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은 산불의 근원이 맞는 제목입니다. ※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온갖 꽃이 만발하고, 대지는 생명으로 충만해지고, 얼었던 계곡물이 녹아 물줄기를 이루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서...? 미안하지만 그게 아니다. 이건 공공연한 비밀인데 봄을 일컬어 여자의 계절이라 하는 까닭은 정작 따로 있다.

『뭐가 이리 죽 끓듯 변덕스러워?!』
봄 날씨는 남정네 애간장 녹이는 아리따운 처녀와도 같다. 이랬다 저랬다 제멋대로다.
아침나절엔 안개가 짙었다. 새벽엔 이가 갈리게끔 추웠지만 일출과 함께 지표면이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일교차가 크면 클수록 두부 안개라는게 만들어진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끔 시야가 나빠진다. 그렇다면 미루어 짐작해보자. 오후엔 날씨가 따땃~하게 좋으렷다? 웬 걸. 기대는 대우 자동차처럼 무너졌다. 반짝했던 건 잠시고 오전 10시를 넘어간다 싶자 구름이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불안하다, 불안하다 노래를 불러가며 하늘을 올려다보길 서너차례. 결국 리나와 가우리는 엉망진창 빗방울 전주곡을 강제로 듣기에 이르렀다.
반갑지 않아라. 후두득 전주곡.
두말할 것 없이 나무 아래로 뛰어가 섰다.

『분위기가 금방 그칠 것 같지가 않은 걸.』
가우리가 그렇게 중얼거린 찰나, 구름 밖으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귀신 시집가는 날이군.』
리나가 웃으면서 뭐라고 하기가 무섭게 이번엔 우르르 쾅쾅 벼락이 쳤다.
누가 뭐랬나. 귀신 신부는 사진을 찍는다고 플래시까지 터뜨렸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안간 빗줄기는 굵어졌다. 에취! 가우리는 재채기부터 터뜨렸다. 봄이라지만 아직은 쌀쌀하다. 젖은 몸으로 버티기엔 기온은 너무 낮았다. 바람까지 불어닥치자 리나의 입술은 연보랏빛으로 변했다. 어금니들이 딱딱 소리를 내며 막춤을 추었다. 걸친 망토엔 방마 기능은 있었어도 방수 기능 따윈 없다. 코팅 세공을 한 어깨 방패가 약간의 빗물막이 역할을 해주었다지만 비바람이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옆으로 몰아치기라도 할려치면 이쪽에선 별 뾰족한 대책이 없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을 거야.』
나뭇가지를 믿어서는 안된다. 어느 정도의 빗줄기는 막아주겠으나 사람 뒤통수 치는 구석은 분명 있다. 그러니까 스포이드 기구를 사용해서 작은 물방울들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똑똑 떨어뜨려보자. 나중에 보면 물방울들이 한 곳에 뭉쳐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응집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볼까. 나뭇잎에 모인 물방울들도 서로 모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게 된다. 게다가 나뭇잎이라는 건 고인 물이 잘 빠져나가게끔 디자인이 되어 있다. 끝 부분이 뾰족하고 표면엔 왁스가 미끌거린다. 결국 빗방울은 물폭탄이 되어 왕탕 굴러 떨어진다. 심각하게 과장하자면 작정하고 좍- 끼얹져진다는 거다. 당하면 윽 비명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 여파는 심상치 않다.

『읏, 차거!!』
펄쩍 뛰면서 머리를 흔들면 뭘 하나. 이미 속옷까지 물기를 먹고 있음이다.
『잠자코 있다간 큰일나겠어. 비를 피할 곳을 찾아보자, 가우리.』
『하지만 이런 곳에 인가가 있을 리가 없잖아. 산속인데.』
『우는 소리 하긴! 동굴 같은게 있을 수도 있잖아. 이대로 있다가 우린 죽어!』

체온이 높은 경우와 체온이 낮은 경우, 어느 쪽이 인체에 더 해로울까?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줄로 안다. 정답은《낮은 쪽》이다. 감기로 인한 고열로 사람은 그리 쉽게 죽거나 하진 않는다. 그러나 선풍기를 밤새 쬐고 자면 보통은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전문적 용어로는 하이포서미아라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저체온증이라는 것이다.
겨울에 눈바람 맞은 것도 아닌데 빗방울에 동사하겠느냐고?
체온이 1℃만 올라도 괴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체온이 1℃ 내려도 고통스럽다.
인간은 항온동물이다.

