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힐 남작의 성이 주춧돌 달랑 남기고 공중 폭파된지 그로부터 정확히 4시간 17분 뒤.
이곳은 그 끔찍한 참사 현장으로부터 약 5km 남짓 떨어진 곳이다.
여기에는 그 유별난 색채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는 머리 셋이 있었다.
그럼 세어보자.
하나는 노랑, 하나는 파랑, 나머지 하나는 짙은 남보라색.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이 머리 셋은 그 참혹한 사고를 일으킨 범인들 중 일부다.
머리통 긁적이며「여기가 도대체 워디메뇨?」라며 당혹스러워 하고 모양새는 길 잃은 관광객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긴 하다만... 어쨌거나 서로 옥신각신 싸우느라 바빴다.

『리나는 분명 왼쪽으로 뛰라고 그랬다고. 왼쪽 말이다, 왼쪽!』
그들 중 파랑이 신경질적으로 목청을 높였다. 손짓 발짓도 섞였다.
『하지만 말이야, 좌측... 좌측이면 오른쪽 맞잖어. 왜 나에게 화내는 거야, 제르가디스.』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제르가디스씨. 가우리씨가 제대로 이해를 못하시잖아요. 수저 들고 밥 먹는 쪽, 그쪽이 오른쪽이라고 설명을 해드리세요.』
『덧붙여 설명하자면 오른쪽은 우측이고. 알겠나, 가우리. 넌 거꾸로 뛴 거야.』

지하실에서 반역을 꿈꾸던 아돌프 히틀러와 정면으로 싸움이 붙은 것까진 다 좋았다. 문제는 창을 들고 덤벼드는 한무더기의 그린힐 남작의 사병들을 향해 리나가 프레아 에로우 주문을 난사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놈의 지하실에 대포알이 그득 그득 차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마른 볏단에 불 붙어도 정신 없는데 폭약 상자로 불이 옮겨 붙었으니 이거야말로 엉덩이에 불 붙은 격이었다.
《모두들 도망쳐!》
딜스 왕국을 전복하겠다는 그린힐 남작의 10년 계획도 그리하여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흩어졌다. 왕위 찬탈의 꿈은 깨졌다.
꿈만 깨졌던가? 집도, 가구도, 사람도... 산산조각.
《걸음아 나 살려라!》
반역자고 마도사고 한 덩어리로 뭉쳐 무작정 산 아래를 향해 달리고 본 것도 바로 그 까닭이다. 누가 누군지도 알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약 800명의 사람들이 야산에서 맨발로 뛰었다. 계속해서 터지는 폭약들은 주장하길, 돌들을 들어 하늘에다 탑을 쌓겠노라 의지를 다졌다. 허나 중력의 법칙은 절대로 무시될 수 없었다. 공중으로 들려진 잔해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혼비백산한 무리들 머리 위로 고스란히 쏟아져 내렸다. 벽돌 우박은 그렇게 해서 지면을 덮었다.

그러니 혼선이 빚어질 법도 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좌측으로 뛰라는 리나의 신호가 제대로 전달될 리 만무했다. 좌우 방향을 헷갈린 가우리는 필사적으로 오른쪽 샛길로 몸을 던졌고, 자욱한 연기로 판단력이 흐려진 제르가디스가 그런 가우리의 꽁무니를 따라 달음박질... 하여 일행은 두 무리로 찢어져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되었...
음, 아닌가.

『리나님은 무사해요. 머리카락이 그슬리고 뺨에 화상을 입긴 했지만 심하진 않아요.』
전천후 레이다인 제로스가 생기발랄하게 리나의 안부를 전했다.
실제로 제로스는 리나가 있는 방향과 가우리쪽을 오작가작하며 비상 연락통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는 중이시다. 마족에게 있어 거리라는 것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자와도 같아서 한순간에 그 거리는 0으로 좁혀진다. 축지법 쓰는 홍길동이 따로 없다. 약 15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리나 옆구리에 바짝 붙어서 샐샐 웃고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제르가디스 옆에 서서 사이좋게 어깨를 마주하고 지도를 들여다 보느라 바빴다.

