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오넬 전하의 점심 상으로 특대 런치 세트 A가 올라왔다.
랩으로 잘 포장된 된장국, 그리고「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세요」라는 문구가 박힌 나무 젓가락...
전하는 기겁했다.
『왕궁 요리사들이 월급을 올려달라고 집단 파업이라도 한 거요? 배달 도시락이라니?!』

정답은 파업이 아니라 공주였다. 시종장은 실례가 되지 않도록 엄격히 주의해하며 피리오넬 왕세자의 귓가로 얼굴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소곤거렸다.
「오늘 하룻동안 아랫것들은 주방 가까이 오지 말라는 아멜리아님의 엄명이 계셨습니다. 소녀들의 이벤트 때문입지요. 따라서 요리사는 오늘 하루 임시 휴가를 보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못난 도시락을 올린 저희들을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비된 자가 딸 아이를 이해 못 한다면 되나. 피리오넬 전하는 그 즉시 입을 다물고 젓가락 포장을 뜯었다. 맛은 없었다만 그런 것쯤이야.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한다.
『아멜리아를 방해하지 말게. 그리고 일정이 늘어진다 싶으면 저녁으로는 짬뽕을 배달시키고.』
숙연하게 말하는 전하를 향해 시종장은 엎드려 절을 올렸다.
『존명.』

자, 그렇다면 우리는 문제의 세일룬 왕궁 주방으로 눈길을 돌려보도록 하자. 쓸쓸하게 도시락 드시는 왕세자 전하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이니... 여기서 앞치마 두르고 머리 위로 두건 눌러쓴 소녀들이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다시 잡겠다.
여기는 주방. 역사의 현장이니라.

『은근히 짜증나지 않니, 아멜리아. 기껏 고생해서 남 먹여줘야 한다니!』
『리나 언니. 신경질 부릴 틈이 있으면 이리 와서 냄비 쥐개나 찾아봐요.』
원래는 서른 명에 이르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오락가락 하던 곳이다. 그런 장소에서 딱 둘이서만 일을 하려니 재료에다 도구 챙기는 일부터가 농담이 아니었다. 노랑색 체크 무늬 앞치마를 골라 허리에 매달고 그 잘난 나무 주걱부터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음, 사실은 주걱만 잡았다. 리나는 시작도 안했음에도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벌써부터 다리가 아파왔다. 시골 촌부의 부엌도 아니고 해서 화덕이 놓은 공간만 따져도 충분히 운동장이었다. 그릇이고 병따개고 정체도 모를 도구는 수천가지, 그나마 어디로 박혀있는지 파악도 불가하다. 하는 수 없어 찬장이니 서랍이니 하는 것들을 다 열어봤다. 알맞은 크기의 냄비를 찾는 일에만 40분을 매달렸다. 애초부터 시큰둥한 기분으로 초코렛 만들기에 동참했던 리나는 오리 주둥이로 입 모양을 만들고 그 시선을 땅바닥에 고정시켰다.

『솔직히 말해 난 이런 짓 하기 싫었어.』
도대체 어느 멍청이가 이런 행사를 기획했나! 남자 친구에게 초코렛을 줘야 한다고? 안 줘도 내 남자다. 그깟 초코렛이 없어도 애정 전선은 이상 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다 하니까 분위기상 휩쓸리게 된다. 안해도 그만인데 눈치가 보인다. 가우리는 멀뚱 쳐다본다. 뭐 줄 거 없수? 이러니 별 재주가 있나. 어렵게 만들어 그 아까운 걸 남 주는 멍청한 짓을 그녀도 똑같이 할 수밖에.

『작년에 실피르 언니가 초코렛 쿠키를 한 바구니나 보냈다는 걸 잊으셨나요?』
『잊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달겨들고 있잖냐!』
상점에서 몇 푼 주고 구입한 네모 세모 초코렛과 직접 구운 달콤한 쿠키를 어찌 감히 비교할 수 있으리. 리나는 자존심이 상했고 아울러 짙은 패배감에 좌절했더랬다. 맛있게 쿠키를 집어 삼키던 가우리가 그래서 원망스러웠고, 입가심용으로 산뜻하게 무시되던 그녀의 작은 초코렛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몰래 뒤돌아 눈시울을 적신지 그리하여 1년! 이를 갈고 결심한 바가 있어 올해에는 작정하고 직접 앞치마를 둘렀다. 두고 보라지! 걸작으로 승부한다!