이미 그들은 사시나무인양 심하게 떨고 있었다. 얼얼하니 얼굴이 아팠다. 체온이 35℃ 가까이 떨어졌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가우리는 걷기가 무척 힘들다고 느꼈다. 허벅지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했다. 손바닥으로 몸을 문질러 봤다. 하지만 체온을 올리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다. 1℃위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열량을 요구된다. 뺨을 문지르는 따위의 작은 행동으론 굳어진 근육은 풀리지 않는다.

『제길! 동굴이 없으면 그냥 내가 여기다 하나 새로 만들까.』
안된다 싶으면 무조건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드는 리나는 두고 볼 것도 없다며 입으로 베피스 브링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땅을 파세, 앞 발로 힘차게 파고 또 파세~♬ 베피스 브링~♬
두 팔을 앞으로 주욱 뻗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1. 이론적으로 동굴이라 함은 절벽의 단면이 오목하니 안으로 깎여진 상태이다.
2. 인공적으로 동굴을 만들려면 단단한 바위 단면을 깎아내야 한다.
3. 지금의 그녀는 절벽 바위를 향해 주문을 날리지 않았다.
4.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무작정 앞 산을 향해 주문을 날린다 한들 아늑하고 단촐한 동굴이 생길 리 만무하다. 그녀의 힘이라면 산만 푸억! 깎여진다.
5. 무너진 것들은 그럼 어디로 갈까? 우주로는 절대 날아가지 않는다.
6. 바위산에서는 낙석이, 토산에선 토사가 산등성 아래로 흘러내리게 된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대형 산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우갸우갸우갸갸!』
리나 인버스, 알아서 무덤을 팠다. 콸콸 쏟아지는 흙더미가 이웃한 계곡을 송두리째 덮쳤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바위들이 압권이었다. 나무를 분지르고 풀들을 짓밟았다. 다람쥐, 토끼, 여우, 오소리등등의 생물들이 한꺼번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저 아래 인가로는 흘러가지나 마라... 가우리는 두 손을 꼬옥 모으고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리나는 틀니 빠진 암사자처럼 베실 웃었다.
그리고 뒤돌아 서서 고뇌하는 철학자 모드로 돌입했다.
『자연의 힘이라는 건 정말 무서워. 인간의 힘으론 제어할 수 없음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리나... 말을 말자.』

어쨌거나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은 많은 법이다. 이것은 작가의 농간이 분명하다. 무슨 이유로 쓰다 버린 오두막이 나타나질 않는 건가?! 척 하고 등장을 해줘야 정상이 아니냐. 뗏목을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 반드시 폭포가 나온다. 그것이 슬레이어즈였다. 비가 온다 싶으면 오두막이 나와야 맞았다.

『내 말이 틀려?!』
틀렸다.
『우갸우갸우갸갸!』

항의를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여 리나와 가우리는 작전을 바꿨다.
전문가들은 조난당한 사람이 멋대로 움직이는 건 옳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 기둥 아래 원위치로 돌아가 섰다.

『일단 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해.』
여행엔 이골이 난 몸이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적에 대응하는 방법이라는 걸 누구보다 더 빨리 생각해내었다. 배가 고프다? 그럼 물고기를 잡는다. 비를 피하고 싶다? 그럼 임시로 비를 막을 방편을 만들면 된다.

일단 비슷한 높이로 자리잡은 적당한 가지를 두 개 골랐다. 이거다 싶자 기술적으로 꺾어 비틀었다. 준비가 되었습니까? 리나는 얼른 망토를 벗어 분지른 나뭇가지를 옷걸이 삼아 매달았다. 이것으로 평평한 천막이 급조되었다.
『바람에 날려가지 않겠어? 빨래 집게도 없는데.』
걱정일랑 집어치우자. 방법은 있다.
『새도우 스냅.』
리나는 어둠의 힘으로 만들어진 핀을 두 개 만들어 망토 천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어서? 이엽, 에어 실드.

단도에다가 라이팅 주술을 걸어두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희미한 빛과 함께 망토의 표면은 부드럽게 부풀어 올랐다. 마법으로 생겨난 공기층이 천 위로 올라타면서 일종의 코팅 막을 형성했다. 오래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방수 효과는 분명 있다.