『그래, 리나가 뭐라든?』
『이곳 에바스콧 분기점에서 합류하잡니다. 여기... 여기요.』
마족이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오는 건 싫다며 몸을 빼는 제르가디스 옆에서 제로스 혼자만 신났다. 그는 흰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지도 위의 한 지점을 정확히 가리켰다. 그것도 모자라 지도 표면을 강조하듯 문질렀다. 지나가는 개미 몸통 박살내듯 그렇게 비벼댔다. 은근히 재미를 느낀 듯.
『바~로 이곳입니다.』
『너, 그거 거짓말이지.』
제르가디스는 지금 농담하는 거냐며 눈을 커다랗게 떠 보였다.

마족이 손가락이 지적한 부분은 현재 그들이 자리한 위치로부터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장소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서 8시간? 그것도 모의작전 수행중인 특공대처럼 날쌘 걸음으로 산을 타고 내렸다고 가정을 했을 경우다.
『맙소사! 거기가 중간 지점인 건 확실하나.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제로스의 웃음이 더 커졌다.
『당연히 아니지요. 자신은 더 이상은 걸을 기운이 없으니까 이쪽에서 오시랍니다. 자기는 근처 여관방에 들어가 편안하게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빨리 오랍시는데요.』
『제기랄! 진짜 잘났어!』
자신은 우아하게 누워있을 터이니 몸종들이 알아서 뛰어오란다.
환장하것네.
발을 굴러가며 분통을 터뜨려봐야 원래 리나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다. 욕지거리를 대신해서 가래침이나 뱉었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자. 여기서 성질을 부려봤자 리나는 알아주는 척도 하질 않는다. 그녀는 여왕병 말기 환자다.

제르가디스는 얌전히 지도를 접고 나침반으로 방위나 살폈다. 이제부터 그들은 북동쪽으로 곧장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앞으로 허벅지가 상당히 저려올 것이다.
『그럼 수고들 하세요, 여러분. 저는 리나님 옆에서 댁들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겠습...』
『무슨!』
『얼랄라. 왜 그러시나요, 제르가디스씨?』
이쪽은 머리가 셋이고 저쪽은 하나다. 이쪽은 너무 많고, 저쪽은 적다. 하지만 공간 왕래가 자유로운 제로스가 리나 옆으로 날아가면 인원 수는 둘씩 둘씩 맞아 떨어진다. 생각 같아서는 가우리고 제르가디스고 한꺼번에 잡아 끌고 리나가 있는 곳까지 날아가면 깔끔할 것 같다만... 아쉽게도 인간의 몸으로는 공간 이동은 불가능하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마족들의 고향이기도 한 음의 아스트랄계는 인간으로 치면 남극의 바다와도 같다. 잠시 발을 적시는 정도로는 치명상은 입지 않을 것이다. 동상으로 인해 발가락 하나쯤 떨어져 나간다고 죽을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차가운 물 속에 첨벙 들어가 4분 이상을 버티는 장사는 없다. 그 쇼크는 심장 박동을 멈추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인간의 나약한 육체로는 남극의 바다에서의 헤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고로 음의 아스트랄계로 인간을 끌고 들어갔다간 십중팔구 죽어 버린다. 인간의 고유한 정신 세계는 붕괴되고 (얼어서 죽어버리고) 껍데기에 불과한 육체만 남게 된다. 마족의 전유뮬이기도 한 공간 이동은 그래서 일종의 살인술이 된다.
뭐,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일부러 심장 쇼크를 일으켜서 - 가슴이 뻐개지도록 주먹으로 후려갈기는 식의 방식으로 - 일종의 가사 상태로 만든 다음, 숨이 끊어진 시체를 아스트랄 사이드로 끌고 들어간다. 공간을 뛰어넘었다 싶으면 재빨리 심폐 소생술로 되살려낸다... 과격한 방법이지만 실제로 성공한 적도 있다.

