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도록 어두운 검정색의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우아한 밤의 여왕이 기다란 치맛자락을 이끌며 하늘로부터 땅 끝까지 방황했다. 보기 좋게 부풀어오른 달이 하늘 꼭대기에 걸렸지만 시샘쟁이 구름의 어깨짓으로 그 따스함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의 정령이 차갑게 날개짓을 하며 언덕 너머로 달아났다. 밤의 여왕은 검푸른 머리카락을 드리워 아이들의 꿈을 낚시질했다. 당겨져 끌려올려진 꿈들이 반짝이며 빛을 발한다. 그렇게 해서 밤하늘은 수만가지 별로 가득찼다. 쏴아아... 풀들이 잠꼬대를 중얼거린다. 나무들도 잔가지를 흔들어대며 잠시 몸을 뒤척였다. 고요하고도 어둡다. 세상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그래서 짜증스럽다.

제로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상체를 서서히 아래로 기울였다. 따스한 호흡이 뺨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규칙적으로 피부를 간질이다가 이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찰나의 간질임이 너무나 애뜻해서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자의 콧김이 그를 유혹한다. 빨아들인다, 잡아당긴다. 향긋한 포푸리 비누의 내음까지 섞여져 머리를 국자로 휘저어 버린다.
신경이 죄다 곤두서는 기분이다. 인간 여자의 체취가 고약한 독약처럼 머리를 마비시켰다.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제로스의 얼굴엔 표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면으로 만든 베개 위로 리나의 뺨이 깊숙이 파묻혔다.
무얼 꿈 꾸는 걸까. 저 너머의 세계에서 무얼 보고 있는 걸까.
입술이 옴짝달짝 움직이며 정확하지 않은 가녀린 음절을 흘려보냈다. 조금은 불만스럽다며 눈썹을 찡그렸다. 꼴깍, 침을 삼키는 동작이 귀엽다.

제로스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이불 끝 자락을 붙잡았다. 섬세하게 자세를 바로잡고 잠에 빠져든 공주님의 통통한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부비듯 누르며 맛을 보았다. 매끄러운 감촉... 언제나의 따스함.
갑작스런 간질임에 리나가 몸을 뒤척였다. 제로스는 가만히 숨을 죽이며 돌연 긴장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숨소리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깨어나지 않는다.
속이 상한 제로스는 이불자락을 죽어라 꽈악 움켜잡았다.

- 어째서? 왜 깨어나질 않는 건가요?

흘러간 과거라고 표현하기엔 다소 어색한 지난 날, 강아지풀을 가지고 손장난을 하던 제르가디스는 지나가는 투로 리나에게 한가지 질문을 했다.
교묘하게 그 속마음을 밀봉하고 별 중요하지 않다는 투로 소년은 입을 열었다.
《넌 이젠 제로스가 가까이 와도 그다지 주의하고 그러지 않더라? 예전엔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더니만 지금은 어디서 돌이 굴러왔냐... 이러고.》
《뭐, 아무래도 익숙해진다는 건 이런 것이겠지? 제르가디스.》
《위험하잖아, 리나. 그래도 엄연히 마족인데. 그것도 고위의... 방심하고 있다 가 널 죽이려고 덤벼들면 어쩌려고.》
그때 리나는 헤헤헤 웃으며 평정심을 가장한 제르가디스의 어깨를 쳤다.
《괜찮아, 괜찮아. 녀석이 날 죽이려고 맘을 먹는다고 해도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문제니까. 제로스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와서 내 목을 잘라버리거나 그러진 않을 거야. 척 하고 한눈에 봐도 녀석은 암살자 스타일이 아니잖아? 적어도 사람 뒷통수를 휘갈길 마족은 아니라는 거지. 그런 면에서 항상 긴장하고 있을 필요는 없어용, 제르가디스. 녀석은 아마「명령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모월 며칠까지 리나님을 죽여야만 하겠는데요. 핫핫핫. 어쩌죠? 일단은 멀리 도망치실래요?」라고 쫑알대며 이쪽의 반응을 철저하게 즐기겠지. 어떻게 보면 그편이 훨씬 더 지독하긴 하지. 그래도 어쩌겠어. 그게 제로스인데. 그러니까 제르? 그렇게 무서운 표정은 하지 말고 날 위해 환하게 웃어줘.》

제로스의 눈썹이 뒤틀렸다.
물론 그럴 것이다. 제로스는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그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장난을 즐길 것이다. 한 번에 숨통을 끊어버리는 아까운 짓은 하지 않는다. 도망치고 발버둥치고 아파하는 모습을 기꺼이 다 볼 것이다. 참기 어려운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모습을 만끽할 것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재주껏 솜씨를 부려가며 그녀를 희롱하다 연약한 그 심장에 바람 구멍을 낼 것이다.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 아마도. 역시.

소녀의 뺨을 간질이는 제로스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속이 뒤틀린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리라.
마족이 침대 맡에 나타난 건 둘째치고 남자가 눈빛을 음울하게 하고 바로 코앞에 섰는데도...
이 신경질쟁이 아가씨는 놀랍도록 반응이 전무했다.

《믿고 있는 거예요? 나를? 지금은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그것은 충격.
《대답해줘요. 너무나도 평온한 당신... 나를 남자로도 보지 않고 있는 건가요?》
그것은 실망.

제로스는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이대로 당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으면 가우리씨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뇌가 녹아내리도록 아마도 울겠지.
『이대로 당신 옷을 벗기고 억지로 당신을 겁탈한다면 제르가디스님의 반응은 어떨까.』
증오에 가득차 날 죽인답시며 기를 쓰고 덤벼들겠지.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짜증스러웠고... 조금은 흥분되었다.
세상 모르고 잠으로 빠져든 소녀는 이미 그의 손 안에 착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손바닥을 안으로 살짝 구부리는 것만으로도 리나의 운명은 크게 달라질 터였다.
송두리채 거머쥐었다는 묘한 포만감이 제로스를 기쁘게 하였다.
이대로... 이대로... 손만 접으면.

제로스는 자기 자신을 향해 말을 걸었다.
《넌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거니? 어떻게 하고 싶어?》
손에 땀이 고이는 듯한 기분이다. 허옇게 변한 가슴 한 자락으로 휑한 바람이 느껴졌다. 머리를 뚫고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줄이 너무도 아팠다. 견디기 힘들만큼 뾰족하게 다듬어진 그것들이 사각사각 갉아댔다.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잔념들... 눈물이라는 걸 모르는 몸으로 통곡을 하고 싶어졌다.
『나를... 부탁이야. 이런 건 싫어. 일어나요. 깨어나요. 난 못된 마족이란 말이야.』

깨어나지 않는 공주님의 얼굴을 살짝 끌어당겨 그 추악한 손으로 품으며 제로스는 울상을 지었다.
당신의 태평스러움이 원망스럽다.
늑대의 숨결엔 잠자는 공주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 입술이 왕자의 것과는 달리 차가워서일까, 소녀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한층 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밤의 여왕이 느린 발걸음으로 뒷산을 밟고 넘어가는 와중에... 그렇게 해서 때아닌 자기 혐오에 빠져버린 늑대는 씩씩거리는 호흡을 억지로 삼켰다.

공주는 여전히 꿈 나라 여행 중.
밤의 여왕은 리나의 꿈도 낚시질해서 건져 올렸다.
언덕으로 아우, 하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달려간다.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하늘 위로 새하얀 별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