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실수는 조금씩 저지르고 사는 법이다.
다림질하다가 바지 홀라당 태워 먹고, 국 냄비 데운답시며 화덕에 올려다 놓곤 깡그리 잊어 먹고, 세탁한 손수건 비틀어 짜다가 그냥 두쪽내고... 그게 인간이다.
『맞아.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이지. 나도 노란 비누덩이가 맛있는 신종 치즈인 줄 알고 덥썩 입으로 베어 물었던 기억이 있거들랑. 속이 메슥메슥해서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지. 헤헤헤.』
천연 사이다 김 빼는 해파리 왕자의 자기 넋두리는 한쪽 귀로 흘려보내자. 오늘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가우리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다. 이쯤해서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하고자 한다. 크게 당황하여 물 빠진 갯벌 위로 산책을 나온 꽃게마냥 입으로 하얀 거품을 품고 있는 리나 인버스가 그 주인공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다급한 심정이었다. 진정하고자 애를 썼음에도 팔과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리나는 등 뒤에서 어른거리고 있는 심상찮은 검은 그림자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보았다.
그것은 원망과 저주의 눈초리...
그 말 없는 맹렬한 분노에 제로스는 연신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어멋? 왜 그러세요. 나는 잘못 없어요.』
그렇게 머리카락을 털어대면서도 까만 망토 위로 비듬 하나 떨어지지 않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리나는 그의 법복 위로 왕 비듬이 한아름 떨어졌다는 투로 혐오감을 가득 담아 쏘아봤다.
일단 겸연쩍어하는 제스츄어와 그 얼굴 표정은 서로 매치가 되지 않았음이다. 싱긋 눈웃음치며 - (언제나의 구부러진 새우 눈이라는 점은 신경쓰지 말자) - 입가로 한가닥 즐거움을 품고 있으니 -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정색했다면 그거야말로 지옥이라는 간 무시하자) - 괘씸하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

『이봐, 제로스. 너 지금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냐?! 저게 마.족. 아니랠까봐!』
리나가 또박또박 음절을 끊어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그는 마족 맞았다.
제로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러면 내가 어쩌면 좋겠느냐는 시늉을 해보였다.
무를 추구하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마족에게 있어 딱딱하게 굳은 인간의 시신은 그다지 무섭다거나 징그럽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법이다. 시체? 그게 어때서. 열 받은 리나가 무한 징벌 화이어볼을 이마 한 가운데로 문질러주마 위협과 협박을 가해도 슬퍼하는 척 쇼를 부릴 수가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하기도 싫었고,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다. 오히려 내심 이 상황이 즐거웠다. 저만치 앞으로 해서 대자로 뻗은 흰 옷의 돌덩이 소년이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 나무토막이 벌러덩 누워있는 거랑 느낌도 그리 다르지 않은데.
자고로 정직이 최고다. 제로스는 여느 때처럼 그냥 싱긋 웃었다.

『아이고, 아이고. 여보게... 정말 갔소? 아이고, 아이고.』
별다른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는 제로스와는 달리 리나는 심각했다. 이곳이 초상집도 아니건만 벌써부터 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 자빠져 누운 한 구의 시신을 향해 재빨리 나아갔다.
신이시여. 제르가디스의 뺨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때.처.럼. 피부로 와닿는 감촉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아이고, 아이고. 조심해가며 눈꺼풀을 뒤집어 보았다. 젠장맞을, 눈이 돌아가 흰자만 보인다.
『죽어라 해도 안 죽을 것 같던 녀석이 겨우 돌려 차기 한 방으로 이렇게 어이없게 가다니.』
리나는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콕구멍 속으로 삼켰다.

맙소사.
그녀의 푸념을 귀동냥하던 제로스는 뒷통수로 거대 땀방울을 매달았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겨우」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 엄마 아빠 슈퍼 용가리 돌려차기라는 긴 이름이 달리 붙은게 아니다. 혓바닥을 메롱거리는 그의 면상을 노리던 그 기술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구사하기도 버겁다. 천 년간 갈고 닦은 솜씨로 재주껏 피하고 본 제로스 대신, 엉뚱하게 발길질을 당한 제르가디스가 억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5m 밖으로 휙하니 튕겨져 나간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언젠가 닻 대용품으로도 쓰였던 무거운 바위(?)가 단박에 하늘을 날았는데 그게 겨우 돌려차기 한 방? 때아닌 낙석에 얻어터진 지면이 형편없이 파헤쳐졌는데 겨우? 차라리 지렁이를 가지고 구렁이라 우기도록 하자.