『제르가디스씨도 한 번 해보시려우? 성공 확률은 5% 정도 될 겁니다.』
『그냥 걸어가련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잖아요, 나 혼자 갈 수밖에.』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여관방에 홀로... 심심한 건 둘째치고 얼마나 불안할까. 제로스는 눈을 지긋이 감고 이졸데를 위로하는 트리스탄의 표정을 지었다.
부탁하노니, 제발 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주오. 수신관이 곧 가리다.
『댁들은 두 다리로 천천히 걸어서 오시지요. 그동안 리나님은 제가 잘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 이대로 널 붙잡고 보내지 않는 것이 리나를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남들이 보면 상당히 이상한 기분이 들게끔 하는 자세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래도 제르가디스는 작정하고 제로스와 팔짱을 꼈다. 두어 번 흔들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것까지 확인, 옳커니. 연행이다. 따라오도록. 보호자와 감시자가 없는 상황에서 리나와 수신관을 단 둘이서만 있게 만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생각하기도 두려웠다. 차라리 부담스런 남의 이목을 받아가며 이런 식으로라도 제로스를 붙들어 두는 편이 훨 나았다.
『이, 이러지 말고 그냥 갑시다. 남들이 엉뚱한 생각을 하게 생겼잖습니까!』
식은땀 범벅에 썩은 나물 씹은 표정이라지만 포즈만 보자면 다정한 애인이다. 제르가디스는 기꺼이 손깍지도 꼈다. 기꺼이 오해하라지, 일부러 씨익 웃기까지 했다.
하는 수 있나. 제로스는 그 꼬락서니로 질질 끌려갔다.

『내가 뭘 어쩐다고 이래요!』
『스스로가 잘 알고 있잖아. 이런 짓, 요런 짓! 그런 짓!』
『그게 뭐가 어때서?! 생 나무 토막인 가우리씨 대신 리나님을 즐겁게 해드리겠다는 건데 뭐가 나빠요. 가우리씨는 리나님을 잘 안아주려 하지 않는단 말예요. 그러니 리나님이 얼마나 가여워요. 적당한 스킨쉽에 가벼운 애정 표현은 사람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몸에 활력을 불러 일으키... 그렇게 잡아당기지 말아... 당기지 마! 아얏!』

인간은 포유류다. 젖을 먹고 자라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있어 스킨쉽은 상당히 중요하다. 어린아이에게 기계적으로 젖병만 물리고 안아주지 않으면 반드시 사망한다는 보고서도 있다. 학자들은 부모가 자녀들을 자주 쓰다듬고 안아주면 감성적으로도 안정된 성장을 보인다고 강조한다. 따뜻한 피부와 피부와의 접촉은 분명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러나.
스킨쉽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행위가 타인을 곤란하게 만든다면 그건 범죄다.

『말도 안돼!』
제로스는 펄쩍 뒤며 항변했다.
『내가 하면 성추행이고 가우리씨가 하면 애정 표현이란 말예요?』
『당연하잖아. 저 두 사람은 연인이고 너는 제3자니까.』
『불공평해!』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게 생긴 거야. 다 알면서 왜 그래. 그냥 포기해.』
그렇게 말하며 제로스를 바짝 끌어당기고 보는 제르가디스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내심 짐짐한 구석이 없잖아 있기도 한 그였다.
《리나의 연인 가우리는 생 나무 토막이다》
이 말인 즉, 리나는 생과부로 평생을 썩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소년은 이마를 접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쿼터 엘프의 무시무시한 파워라는 건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 못한다. 홍등가의 아가씨가 음탕하게 눈짓하며「오빠, 나 기절시켜줄 수 있어? 해줄 수 있지, 기절시켜줄 거지, 그지?」라고 꼬리를 치면 엄지손가락을 들어 적(?)의 목 부위에 있는 급소를 꽉 눌러버린다. 꺽 소리도 못내고 흰자위를 드러내며 통나무처럼 쓰러지는 아가씨만 그래서 처량맞다.
「별 이상한 사람 다 봤네. 이 여자는 왜 자길 기절하게 만들어 달라는 거야?」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가우리에게 친절하게 진실을 가르쳐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이다.

