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도 제목 없슈~의 글은 있었던 거야. 와하하하~!!※


딜 왕국 - 지역에 따라 디루스, 또는 딜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운다 - 에 마도서 많은 건 코흘리개 어린애도 다 아는 사실이다. 마도사들의 필독서라고 여겨지는 오라클라 합본지체의 원본, 무려 천 백년 전에나 씌여졌다는 그 세계 최고의 고문서도 바로 이곳에서 구경할 수 있다. 이 나라의 제일 국보이자 왕권의 상징이 바로 오라클라 합본지체다. 뿐만 아니라 저 위대한 앙기스 부로드가 저술한 마법사와 그 모자, 소포자 소르더의 마도 입문, 화더클리프의 정수체 도해서 등등의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책들이 거의 원 모습 그대로 고이 모셔져 있다.
그런 이유로 이 나라에서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아무나 붙잡고 늘어지면 세명 중 하나가 마도사, 또는 마도사 지망생이다. 이들은 오라클라 합본지체의 그 표지만 만져보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노라 입을 모으곤 한다. 그런다고 마력이 증가하는 건 아니지만 이것은 일종의 신앙이었다. 고색찬란하다, 책들이여. 딜 왕국은 일종의 성지 순례 코스나 다름이 없다. 마도사들 중에서 딜 왕국의 흙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관하다.

『와아- 리나도 와본 적 있어?』
『당연하지.』
리나도 이 나라 도서관 사서의 도장을 손바닥에 찍은 경험이 있다. 처음으로 딜 왕국을 방문했던 것은 여덟 살쯤 되었을 무렵... 언니 뒤를 졸졸 따라서 출입 제한 구역으로까지 들어갔다가 뭣 모르고 귀한 사본에 연필로 낙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엉덩이를 걷어차인 고운 추억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엑?! 남의 나라 보물에 낙서를 했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구. 옛날 일이라니까, 옛날 일.』
리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쨌거나 풍요 속의 빈곤이라잖아? 제대로 된게 있으려니 생각하면 안될 걸.』

제르가디스가 워낙 졸라대서 같이 오기는 했다.
그러나 초반부터 리나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궤짝으로 널리고 널린 것들이 희귀본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재산적 가치가 높다고 지적 가치마저 높을 거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마도 또한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법이다. 저 밖으로 우주 기지를 세우는 시대가 왔음에「갈릴레이라는 작가가 말하길,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건 개나 소나 웃을 소리다. 우주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지구가 맞다」라고 쓰여진 백과사전은 재활용품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천 년 전에나 작성된 내용이다. 그런게 과연 도움이 될까나? 리나는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그럴 리 없지」라는 자신의 뜻을 부드럽게 피력했다.

이에 가우리가 질문했다.
『하지만 제르가디스가 말하길, 온돌이 짚신이라던데?』
『온돌이 짚신짝 같은 소리! 온고지신 溫故知新 이겠지, 가우리. 옛 것을 앎으로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껏이어야지. 제르가디스는 헛다리 짚은 거야.』
거기다 리나가 영 시원찮게 여기는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다.
『리나님! 우리 놀러 가요. 이 동네엔 볼 거리가 제법 많다고요. 그동안 서너 번 와봤었는데 그때마다 재미있는 거 아주 많이 봤어요. 원숭이 놀이터라는 곳에 가면 긴 꼬리 원숭이들이 바나나 집어먹는 거 구경할 수도 있고요, 프리다 광장에 가면 인형극단 공연도 볼 수 있어요. 거기선 아이스크림도 파는데 말예요, 말만 잘 하면 초코렛 시럽을 공짜로 얹어준답니다. 나, 그거 아주 좋아해요!』
들었나. 이곳에 서너 번이나 와봤단다. 고로 이 동네 도서관 상황은 꽝이다.
리나는 저 혼자 좋아 죽는다 팔짝 뛰느라 바쁜 철부지 신관을 지긋이 노려봤다. 아이스크림 하나 달랑 먹겠다고 딜 왕국으로 여행을 올 제로스가 아니다. 촐랑대는 마족이라지만 임무를 잊고 사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는 자신의 할 일에 충실한 중간 관리였다. 어쩌면 그 옛날에 리나가 한 구석으로 낙서했던 클레어 바이블의 사본도 지금은 재로 돌아가 있을 확률은 그래서 꽤 높았다.