『우길 거다.』
『그래선 범죄예요, 리나님.』

아무튼 리나는 슬펐다. 그게 왜 거기로 날아갔느냔 말이다. 코소보 공습에 나선 나토의 폭격기가 죄 없는 난민들을 향해 사망의 미사일을 날렸다고 죽어라 욕을 퍼부었었는데 막상 그와 비슷한 일을 저지르고 보니 할 말이 궁진해졌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235 사이즈의 발자국 도장이 선명히 찍힌 소년의 가슴팍을 응시했다. 도망가고 싶어진다. 하얀 옷자락에 남겨진 검은 얼룩은 그녀가 저지른 죄의 깊이만큼이나 선명하기 짝이 없었다.

겁 먹은 표정으로 제르가디스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아이고, 아이고. 동네 사람들아, 내가 방금 생으로 키메라를 잡았소.
아직도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접시가 두동강 나는 소리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다. 거대 바위가 갈라지기라도 했나, 그놈의 쩌저적 소리...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러야 할 판국이다.
리나는 흐읍, 숨을 들이마셨다. 대낮에 폭탄주 마신 검사도 아니고 여관방에 기어들어가 몰래 대마초 피운 가수도 아니건만 머리가 끝장으로 욱씬거렸다.
고통 가운데 환청이 들려왔다.
너는 돌을 깼다, 너는 돌을 깼다.

『너 때문이야, 제로스! 그러기에 그냥 맞아주면 좋았잖아! 왜 도망쳤어. 왜 피했냐구! 네가 촐랑대며 이리저리 자꾸 피하니까 이런 대형 사고가 났잖아!』
적반하장도 이만하면 유분수다. 때리려던 사람이 잘못했지 피하려던 마족이 무슨 죄라고? 제로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러든 말든 리나의 푸념은 계속되었다.
죽어도 그녀는 잘못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죄악인 것이다.
『아아, 제르가디스도 나빠. 이 바보. 너는 또 왜 그걸 피하지도 못하고 그냥 맞았니. 아침마다 검술 연습하던 걸 귀찮다고 때려치우기라도 했어, 왜 그리 몸이 둔해졌어. 훌쩍... 이걸 어쩌지. 엉뚱한 걸 잡았네. 들키기 전에 얼른 묻.어.버.릴.까?』

과거 동료였던 소년의 시체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 리나는 진작부터 부시럭대며 사람 파묻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땅 파기 주문을 입안에 품었다. 나무가 많고 그림자가 진 으슥한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훌쩍 지나갈 뿐, 인적이 드문 곳을 서둘러 찾아보자. 대망의 완전범죄를 꿈꾸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시간이 촉박했다. 아무렴, 시체유기는 시간이 승부다.

속으로 제로스는 박장대소했다. 당연히 겉으로도 고소해 죽는다며 마구 웃었다.
『킥킥킥! 어쩌시겠어요? 제르가디스씨. 묻어버리겠다는데요? 아무래도 리나님에게 있어 당신은 그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 모양입니다. 웃핫핫!』
『콜...록. 저걸 그냥...! 콜...록...! 장난치지 마. 뭘 묻어...? 젠장맞을.』

기적적으로 저 혼자 되살아난 시체가 이대로는 못 참겠다며 주먹을 꼭 쥐었다.
그늘진 나무사이로 깔린 부드러운 흙바닥을 주의깊게 관찰하던 리나 인버스에게 일생 일대 절대적 위기가 불어닥쳤음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새파란 안색의 돌덩이 소년은 그야말로 간만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마음껏 웃고 있었고 그 미소는 마족인 제로스가 봐도 자동 살 떨리는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제로스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웃으며 화를 내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인 법이다.
역시나.
리나는 쫄았고, 그곳으로 웃는 미소의 마왕이 강림했다.

『아이, 제르∼♡ 아잉, 아잉! 용서해 줘어어어∼♬』
콧소리를 내며 귀여운 척 아양을 떠는 리나 인버스라, 지나가던 개가 온몸에 털 대신 소름 돋아 죽을 일이었다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나긋나긋하게 입술을 구부리고 가뜩이나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종합평가, 워째 사랑스럽게 보이기는커녕 초특급 공포 스페샬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처량맞은 표정을 하고 낑낑 울어댔다.
『아잉, 아잉~!』
손가락을 빙글 돌려대며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치워진 테이블 위로 동글동글 무늬를 그렸다. 꽈배기처럼 두 다리도 비비 꼬았다. 마왕도 때려 잡은 과거 화려한 전적과는 어울리지 않게 꽤나 초조한 기색이다.