『어이, 가우리! 기다려 봐, 물어볼 것이 좀 있어.』
일말의 초조감에 젖은 제르가디스는 그 길로 도도도 달려가 가우리의 팔꿈치를 잡았다.
『왜?』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문제, 가우리는 보통의 둔치가 아니다.
「너 해봤냐」라고 질문한다.
돌아올 답은「아침에 해 봤지. 저녁에 달 보고」
「같이 자본 적 있나」라고 질문한다.
돌아올 답은「사흘 전에 모닥불 피워놓고 다같이 둥굴게 누워서 사이좋게 잤으면서 뭘 그런 걸 물어?」
열 받아「잠 자리를 가져봤느냐고!」라고 질문하면 돌아올 답은 이거다.
「잠자리를 내가 왜 가져? 난 나방도 없고 나비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러니 빙빙 돌릴 것도 없이 짧고 간략하게 요점만 찝어서 질문하는게 좋다.

『가우리 너 말이다... 리나랑 같이 아기 만드는 일 해봤나.』

저 멀리 종탑 망루에서 가여운 꼽추가 귀가 찢어져라 종을 울려댔다. 가우리는「아?」하는 표정으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동안 주민들은 부리나케 움직여 불길한 집시 소녀 에스메랄다를 화형주에 매달을 준비를 끝마쳤다. 기름통을 굴려라~ 성부, 성자, 성령으로 아멘. 번뇌와 숙명은 업화의 불길 속에서 재로 돌아갈지어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가까스로 마비가 풀려 가우리는 마침내 혀를 움직였다.
『우르버버!』
통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부끄럽게 나에게 그런 건 묻지 마!》
허탈감을 가득 담아 제르가디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안되겠군. 생 나무 토막 맞잖아. 그것도 질이 나빠.』

가끔씩 리나는 가우리를 앉혀놓고 산수 공부를 시킨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둘 더하기 둘은 넷... 나이가 들었어도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평생 학습은 국가 과제이기도 하며, 나아가 지상 유토피아 건설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제르가디스가 가우리를 따로 불러내 생생 학습을 시킨다고 하늘이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것은 하늘을 떠받드는 기둥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렇고 말고. 기.둥.을 세우는 일이다. (웃음)

『어이, 모델? 좀 더 색기 넘치는 포즈를 취하도록. 가우리는 그 맞은편에 똑바로 서.』
인적이 드믄 야산으로 올라간 일행, 얼굴이 파랗게 된 남정네들이 - 하나는 오리지널, 다른 둘은 얼마 전부터 파랗게 변색되었다 - 저마다의 위치로 돌아섰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광탈을 부리고 있는 쪽은 제로스다. 하긴, 강제로 옷을 다 벗고 사제용 고무줄 호박 모양 팬티 하나만 달랑 걸쳤으니 당장 거품을 물고 죽을지언정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햇빛에 그슬리지 않아 창백하게도 보이는 맨 어깨살을 양팔로 감싸 쥔 채 잠시도 쉬지 않고 저주의 말을 퍼부어댔다. 어금니가 딱딱 부딪치는 것은 추워서가 아니라 너무나 화가 나서다. 어쩌다가 이렇게 망신살 뻗치는 모습이 되었누, 번들거리는 보랏빛 눈동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가우리를 향해 곧장 꽂혔다.
그 반대편으로 선 가우리는 덕분에 숫기를 완전히 잃고 바지춤으로 손 넣었다.
도대체 이런 건 왜? 가우리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뭣들 하는 거야, 시간 없다구. 똑바로 하지들 못해?! 액션!』
『진짜 싫어 죽겠네. 뭡니까, 제르가디스씨. 지금 대학생 이 모양, 남자 친구로부터 성폭행 당하다 비디오라도 찍어보자는 겁니까?!』
『누가 그런 거 한다고 했나. 나는 그저 예행 연습을 제대로 해보자는 거야. 자! 가우리? 리나가 야한 모양의 속옷을 입고 나타났다! 적당한 반응을 보여봐!』
『아무리 그래도 저건 리나가 아니라 제로스잖아.』
『상상력을 발휘하는 거다. 저건 제로스처럼 보이는 리나야! 그렇게 생각하라구.』