『리나님~ 우리 밖에 나가 놀아요~ 네?』
『넌 나쁜 놈이야, 제로스.』
『맞아요, 나는 나쁜 놈이예요. 그러니까 인형극이나 보러 같이 가요~ 네?』
어깨나 으쓱.
어차피 당분간 제르가디스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책더미에 파묻혀 코빼기 구경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 남자를 내일이면 돌아올까, 글피면 나타날까 무작정 기다리는 건 체질에도 맞지 않았다. 여관방에 죽치고 앉아 침침한 표정으로 밥이나 먹고 있으라고? 여든 살 먹은 꼬부랑 노파가 되지 않은 이상 어림도 없다.
리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벗어두었던 망토를 다시 어깨 위로 걸쳤다. 이런 때야 말로 신나게 돌아다니며 노는 것이 최고다.

『베케이션이다!』
『베케이션? 그럼 나는 카네이션!』
『으음... 그렇다면 나는 베이비 로션~♡ 괜찮죠? 리나님.』
저마다 쓸데없는 말을 외치며 가방이니 외투니 하는 것들을 챙겼다. 목적지는 딱히 이거다 하고 정해놓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거리로 나가보면 여행객들을 손짓하며 부르는 것들은 천지에 널렸다. 어느 가게의 요리가 맛있을까 상상하며 메뉴판만 감상해도 반나절을 후딱 지나간다. 아아, 프랑크 소시지를 바짝 구워서 빵에 끼우고, 생 굴 샐러드에 마늘 겨자를 살짝 곁들여 입맛을 돋군다. 연한 살코기 구이로 본격적으로 배를 채우고 나면 그 다음으로는 딸기를 넣은 크레이프로 입가심을...
먹는 것에 얼마나 정신이 팔렸던지 덕분에 리나는 제르가디스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때문에 해가 저물고 한참이 지나 여관으로 돌아와 방문 손잡이를 돌렸을 적에 생각지도 않은 사람 그림자가 방안에 자리를 하고 있는 걸 발견한 리나는 아이구 깜짝이야 놀라 펄쩍 뛰었다.
적어도 사흘은 소식두절이겠거니 여겼는데 이게 웬 걸. 지나치게 빨리 왔다.
『답지 않네. 벌써 돌아온 거야, 제르가디스?』
도깨비불을 배경으로 깔았다. 동동동동- 정글을 울리는 건 식인종의 북소리다.
음침한 표정으로 풀 죽어 앉아있던 키메라 소년은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표정이 영 좋지가 않구먼.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
이번에는 좌우로 도리도리.
『밥은 먹었고?』
끄덕끄덕.
『왜 그러고 있어, 피곤해서 그래?』
묵묵부답.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가 이리 음침해. 누가 보면 영매사가 저승에서 애기 귀신 불러낸다 하겠구먼.』

영문을 모르니 답답하다. 리나는 머리통을 긁어댔다.
눈치는 있다. 가우리가 편치 않은 표정으로 리나를 손가락으로 꾹꾹 찔렀다. 가까이 가서 이마를 만져보기라도 하라는 것이다.
하는 수 없지.
『제르가디스?』
기름진 식사로 통통하게 잘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슬그머니 옷자락 아래로 숨기고 조심스럽게 동료 옆으로 다가갔다.
『헬로우?』
어른들은 말하길, 실수로 옆집 장독대를 깨뜨려 엄마에게 빗자루로 얻어맞은 개구쟁이가 바로 저런 식의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시무룩하고 기운이 없어 보인다. 시험 삼아 어깨를 툭툭 건드려 보았는데 반응이 없다. 제르가디스의 고개는 계속해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검은 오라만 뭉게뭉게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간질 간질 간질!』
이에 리나는 손가락을 들어 나 죽었소 하고 앉은 소년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간질였다.
『으헛헛헛~ 으헛헛헛~ 아니되오~ 제발! 으헛헛헛~!!』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다들 공포에 질려 벽쪽으로 철썩 달라붙었음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뭘 잘못 먹었냐?!』
리나는 팔을 교차시켜 십자가를 만들어 보였다.
『징그러! 웃음 소리가 왜 그래!』
가우리는 아예 등 돌리고 서서 도망갈 준비를 갖췄다.
『지금 고전 100선 다시 보기를 하는 건가요?』
제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를 질러댔다.
『모두들 그러지 마오. 나라고 이러고 싶어 이러는 줄 아시오?!』
제르가디스는 무릎으로 얼굴을 파묻고 드디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뭐시냐... 일종의 고약한 저주를 받은 거 같다는 거야?』
『추측하자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소저.』
『심각한데.』