아무래도 상대가 영 만만치가 않다. 차갑게 식힌 녹차를 주문하고 앉은 소년은 풀 죽은 마도사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차가운 표정을 하고 그림조차 걸려있지 않은 흰색의 벽을 죽어라 노려보고만 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얼핏 보았다면 그놈의 벽에 달라붙은 귀신을 상대로 눈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착각할 법도 하다. 아예 어깨를 돌리고 앉아 요지부동. 손바닥을 싹싹 빌며 애원하는 소녀는 있으나마나한 투명한 유리벽이고, 징징대는 소음은 지나가던 바람이 내지르는 나즈막한 휘파람이다.
언제까지고 빌어보라지. 소년은 차갑게 식힌 녹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랬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쩌적 소리는 골렘 깨지는 소리가 아니라 마혈옥 작살나는 사운드였던 거군요? 흐응. 아깝군.』
망가진 보석이 아깝다는 건지, 그게 아니면 제르가디스 뱃가죽이 깨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건지 영 판단이 서지 않는 발언이다. 어쨌거나 자청해서 중재자로 나선 제로스는 손수건을 사용하여 문제의 보석 팬던트를 집어올렸다. 망토를 고정시키는 핀 대용품으로 제르가디스가 애용하던 물건으로 가운데 커다란 마혈옥이 세팅된, 제법 고가인 팬던트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보석을 이리저리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교묘하게 마력을 불어넣은 백금의 둥근 난집 속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보석은 분명 난쟁이 요정족의 기술로 다듬어진 진품이다. 그 투명함과 광채가 황홀하기 그지 없다. 각도를 달리하자 핏빛으로 반짝인다. 예의 소동으로 완벽하게 두쪽이 나지 않았더라면 가까운 나라의 임금님이 성 한 채와 바꾸자고 제안을 했을 법도 하다.
제로스는 흔들림이 거의 없는 고래기름 등불로 팬던트를 더욱 가까이 가져갔다. 이거, 제법 아깝게 되었다. 전문가적 눈썰미로 손상의 복구 가능성을 요리조리 점쳐 보았다. 좁쌀 크기로 일부가 아예 떨어져 나간데다가 한 가운데로 해서 깊게 갈리진 골이 제법 깊다. 흐음. 이래서는 점수를 아무리 후하게 준다 해도... 제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순수 마혈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신의 원래 형체를 복구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어디에서고 흔히 발견되는 재질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장신구로 가공해서 나오면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지나친 자기고집적 성격 탓에 요정족의 귀금속 다루는 기술로도 세팅이 어렵다. 솜씨 좋게 잘 깍아 놓은 마혈옥이 단 하룻밤 지나고 보니 광산에서 막 채굴했을 적의 울퉁불퉁 못난이로 되돌아갔다는 제법 황당한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는 형편이다. 다소 과장된 뉘앙스가 없잖아 있지만, 보석이 품은 마력이 아주 강력하다면 그런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실제로 몇몇의 세공술사들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며 한바탕 전쟁을 치루기도 한다. 오죽하면 최상의 마혈옥 보석을 임금님께 바칠 왕관에 박으려던 세공술사 난쟁이 요정 다섯이 제 성질 못 이기고 돌 깍는 연장으로 그냥 할복했다는 다소 썰렁한 내용의 전설도 등장했을까. 완전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그.러.나.
제로스는 생긋 웃으며 망가진 팬던트를 도로 테이블 아래로 내려다 놓았다. 아무리 자기 복구적 성격이 강한 마혈옥이라 해도 이렇게 두쪽난 이상 별다른 해결책은 없다. 형태를 고정시키는 힘은 원석이 깨져나가는 순간 이미 파괴되었다.
쓰레기통으로 Go~ 가격은 똥값, 망설이지 말고 내다버리는 것만이 상책.