『문제는 망토의 천이 마법의 영향을 받아 쉽게 삭아버린다는 거지.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고 싶었다구!! 내 아까운 망토! 훌쩍.』
세제를 한 푸대 집어 넣고 세탁기를 강으로 24시간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툼한 느낌의 천은 곧 얄팍하게 변할 것이다. 순식간에 낡아빠진 망토로 전락하는 건 확실하다.
반갑지 않다. 리나는 풀 죽어 고개를 숙였다. 방마 도구들의 수리비는 대단히 고가이다. 좀벌레가 먹어치운 듯한 손가락 구멍 하나 떼우려면 한달치 식비가 일시에 날아가게 된다.

『불을 피울 수 있을까? 리나』
『노력은 해봐야겠지. 몸을 조금이라도 말려야만 해.』
덜덜 떨고만 있다간 오래지 않아 탈진하게 된다. 퉤퉤,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것도 다 살기 위한 작전이다. 망토 걱정은 나중에. 그들은 다급하게 불을 피울 만한 건덕지를 살폈다.
그러나 사정이 아주 나쁘다.
젖은 풀, 젖은 나무, 젖은 흙... 불을 피우기엔 최악의 조건.

『알게 뭐람! 노력을 해보는 거야. 정 뭐하면 강제로 땔감을 말려보는 거지. 웃샤!』
마력을 끌어 모았다. 주문을 영창했다. 파랗게 빛나는 힘을 손 안에 쥐었다. 빠지직... 주먹이 불타올랐다. 어금니를 단단하게 악물었다. 근처 나무기둥에 철썩 손바닥 도장을 찍었다.
어린이는 절대 따라하지 마시오.
모노 볼트. 팟팟팟- 지지직-

『으커커커!!』
만만하게 생각했다. 계산 착오다! 고압 전류는 나무도 꿰뚫는다. 게다가 대량의 습기! 강한 음 전기의 반발로 나무에 깃든 작은 물방울들이 총알처럼 튕겨나가는 건 다 좋았다. 그런데 그게 모조리 전기 덩어리였다. 놀란 가우리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새파란 도깨비불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가는 모양새는 밤 하늘의 불꽃놀이를 연상시켰다. 이어 새까만 연기! 와지끈 부러지는 나무 기둥! 그렇다. 벼락이었다. 무엇이 다르겠는가. 세로로 두짝이 난 나무가 쓰러졌다. 동시에 리나와 가우리는 사이좋게 감전당했다.
『꾸꽥!!』
멀건 연기를 입 밖으로 토해내며 가우리가 쓰러졌다.
『허억, 때, 땔감은...』
폭삭 무너져 가루가 되었다.

『빌어먹을!! 춥단 말이야!!』
원래 배고픔과 추위엔 약한 리나다. 참을성이라는 건 요~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여 그러면 안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하고자 하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지?
가우리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편이었다.
다른 사람은? 없지? 없지?
그녀의 만행을 고발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리나는 스산하게 미소지었다.
『에라 모르겠다... 꿀꺽. 화.이.어.볼.』
실피르의 당근 화살이나 사과 화이어볼이 아니었다. 몸을 덥힐 적당한 온도를 화이어볼로 구사할 수 있던가? 농담이겠지. 그녀는 그렇게 건너편 산 하나를 통째로 불살랐다.

『아, 살 것 같다. 몸이 좀 녹는 것 같군.』
길다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쭈그리고 앉았다.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느껴지는 온기는 적당했다. 지옥의 불도 저 높은 천당에서 느끼기엔 할머니 화톳불이다. 리나는 저 멀리 불 붙은 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따뜻한 열기... 아아, 행복했다.

초 봄엔 산불이 자주 발생한다. 겨우내 당은 건조해지고 식물은 잔뜩 매말라 있다. 거기다 강한 바람이 불어닥치면 나뭇가지와 풀들은 서로 부딪쳐 마찰열을 발생시킨다. 원시인들이 나무토막을 서로 비벼 불을 피워댄 것과 똑같다. 불씨는 그렇게 해서 화마로 커져간다.

아울러 다른 이유 하나 더.
우리는 추위로 자제력을 잃곤 하는 여자 마도사의 존재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