듣자하니 사고는 제법 일찍 터졌던 것 같다. 제르가디스의 말로는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열람실로 몰래 들어가 (자물쇠 따기는 그의 특기 중 하나이다) 그중에서 제일 수상쩍어 보이는 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는 것이다. 검은 가죽에 금박, 두툼한 두께...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손이 가더랜다.
그렇게 해서 직원들 눈을 피해 낱장을 펼친 것까지는 다 좋았는데...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지면서 매운 재채기가 한 번 터졌단다.
- 에취!
먼지 때문이겠거니 생각한 그는 얼른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재빨리 뒤돌아 달아날 채비를 갖췄다.
그러다가 아뿔싸. 바닥으로 떨어뜨린 책의 제목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몸속의 피가 발 아래로 싸악 내려가고야 말았다. 절망감의 무게로 목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제목이 얼마나 끔찍했는데?』
『강제교화 언행습독.』
제르가디스는 쩔쩔매다 못해 아예 책상 위로 머리를 처박았다.

『그게 뭔데요?』
제로스의 이 순박한 질문에 리나가 대신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200년 전에 살았던 예절 학자가 마도 연구를 하면서 집필한 마법 주문서야. 쉽게 말하자면 무작위로 주술을 걸어 강제적으로 그 행동을 구속하지. 책을 만지거나, 읽거나, 펼치거나... 단순한 행동거지 하나로 주술은 완성돼. 저술자는 예절학 전공자야. 따라서 그가 원한 건 자신의 책과 그 힘으로 인해 무식깽이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교양 있는 화술을 사용하게 만들자는 거였어. 어시장 생선가게 아저씨가 하루 아침에 왕실 집사의 말투를 사용하게끔 말이지. 200년 전의... 교양인의 방식대로 말이야.』
『소저의 설명 그대로요, 제로스 사제. 일이 바로 그렇게 된 거라오.』
『듣기 민망하니까... 제르가디스? 넌 당분간 입 다물고 있으렴.』

일이 참으로 난감하게 되었다. 리나는 부지런히 뺨을 긁어댔다. 사실 이런 종류의 마법은 저주가 아니다. 강제교화 언행습독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마술이다. 따라서 저주를 푸는 백마법의 치료술로는 근본적 치유는 불가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이오! 이것은 분명 저주가 맞소! 리나 소저.』
『오늘날에는 그렇지만 200년 전에는 아니었다구, 제르가디스.』
몸에 고통을 주는 저주였다면 무녀의 정화 기도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쯧쯧.
근본적으로 저주가 아니기 때문에 주술을 푸는 방법도 다르게 접근해야만 한다. 비타민 영양제를 주사맞은 사람에게 해독약 처방은 아무 효과가 없는 법이다. 비슷한 이치다.

『여하간 이런 식의 마법은 본래 오래 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아시잖아요?』
제로스는 별 대수롭지 않다며 가볍게 실소했다. 죽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말투가 좀 괴상하게 변했긴 하다만서도... 그런다고 사람이 달라 보이진 않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파란 빛이었고, 듬성듬성 돌이 박혔다. 머리카락도 여전히 쇠비늘이다. 멀쩡해 보이는데 큰일 났다며 소동을 벌릴 까닭이 과연 있을까? 게다가 가만히 냅두고 기다리면 얌전히 그 효과는 무로 돌아간다. 인간들이 구사하는 모든 마법은 한시적이다. 그들의 생명 자체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영원에 가깝도록 영향을 발휘하는 마법은 영원한 존재에게서나 가능하다. 그렇지 못한 인간이 퍼붓는 마법이라는 것은 따로 유통 기한이 있는 법이다. 목숨을 걸고 완성한다는 집요한 저주도 아무리 길어봤자 90년을 넘지 못한다. 사람 좋아지라고 거는 축복의 마법이면 그 생명력은 최대 3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희게 탈색된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회춘법이라던가, 머리를 맑게 해주는 똘똘이 주술 같은 건 단 하루도 버티질 못한다.