『그럼 불평할 까닭이 없는 거 맞죠? 리나 언니.』
『히끅.』
아멜리아가 진지해지면 묘하게 무서워진다. 이름하야 로열 패밀리 파워라는 거였다. 왕녀의 위엄으로 밀어붙이면 이쪽에선 반격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부잣집 딸이라고 해도 리나는 평민 출신이다.
그녀는 재빨리 얌전 모드로 - 패배자 모드로 돌아서서 선반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냄비를 찾았으니 다음으로는 냄비 뚜껑이라는 녀석을 찾아봅시다~ 난 반항 안 했답니다.

리나는 쁘띠 초코슈라는 걸 만들 계획을 세웠다. 만들기는 제법 간편한데 반해 모양은 화려하게 연출이 가능하다... 고 요리책은 설명했다. 녹인 초코렛에 슈 홈런볼을 굴려 겉 표면을 덧씌운다, 적당히 식었을 때에 화려한 파우더를 뿌려서 장식을 한다, 당신도 만든다, 귀한 과자 쁘띠 초코슈- 땜시롱 요리 실력 폭탄 꽝인 사람이 무턱대고 도전을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요리책 저자는 장담했다.
일말의 불안감이 없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요리책 저자가 짐작하는 요리 실력 폭탄 꽝이라는 것이 이쪽 현실과는 엄청나게 다름이다) 일단은 쁘띠 초코슈라고 제목이 적힌 페이지를 활짝 펼쳤다.

재료는 시판용 홈런볼 20개, 고형 초코렛 100g, 장식용 색초코 가루 약간.
첫번째 줄에는 이렇게 글이 적혀 있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제일 먼저 물기가 없는 냄비로 초코렛 덩어리를 넣어 중탕으로 녹인다.
리나는 침을 묻힌 손가락으로 글자 부분을 콕 찔러댔다.
냄비 확인, 냄비에 물기 없음 확인.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리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용감하게 냄비를 불 위로 얹었다.

『초코렛을 넣고 중간 불로 화력을 조절합니다. 탕이라... 탕이라 함은 국의 높임말을 의미합니다. 국은 채소, 어류, 고기 등을 넣고 물을 많이 부어 끓인 국물 요리이지요. 그렇다면 중탕이라 함은 중간 불로 탕을 만든다, 물을 붓고 살살 끓여서 국을...』
『꺄악!! 리나, 언니! 거기에 왜 물을 콸콸 부어요?!』
초반부터 사고다. 허겁지겁 달려온 아멜리아는 얼른 리나의 손아귀로부터 물통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나 귀하신 재료는 더 이상 사용 불가, 이미 냄비 속의 초코렛은 물과 뒤섞였다. 딸은 수렁에서 건질 수 있어도 초코렛은 아니다. 하는 수 없다. 쓰레기통만이 유일하게 남은 행적지, 아멜리아는 냄비에 든 내용물을 싱크대 위로 확 부어버렸다.

『리나 언니. 지금 라면 끓여요?!』
『중탕을 하라잖아. 내가 뭘 잘못했냐?』
대책 없음이다. 어디에 사는 모모 마족은 계란 반숙을 한답시고 냄비 위로 줄을 매달아 계란의 절반까지만 정확하게 끓는 물에 담궜다던데...* 사람도 만만치가 않았다. 아멜리아는「환장하것네!」가슴을 치며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그리고는 요리책을 들어 리나에게 들이밀었다.
(* 교도소장님의 팬픽션 참조... 라고 해도 교도소장님 사정으로 이미 보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책을 더 자세히 읽어보시라고요. 여기 이 부분에서 그림으로 설명을 하고 있잖아요. 중탕! 주웅~탕! 중탕은 이런 거라고요.』
리나는 당황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음, 아멜리아의 지적은 틀리지 않아 요리책으로 그려진 냄비는 하나가 아니라 겹쳐진 두 개였다. 물을 붓고 끓이고 있는 것은 큰 냄비, 그 위로 작은 냄비를 다시 얹은 다음에야 거기서 초코렛을 녹였다.
으앗, 갑자기 하늘이 누렇게 변신한다.
『뭐시냐! 그러니까 그 말인 즉, 나더러 적당한 사이즈의 냄비를 하나 더 찾아야 한다는 거야?!』
운동장 넓이의 주방에서 리나는 앙칼지게 비명을 질렀다. 수납장을 또 뒤지라고?!
초코렛 표면으로 하얀 가루가 생기는 현상을 가리켜 블룸(bloom)이라고 한다. 흔히 상한 초코렛이라고 착각을 하곤 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 변화일 뿐, 인체에는 해가 없다. 여름철이 지난 후 습기를 머금어 색이 변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문가는...
『새하얗게 질린 내 얼굴빛을 초코렛으로 설명하진 말아줘. 가뜩이나 죽을 거 같다고!』