『아이잉, 제르. 미안해. 미안하다고. 제발 그렇게 화 내지 마라. 응?』
『시끄러워.』
무려 3시간하고 40여분간 징징댄 끝에 매몰찬 대답이 돌아왔다.
그 쌀쌀맞음에 리나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
주인에게 혼쭐 난 강아지의 눈빛으로 리나는 제로스를 흘끔 쳐다보았다. 마족의 솜씨로 어떻게 고쳐볼 수는 없느냐는 뜻이리라. 물론 수신관 정도의 마력이라면 개박살난 마혈옥을 원상복구 시키는 일 따위는 식은 죽 먹기와 다름 없다. 그러나 제로스는 귀엽게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있던 리나를 가차없이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애시당초부터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수신관의 본업이었다. 게다가 절망감에 괴로워하는 리나도 보고 싶었다.

봐라, 발 밑이 푹 꺼졌다며 그녀가 처절하게 코를 훌쩍댔다.
『미안... 망가뜨려서. 저걸 위해서라면 나 뭐든지 할테니까...』
모기는 여전히 앵앵 대며 울어댔다.
제르가디스는 짜증이 치솟는 걸 사나이의 집념 하나로 참아 넘겼다.
입안이 썼다. 기분이 나쁘다. 저 뒤에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제발 부탁이니 갚아 달란 말은 하지 말아줘!!》
핫핫핫! 리나는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마혈옥을 원상시키지 못할 바엔 아예 물어내라는 말을 들을까봐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엄청나게 욱씬거리는 뱃가죽을 어루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단위 통증을 호소하는 몸뚱이는 그렇다고 치자. 리나에게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죽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행운의 여신으로부터 키스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어째서일까? 울상을 지으며 눈치를 살살 살피는 그녀가 싫다.
게다가 뭐? 용서만 해준다면 뭐든지 다 하겠다고?
한술 더 떠서 제로스에게 도움을 청하며 풀 죽은 모습을 보이다니.

어릴 적에 마마로부터 받은 귀한 팬던트의 수리 가능성 타진은 일단 두 번째다.
제르가디스는 정색을 하며 리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리나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지 맘에 들지 않는다.
그녀가 긴장이라는 걸 하고 있다.

『상대가 가우리였다면 이렇게 꼬리를 내리고 나오진 않았겠지. 그렇지?』
『어?』
리나는 당황했다. 그건 뚱딴지 감자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뭐든지 하겠다는 식의 그 말투! 상대가 제로스라면 넌 그런 말 안 해! 없었던 일로 하자며 딴청을 부렸겠지. 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참에 말해두지만 난 사람 차별하는 네가 싫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리나는 눈꺼풀을 연신 깜빡거렸다. 도대체가? 그녀는 놀랐다. 이건 날벼락 치는 구름 속으로 햇님이 방긋 웃는 소리였다. 아니, 햇님이 미소 짓는 가운데 토네이도가 지상을 휩쓰는 소리다. 솔직히 그가 화를 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화를 내는 방향이 영 이상하다.
차별이라니?

흥분한 나머지 귀신처럼 얼굴을 붉힌 소년 앞에서 리나는 어깨를 움추렸다.
콰앙.
제르가디스가 앉은 자세 그대로 맞은편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식당 내부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 대다수가 숨을 멈춘 채 그들을 주목했다.
모두의 이목을 받아가며 소년은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너란 아이는 항상 날 힘들어 하곤 해. 나는 그게 엄청나게 짜증이 난단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 힘 들어 한다니 그건 무슨 뜻? 난 그저 미안해서... 귀한 물건을 망가뜨렸잖아. 난 나름대로 보상이라는 걸 해주고 싶을 따름이었어. 제발 그만해. 나에게 그런 식으로 화내지 말아. 영문을 모르겠네. 도대체 왜 그러니?』

리나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반문했다.
그녀는 모른다.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제르가디스는 뾰족한 엘프의 귀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보상.
리나는 항상 그에게 보상이라는 걸 해주고 싶어한다. 그의 단 하나뿐인 가족인 레죠 할아범을 죽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그 앞에서 당당해지지 못한다. 항상 근심해주고 걱정해주고... 동료로서가 아니다. 그녀는 보상을 해주고 있다. 미워했든 안 했든 일단은 피를 나눈 가족이었다. 그런 레죠를 헤쳤다는 작은 티끌 하나가 제르가디스에 대한 리나의 태도를 크게 뒤흔들어 놓는다. 그 앞에서 그녀는 조심스러워한다. 실수하려 하지 않는다. 가우리에게는 기꺼이 보호받으려 하지만 제르가디스에겐 되려 지켜주는 여신이 되고자 기를 쓴다. 제로스는 맘 놓고 두둘겨 패는 주제에 그에게는 가급적 예의바르게 행동하며 짐짓 거리를 둔다. 등짝을 후려갈겨도 뭔가 조심스럽고 어쩌다 실수해도 죽어라 사과한다. 맘에 안 든다.