『그냥 참으면 되잖아요. 언젠가는 저절로 풀릴 터인데 상관 없죠.』
『넌 200년 전에도 멀쩡히 살아 있었으니까 하나도 어색해 보이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우린 달라. 방금 관뚜껑 열고 나온 할아버지랑 대화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아~주 기괴하다고.』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이 될 것인가.
제르가디스의 항의하는 말투만 들어도 가우리는 웃다가 질식할 지경이었다.
『아니되오! 일주일이나 한 달씩 이 지경으로 계속 살라는 말씀이오?! 이 봄이 다 가도록 이 병이 낫지 않으면 남도의 꽃도 차마 다시는 피지 못하리다. 가우리 형제? 책을 잘못 선택하여 몹쓸 증세로 고통받고 있는 이 몸이 가여우다면 그리 실소치 마시오.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소이다. 형제의 미소가 나에겐 박대로 보이는구려. 애통지심으로 나를 궁률히 여겨주오. 이런 황황 시절을 당할새 도리어 우정을 다지고 역량을 더하지는 않을 망정...』
듣다 못해 리나는 악을 썼다.
『누가 수건으로 저 귀신 붙은 입을 틀어 막아라!』
리나가 아우성을 치지 않더라도 제르가디스 본인이 알아서 반창고를 찾아 입에 붙였다. 스스로가 망측해서 밧줄에다 목을 걸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고칠 방법은 없는 거야? 리나.』
날뛰는 배꼽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가우리가 그 치료 여부를 조심스럽게 타진했다.
『글쎄, 기억상실증이라면 충격 요법이랍시고 망치로 머리를 때려라도 보겠지만... 흐음.』
충격 요법이라. 아주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기절한 사람의 뺨을 죽어라 때리면 제정신을 찾는다는 얘기도 있다. (작가 주 : 원래는 절대로 이래선 안됨!) 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결단했다.
『가우리, 제르가디스를 붙잡아다가 창문 밖으로 멀리 내던져. 머리가 아래로 닿게끔 조준해서... 실시.』

제르가디스가 놀라 억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가우리는 리나가 조정하는 원격 조정 인형이나 마찬가지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마당에 다른 사람 집어 던지라는 명령쯤이야 가뿐하다.
『오! 맏겨 줘, 리나!』
『그, 그러지 마시오! 귀하의 표정 흉악도 하오!』
『아아, 괜찮을 거야, 제르가디스. 잘 던져 줄게.』
울고 불어도 번복은 불허하다. 창문은 열려졌고 희생자는 피슝 날아갔다.
쾅.
운석 낙하의 충격파가 지축을 뒤흔든지 정확히 1초 뒤, 2층 창문 밖에서 18세기 로미오가 왁왁대며 항의하는 소리가 구슬피 들려왔다.
『너무하는 거 아니오?! 이런 낭패가 다 있다니. 사랑으로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어찌 이다지도 강퍅하고 모질게 동료를 대할 수가!』
『2층은 안되겠다, 리나. 3층으로 올라가 던져볼까?』
『그러지 말고 지붕 위로 올라가 떨어뜨려봐요, 가우리씨. 효과 확 보게.』
『이보시오들!!』
환자가 워낙 강팍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옥상으로 올라가 아래로 떨어뜨려보자는 의견은 기각되었다.

일행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원탁에 빙 둘러앉아 사이좋게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이거 어렵네. 백마법 중에서 모든 마법을 무로 되돌리는 주문이 있긴 있지만...』
『홀리 브레이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백마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니? 제로스. 마족 주제에 공부는 꽤나 열심히 하나 봐?』
『헤헤~ 칭찬 고맙습니다, 리나님.』
제로스는 연극조로 절을 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엷게 미소지었다. 답례로 리나도 빙그레 웃어 주었다.
『그런데 그게 최고위 사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니?』
『아멜리아님이 세일룬 왕국의 최고위 무녀라는 건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이야, 허를 찔렸네.』

그렇지만 아는 사람에게 환부를 들이대며 치료를 부탁하기란 까다로운 노릇이다. 친구 오라비되는 의사에게 찾아가 흉통의 원인을 도통 모르겠다면서 블라우스의 단추를 끄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던가. 친척이 운영하는 산부인과에 들어가 아내의 자궁 검사를 의뢰하는 남편의 수도 많지 않음이다. 리나는 잠자코 제르가디스의 안색을 살폈다. 소년은 차라리 날 죽여라 숙연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기품 넘치는 아멜리아 왕녀, 소인에게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으니 부디 은혜를 베풀어 나를 이 곤경에서 어서 구원하시오》
아멜리아는 웃다가 기절할 것이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제르가디스는 피가 나도록 윗 입술을 씹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목을 맨다.

『자꾸만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버릇처럼 부르게 되면 차라리 목이 터져라 100번을 부르라던데... 그러면 스스로 노래가 지겨워져서 버릇이 떨어져 나간대.』
궁리랍시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보는 가우리였다. 그의 영양가 없는 제안은 리나의 노여움을 샀다. 노래는 노래다. 말투는 말투다. 리나는 지긋지긋하다며 가우리의 뒷통수를 가볍게 퍽 후려갈겼다.

