼다!』
『수고하셨습니다.』

제로스 왕자는 심술궂게도 개구리 리나가 들어올린 황금 공을 잽싸게 가로챘다. 리나가 앙칼지게 비명을 질러댔지만 왕자는 즉시 그곳을 떠났다.
『야!! 기다렷, 이 사기꾼아아아아!!』
『억울하면 정식으로 날 찾으러 와요, 그 배짱으로 무얼 못 하겠어요?』
뉘앙스가 묘한 말을 던지고 왕자는 사라졌다.

다음날, 왕자가 성 안의 넓은 식당에서 왕과 왕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시종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이렇게 보고를 올렸다.
『왕자님께 손님 한 분이 오셨습니다. 행색이 초라해서 내쫓아 버리려고 하였지만 제로스님께서 손수 자길 찾아오라고 말씀하셨다기에... 어떻게 할까요?』
『야아, 진짜 왔구나! 생각보다 좀 늦었지만 말이야.』

제로스 왕자는 스푼을 탁 내려놓고는 두말 없이 달려나갔다. 그때 왕비는 생전 처음으로 화사하게 웃는 왕자의 옆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영문을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제로스 왕자는 키득키득 웃음을 참아가며 응접실로 서둘러 향했다.

『이 나쁜 놈아아아!! 내가 못올 줄 알았냐아아아!!』
죽으려고 환장한 것이 맞았다. 다짜고짜 욕설이라니? 다행히 제로스 왕자가 너그럽게 용서를 했기에 망정이었지 자칫했다면 곤장질을 당했을 거다.
뭐, 어쨌거나 왕자는 침착하게 분노에 가득차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녀를 향하여 좀 진정하라는 제스츄어를 취해 보였다.

『리나, 난 황금 공을 연못에서 건져내면 가져도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가져도 된다고 그랬잖아.』
『그런 적 없어요.』
『치사하게... 정말...!!』
『하지만 리나? 나랑 같이 놀아주면 황금 공을 선물로 기꺼이 드리도록 하지요.』

리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정확히 3초 뒤에는 새빨갛게 익어버렸다. 마지막으로 1초 후에는 하얗게 바래져서 손가락으로 무릎을 쥐어 뜯기 시작했다.
왕자는 당황해하는 리나를 의자에 앉혀놓고는 시종장을 향하여 딸랑딸랑 종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 즉시 주방으로부터 아름다운 그릇에 푸짐한 음식들이 담겨져서 식탁으로 옮겨졌다. 굴을 섞은 닭고기 요리와 쇠고기 요리, 엉겅퀴 초무침 등 그야말로 호화판이었다. (이런 게 맛있는 건지는 미야는 잘 모른다. 엉겅퀴 초무침?)
리나는 겁에 질렸다. 숨 넘어가게 맛있을 것 같긴 하다만 어떻게 집어삼켜야 하는 걸 까나... 생전 처음 보는 은제의 포크와 나이프를 손가락으로 슬슬 밀어대며 땀을 비오듯 흘려댔다.

『긴장 푸세요. 음식은 먹으라고 있는 거지 눈으로 보라고 있는 건 아니지요.』
제로스 왕자가 용기를 북돋아 주었는데 무얼 망설이랴, 개구리 아가씨는 순식간에 황금 접시를 비웠다. 밑바닥까지 삭삭 핥았다. 배가 부르니 예민해진 신경도 좀 무뎌지는 듯 하였다. 제로스는 신나라 손뼉을 짝 쳤다. 그러자 시종이 달려와 하얀 크림으로 버무린 과자를 한 접시 내려 놓았다. 생전 설탕 과자라고는 구경조차 해본 역사가 없던 리나는 거의 혼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번에는 왕자가 손뼉을 두 번 짝짝 쳤다. 신호를 듣고는 어연 종이 상자를 두 손으로 받든 하녀가 달려왔다. 상자 안에는 단아한 디자인의 깨끗한 옷이 한 벌 들어가 있었다. 리나는 얼이 빠졌다.