어쨌거나 젤리 초코를 만들 계획을 세운 아멜리아 또한 중탕으로 초코렛을 녹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 과자는 초코렛으로 작은 컵을 만들고 그 안에 젤리를 부어 완성한다. 리나의 경우는 과자에다가 초코렛을 바르는 선에서 끝나지만 아멜리아 쪽은 컵을 만들어야 하기에 그 과정이 훨씬 더 복잡했다.
재료는 초코렛 100g, 과일 젤리 100g, 그리고 랩.
일단 납작한 접시에 랩을 깔고 중탕으로 녹은 초코렛을 떠서 놓고 둥글게 펴놓는다. 두께에 주의할 것, 너무 두껍게 바르면 실패한다. 약간만 식었다 싶으면 랩을 통째로 들어 뒤집은 놓은 컵 위로 늘어뜨린다. 그렇게 해서 컵 모양으로 굳힌다... 양초 모양 만들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뭐하러 그렇게 복잡하게 일을 만드니. 마법을 써, 마법을.』
냄비 찾을 생각은 안하고 리나가 옆에서 참견했다.
『랄라~ 리나 인버스가 나간다, 부 브라이머 스페샬~♬』
이것은 돌이나 흙으로 골렘을 만드는 주문이다. 재료로 새로운 형상을 만든다는 점에서 리나가 응용력을 발휘할 법도 했다. 예전에 그녀는 태산 같은 바위에다 이 주문을 날려 화룡왕의 신전을 멋지게 장식할 반짝 태양 조각을 만들기도 했다.
『초코렛이여, 컵이 되어라. 이엽!』
『컵 같은 소리! 언니!!』

어라. 폭주했다?
플러버라는 이름의 녹색 고무를 발명한 발명가 교수가 리나의 주문을 맞고 변신한 초코렛을 직접 눈으로 봤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까, 아님 뒤돌아 도망갔을까.
어쨌든 리나는 재빨리 접시를 들어 방어를 했다. 초코렛은 빠른 속도로 휙- 휙- 지나쳐 갔다. 모양은 대충 뭉쳐진 아메바, 그런 것이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의 입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 피슉
아멜리아가 울부짓으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초코렛은 벽 반대편에 짙은 갈색의 얼룩을 남기며 튕겨올랐다.
- 텡

『꺄악! 이리로 오지 마!!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아멜리아! 냉장고 아래로 기어들어가 숨지만 말고 냄비 뚜껑으로 쳐서 튕겨보내!』
『모, 못해요... 리, 리커버리!!』
『이 아가씨가 정말! 회복 주문을 날리면 뭘 하자는 거얏! 에잇, 프레아 에로우!!』

오늘 저녁은 얼큰한 짬뽕이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은 담백하게 순두부 백반으로 할까나.
주방문 앞켠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시종장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당분간 도시락 배달은 어쩔 수 없겠다. 와장창 그릇 깨지는 소리가 요란한 저쪽 사정을 짐작해보면 요리장의 임시 휴가는 이틀이나 사흘 정도로...

『무너뜨리지만 말아주세요, 공주님, 그리고 리나 인버스님.』
1년에 한 번뿐인 행사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뒷 이야기 하나
제르가디스가 선물 포장을 벗겼을 적에 엄지손톱만한 까만 것이 콧속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 윽
나중에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공주에게 귀띔하길, 아무리 키메라라고 해도 코로는 초코렛을 먹지 못한다고 말해주었다. 왕녀의 초코렛은 그래서 올해도 인기가 없었다.
- 억울해요!
그러나 이미 제르가디스는 초코렛이라면 질색이라며 손을 저어댔다. 사실 그는 콧속에 박힌 까만 빛깔의 이물질을 손가락으로 파내다가 리나로부터 몹쓸 오해를 받아 기분이 불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