가끔씩 리나는 근처 시내로 나가 최신 디자인의 속옷을 구입하곤 한다. 유명 상표에다가 소재는 실크, 눈 튀어나오는 가격의 고가품으로만 말이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가슴선이 드러나는 것들에다 엉덩이 선이 강조되는 제품으로만 골랐다. 이 세상 어머니들이 딸의 옷장에서 그런 속옷을 찾아내면「이 미친 년아!」고함 지르기 딱인 그렇고 그런 것들이었다.
상상도 안간다고?
뭐, 솔직히 말해 입고 다니는 옷들이 아니니까 리나와는 어울리지 않네, 리나 성격에 그럴 리가 없네 노래를 불러대도 그리 틀리지는 않겠다. 잘 접어다가 가방 깊숙이 숨겨만 둘 뿐, 끈 팬티 위로 바지를 입는 적은 딱 한 번도 없다. 평상시 그녀가 입는 속옷은 곰 인형이나 딸기 무늬가 프린트된 3개들이 한 세트, 저렴한 세일 품목이었다. 실크로 만들어진 야시시 속옷들의 용도는 어디까지나... 페로몬 대용품이라는 거였다. 여성의 무기, 남성을 공략하는... 그런 용도.

자, 준비가 되었는가? 두어 번 노크하고 가우리 방으로 뛰어들자.
《가우리, 도와줘! 내 방에 바퀴벌레가 있어! 와서 좀 잡아줘! 꺄악~》
그렇게 소리 지르면서 브래지어를 흔들자. 살짝 눈웃음 치면서, 도발적으로 흔들자.
『지금 무시라?! 브래지어를 흔들어요?』
『가정만 해보자는 거야. 그러니까 제로스? 있든 없든 가슴을 손으로 받쳐 드는 시늉을 해봐.』
있든 없든이 아니라 원래 그런 건 없었다. 제로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못했다. 가슴? 무엇을 받쳐 들라는 건가. 살집도 없어 뼈대에 가죽이 탁 붙었구먼.
『하여간 최대한 섹시하게 포즈 잡아 봐.』
『우~』
『가우리? 봤어? 잠자코 있음 곤란하지. 한 마디 해줘.』
『토, 토할 거 같아...』
너무나 선량하게 태어나 거짓말은 못하고 보는 가우리였다.
이에 제르가디스는 가우리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딱- 때렸다.
『리나가 속옷 바람으로 나타나도 넌 토할 것 같다고 말해줄 거냐.』
『그건 아냐. 감기 걸리니까 그렇게 발가벗고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말하지.』
『그래서는 모범 답안이 아닌데.』
어떻게 말을 하면 된다는 건가. 가우리는 머리통만 북북 긁어댔다. 가슴이 다 드러나는 브래지어? 사이즈가 작은 것 같으니 상점에 가서 한 칫수 더 큰 것으로 바꿔오라고 충고를 해준다.
『그게 아니지!』
한 대 또 맞았다. 제르가디스는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취할 것 같다! 그런 말들 있잖아.』
『술 먹고 주정하라고?』
『아니. 그건 술이 아니라 사랑이야. 넌 리나에게 취해서 헤롱거릴 필요가 있어.』