『이런 게 다 무엇이다야? 와아, 대단해!』
제로스 왕자는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소녀를 처음 만났다. 사소한 것에도 펄쩍 뛰며 어쩔 줄을 몰라해 하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다.
그러나 더욱 마음에 든 것은 값비싼 물건들을 보면서도 한편으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를 경계하는 리나의 태도였다. 처음에는 좀도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애써 외면했다. 거져 준다는 건 받으려 하지 않았고, 나름대로의 철학과 가치관에 따라 [거래] 를 해서 받아내려고 애를 썼다.
이를테면 그녀는 손가락으로 구슬을 이리저리 돌려대는 고난도의 기술을 선보이고는 그 다음에야 과자 열 다섯 개에 손을 가져갔다. 깨끗한 옷을 빌려준 (이건 가지려고는 하지 않았다) 댓가로는 어떻게 하면 멀리까지 침을 뱉을 수 있는지, 그 요령을 왕자에게 열심히 가르쳐 주려고 애를 썼다. 왕비가 보면 기절초풍을 했겠지만, 뒷뜰로 나간 리나는 제로스 왕자의 손목을 붙잡은 채 이와 이를 딱 다물고서 치잇!! 침을 발사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우스꽝스러웠는지.
제로스 왕자는 그야말로 오랜만에 배를 잡고 웃을 수 있었다.

『저기, 왕자? 그런데 내 황금 공...은...?』
시간이 늦어지자 리나는 다소 초조하게 물어왔다.
제로스 왕자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음흉하게 웃었다.
『제 침실에 있는데요. 같이 가지러 갈까요?』
『싫은데...』
『무섭나요?』
『무섭긴 뭐가?! 가자! 가면 될 거 아냐.』

개구리 아가씨 리나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내어 밀었다. 왕자는 그 손을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순진댕이 소녀는 그렇게 해서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뭐, 그 다음에는 그렇고 그런 일이 벌어졌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왕자의 침실에서 때아닌 날카로운 비명 (달콤한 신음소리였다는 일부 주장도 있었다) 이 들렸다는 후일담은 나중에 미루고... 제로스 왕자는 그때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강렬한 감각에 후끈 몸이 달아올라 거의 기절 직전까지 내몰렸다. 개구리 아가씨는 인간에게 잡혀 먹히고는 엉엉 울었지만, 다정하게 여기저기를 키스해주던 왕자 제로스의 애무에 그럭저럭 익숙해지고 말았다. 두렵고 부끄러운 일이었어도...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부드럽게 피를 닦아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제로스 왕자의 품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으니까.
(이런 지긋지긋한 표현이라니...;;)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제로스 왕자는 리나를 끌고 왕비에게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어머니, 급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요. 이 여자와 당장 결혼하겠어요.』
『어이! 기다려. 누구 맘대로?』
『맹세하건데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어요.』
『그러니까 누구 맘대로!!』
『시끄러워요, 리나! 내가 싫으면 계속 떠들어요, 하지만 좋으면 가만히 있으세요.』
『.../// (싫다는 얘길 어떻게 하냐!! 간밤에 그렇게 끝내줬으면서)』

왕비 제라스는 왕자가 결혼하겠다는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옆에서 리나가 팔딱팔딱 뛰었지만 어차피 개구리는 그렇게 뛰는 법.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제라스는 이게 웬 떡이냐며 기뻐했다. 왕자의 여성 혐오증이 완전 치유, 드디어 며느리를 맞이하게 되었도다. 자, 방방곡곡 축복의 종을 울려라.
개구리 소녀 리나는 결국 손목을 단단히 붙들려 교회까지 끌려갔고 곧 성대한 결혼식이 행해졌다.

리나는 정확히 10달 뒤에 귀여운 딸을 낳았다.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해방된 왕과 왕비는 지루박 춤을 추어댔고 모두가 제로스 왕자와 개구리 공주 리나의 행복을 기원했다.

그들은 가끔 피 터지게 싸웠지만... 그럭저럭 잘 먹고 잘 살았다.

궈궈궈. 죽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