너는 날 책임지려 하는데... 불쾌해.
제르가디스는 목소리를 착 내리깔았다.
『대답해 줘.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거냐. 응? 리나 인버스.』
『동료지.』
『동료였어? 정말로 넌 나를 동료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봐? 거기서 반문하면 나더러 어쩌라고...』
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해가 가질 않아. 무얼 말하고 싶은 거야? 제르가디스.』

리나는 자신이 감정적으로 둔해 터졌음을 실감했다. 그가 망가진 팬던트 때문에 벌컥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겠다. 하지만 그 이상은 이해 불가능이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급한 김에 제로스를 향해 긴급 SOS 신호를 보냈다.

『어딜 보는 거냐!』
그 즉각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다. 손가락을 꼬물거리고 있는 제로스를 향해 눈길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제르가디스는 테이블을 발로 걷어찬 것이다.
물컵이 뒤로 날아갔고, 벽으로 튕겨진 그릇이 박살났다. 제로스는 의자 채 뒤로 물러섰다. 미처 피하지 못한 리나는 뒤집어진 물컵을 고스란히 뒤집어 썼다.
누군가 수저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가는 가운데 물벼락을 얻어맞은 리나는 어이가 없다며 입만 벌렸을 뿐이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은청색의 눈동자가 공격적으로 그녀를 향해 퍼부어지고 있었다.
그건 살기였다.

『뭐든지 하겠다고? 좋아.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사과하지 마. 당당하게 나오라구. 네 성격 어디로 가냐? 빌빌대지 말고 그냥 뻔뻔하게 나와.《제르, 이 여왕마마께서 손수 어깨 안마라는 걸 해줄테니 그냥 용서해라∼♡ 안 그러면 알지?》넌 이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알겠어?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몰랐어!! 네가 원하는 그게 어깨 안마였어?』
그의 말을 싹뚝 자르며 리나가 에그마니 소리질렀다.

기우뚱.
이게 뭐냐.

핀트가 엉뚱한 곳으로 어긋났다. 뱃속에 깊숙이 감추어 둔 이야기를 귀신 들린 것처럼 퍼부어대던 제르가디스는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1초, 2초, 3초. 그대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리나는 가슴으로 두 손을 꼬옥 모으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쓰디 쓴 녹차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커다란 금색의 귀걸이로 할 말을 잊어버린 귀 큰 소년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작은 물방울이 턱선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들은 침묵했다.
또옥... 다시 한 방울의 물방울이 떨어졌다.

귀걸이에 반사된 소년의 형상이 서서히 확대되었다. 리나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마침내 소년의 입술이 녹차로 얼룩진 소녀의 창백한 뺨에 닿았다. 느껴지는 맛은 떫고도 쓰다. 머뭇거리듯 살짝 피부를 눌러대던 입술은 이내 아쉬움을 남기며 원래대로 멀어져 갔다.

그것은 찰나의 기적. 그리고 마법...
도로 눈을 뜬 소녀가 입술의 주인을 응시했다.
『그렇게 화 내지 말아. 응? 내가 안마해줄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항복이었다. 백기를 흔들자. 더 이상 무어라 하겠는가.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끄떡이며 아주 천천히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어 앙증맞은 손가락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죽어라 기분 나빠하는 수신관도, 망가진 테이블과 깨진 컵을 변상하라며 잔소리하는 식당 주인도 그 순간만큼은 존재가 지워졌다.
소녀와 소년이 살고 있는 울타리는 장난감 고무공처럼 작게 축소되었다.

토닥토닥...
규칙적으로 돌덩이를 두둘기는 소리가 애잔하다.
제르가디스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걸 애써 참으며 잔뜩 굳어버린 몸을 추스려 필사적으로 긴장을 풀었다.
마마. 그만의 마마. 연하의 마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손 댈 수 없는 여자.

하고 싶은 말은 태산이었다.
그러나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퉁명스러웠다.

『힘줘서 꽉꽉 주물러. 꽉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