인간이 엘프를 사랑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속설이 있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은 거짓이 아니다. 숭고한 사랑밖에 모르는 이들을 어찌 타락시키리오. 성녀 잔다르크에게 피임약의 효능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선전해봐야 쇠 귀에 경 읽기다. 답답함에 가슴을 치면서 제르가디스는 가우리의 등을 제로스 쪽으로 밀어댔다. 빨리 가라! 그리고 안아줘! 격렬하게 키스해 봐! 연습이라도 해서 익숙해져라!
『꺄악! 제르가디스씨! 이참에 마족을 소멸시키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시끄럽다. 통나무를 녹여서 사람으로 만든다 - 생각하고 그냥 참아.』
『전 이 양반을 녹이고 싶지 않아요! 발로 마구 밟아주고 싶지!』
『뭔 잔소리가 그리 많나, 어차피 즐길 거면서. 제대로 교육시켜. 이제부터 꼭 백 번 키스하기다. 하나! 둘! 셋! 넷!』
『군인들 거수 경례하듯 하라는 거야, 뭐야?! 이봐요!!』

그래서 예정보다 무려 2시간이나 더 지나서야 일행은 에바스콧에 겨우 당도했다.
『다녀왔습니다. ×3』
『한참 기다렸잖아!』
『미안합니다. ×3』

얼레.
리나는 눈에 쌍심지를 곤두세우다 말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게으름을 피웠길래 이렇게 늦었느냐 화를 내는 것도 나중이다. 가우리는 입술이 살짝 부었고, 제로스는 불만으로 인해 뺨이 퉁퉁 부었으며, 제르가디스는 소리를 너무 지른 나머지 목이 부었다. 리나는 허리로 손을 얹고 짐짓 물러났다. 탐색전이 먼저다. 리나는 신중하게 눈치를 살폈다.
『이 남자들 봐라,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는데 이런 거야?』
『난 몰라요, 흥!』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가운데 아직까지도 화가 가시지 않은 제로스가 상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빨간 포장지에 분홍 리본... 리나는 적잖케 놀랐다. 이 남정네들이 여자 속옷을 들고 오다니?
『제르가디스씨가 사왔어요. 나중에 열어봐요.』
『알았다. 이걸 쇼핑하면서 싸웠구나. 그래서 늦었고?』
『죄송하지만 아무리 질문하셔도 이번만큼은 대답하기 싫네요. 어쨌든 오늘 밤엔 이거 입고 있으랍니다.』

알게 뭐람. 인간들의 습성은 영원한 연구 대상이다. 어쨌거나 오늘 밤은 달빛이나 감상하며 지붕 위로 올라가 술이나 거나하게 마실 참이었다. 오른손엔 독한 보드카 한 병을, 왼손으로는 귀한 딸 시집 보내고 퉁퉁 울 키메라 하나를 붙잡고 있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구름에 달이 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행복해지는 거다, 리나.』
작정하고 저지른 일이다. 제르가디스는 휑뎅그렁하게 뜬 달을 올려다 보며 술병을 기울였다. 알콜은 쓰리고 아픈 목을 축였다. 덕분에 맑은 콧물이 줄줄 흘렀다.

와장창- 쨍그렁- 휘웅- 탁-
이에 화답하듯 지붕 아래 여관방에서는 곰 집어 던지는 격투가 한창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가우리! 내 머리가 어질어질한 거 같다고라?! 그래! 리나 인버스는 돌았다. 그래서 이런 브래지어나 입고 설친다! 여자가 기껏 용기를 부려 몸매를 과시한다 싶으면 알아서 반응을 보여줘야 할 거 아냐! 뭐? 기껏 한다는 소리가 머리가 어질어질한 거 아니냐고?』
『아차차! 실수야, 실수! 네 머리가 아니라 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고. 우왓, 리나!』
『시끄러! 변명해봐야 이미 늦었어. 화이어볼~!』

다른 의미에서 우리의 키메라군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딸네미 시집보내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그런 제르가디스의 등을 마족이 기분 좋게 토닥거렸다.
보드카 원 샷.
시간을 같이하여 펑 하고 여관 지붕이 날아갔다.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