『아이고, 참말로 이걸 어쩌면 좋누.』
『바늘로 손톱을 따면 안될까요?』
『그건 소화불량에 걸렸을 적에나 써먹는건데.』
『급하면 쥐똥도 약에 쓴다고 하잖아요. (정답은 쥐똥도 약에 쓰려고 찾으면 없다)』
『그러지 말고 얼음 목욕을 시켜보자.』
『얼음 목욕은 미친 사람에게나 시키는 거 아니던가요?!』
『어쨌든 정신은 번쩍 들 거 아냐.』
『정신만 번쩍 들게 하는 거라면 다른 좋은 방법도 많아요. 뜸이라던가, 침이라던가, 거꾸로 매달고 볼기짝 때리기라던가...』
가끔 그 동료라는 것이 웬수로 보이는 경우도 그래서 발생한다.
『작정하고 날 죽이려는 거요?! 제로스 사제!』
『죽는다고 해도 뭐가 걱정이오? 댁의 시신은 이 사제가 잘 수습해 놓으리다.』
『맙소사. 그대의 심장은 얼음처럼 차갑구려!』
『이걸 어쩌나. 이 몸엔 심장이 없다오, 가련한 형제여. 메롱~ 메롱~』

아무튼 저쪽 여관방에서 마루타 실험이 한창인 동안, 제로스는 저주를 타지 않는다는 특이 체질 (마족도 체질인가?)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문제의 사건 시발점으로 급파되었다.
뭐, 남의 이목을 받지 않고 공간을 들락거릴 수 있으니 범죄의 현장으로의 접근은 그의 실력으로 보자면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 없다. 어둠을 밝힐 촛불도 필요 없고, 자물쇠를 부술 연장도 필요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자기 집 안방처럼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제로스는 뒷짐을 지고 어슬렁 어슬렁 서가 사이를 돌아다녔다.
리나는 신신당부하길, 문제의 책을 꺼내 읽어보고 주술을 풀 단서를 뭐든지 잡아가지고 오라 하였다. 혹시나 주술 연구에 도움이 될 것도 같으니 앞이나 뒤로 페이지 한 두장을 찢어 가져오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기왕이면 어렵게 발걸음을 한 김에 그 옆으로 꽂혀 있을 귀한 마도서 한 권 정도 훔쳐오라는 날도둑 성향의 귓띰도 빼놓치 않았다.

『어디 보십시다.』
제르가디스가 만졌다는 책은 위로부터 다섯 번째 칸에 잘 꽂혀져 있었다.
제로스는 팔을 뻗어 문제의 책을 집어 들었다.
상황이 급박해서 그런 거였을까. 제르가디스는 차마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뒷 표지로 이런 글귀가 박혀 있었다.

한 번의 재채기는 그대가 그대를 감싸는 정령들의 숨결을 느꼈음이라.
두 번의 재채기는 이에 화답하는 기운이니라.
세 번의 재채기는 이를 물리치는 힘이로다.

200년 전에는 재채기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전에는 재채기를 연거푸 하면 마의 기운이 소멸한다고 믿었다. 세 번의 재채기는 길조의 상징이었다. 이사를 하면서 그 집주인은 매운 후추를 품에 넣고 있었다. 문지방을 밟음과 동시에 재채기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효과는 악령을 무찌르는데 있었다. 주술사들도 매운 후추를 뿌려 액땜을 하곤 했는데 병에 걸린 환자가 세 번 재채기를 하면 병마가 떠나간다고 생각했었다.
제로스는 흘끔 한쪽 눈만 뜨고 책을 도로 원래의 위치로 돌려 놓았다.
『세 번 재채기로 원위치겠구먼, 돌아갈 적엔 후추통이나 선물로 가져갈까나~』
그러나 그의 성격으로 보자면 정작 선물로 가져갈 양념통이 후추통이 아닌 소금통일 확률은 거의 90%에 육박했다.
『된통 당해보라지.』

그 순간에도 여관방에서는 야바위 의사가 환자 잡는 의식이 한창이었다.
『다음으로는 마늘 목걸이를 목에다 걸어 보자.』
『이것도 안되면 심장에다 말뚝을 박아야 하는 거야, 리나?』
『아니, 은탄환으로 제꺼덕 쏘아버릴 거다.』
겁에 잔뜩 질린 키메라 소년에게 유서는 미리 작성하라 말은 해두었는지, 그 점만이 궁금할 뿐이다.


PS: 아이디어 제공은 교도소장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