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탕데이 이야기는 옛날 방명록에서 날짜별로 이어서 쓴, 일종의 이벤트성 습작입니다. 작가의 머리가 구멍 슝슝이라 몇 년에 쓴 건지는 모르겠어요. 더하기 맨날 하는 광고가 지겹게 또 나갑니다. 취향이 아니다 싶으면 재빨리 마우스를 움직여 윈도우를 닫는 당신의 멋진 센스를 보여주세요. ※


★★★ 3월 4일 ★★★

예고도 없이 남의 집으로 무작정 처들어오는 예의 빵점 손님의 신분으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렇지만 어째서 매번 저런 모습의 신관에게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걸까.
해왕 다루핀은 푹신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임과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앞치마가 대단히 곱구나, 제로스.』
『어머, 예뻐요? 칭찬 감사, 감... 감... 헉!』
『이제사 깨달았냐. 급히 달려나오느라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나 보군.』
먹을 것의 냄새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달콤하면서... 동시에 역하다.
해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빨갛게 볼을 붉힌 제로스를 향해 심해의 얼음이 콱 날아가 박혔다. 왕은 어쩔 줄 모르고 앞치마를 비틀어 짜는 제로스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지긋이 응시했다.

너 마족 맞냐.

마족은 인간의 마이너스 에너지를 먹는다. 분노, 두려움, 슬픔, 노여움, 그런 것들이 힘이 된다. 울음 소리로 살을 찌운다. 비릿한 피 냄새에 피로를 잊는다. 따라서 뜨겁게 밥 한 사발 데워먹고 바카스 드링크로 원기 회복을 하는 마족이라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엌에 들어가 주걱을 휘두르는 마족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비정상이다.
『그래. 오늘은 뭘 만들고 있었나, 수신관?』
『아, 아, 아, 아무 것도 만들지 않았어요.』
『안 빼앗아 먹을게. 약속하마. 그러니까 그냥 불어. 응?』
한 대 맞고 믿을래, 아님 죽고 믿을래. 다루핀이 눈에 다시금 힘을 주었음이다. 새끼손가락을 들고 약속~ 을 외치고 있다지만 표정은 절대 아니올시다였다. 뒤로 빼면 죽음이다. 상대는 바다의 왕이다. 제로스는 자포자기했다.

『사탕이오.』
『사탕? 호오~』
그래도 인간계에서 오래 굴러먹던 가락이 있었다. 다루핀은 허벅다리를 딱 때리곤 활짝 웃었다. 젊은 남자들은 2월이면 심란해진다. 정확히 한 달 뒤에는 분주해진다. 오고 가는 정으로 싹트는 사랑이어라. 초코렛은 사탕을 만나 완벽한 한 쌍을 이룬다. 천 년은 족히 산 늙은이처럼 해왕은 아래 턱을 쓰다듬었다.
『여자에게 줄 것을 직접 만드는 거냐? 정성이 갸륵하구나.』
『최대한으로 어필해야죠. 경쟁자가 많거든요.』

기분이 풀렸나 보다. 아니, 긴장감이 풀렸다. 윗분에게 호되게 야단맞지 않게 되었다는 걸 깨달은 수신관은 헤죽 웃어가며 한바탕 자랑에 들어갔다. 그렇다!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일보 앞으로 전진, 두 팔을 휘두르며 자신의 눈부신 업적을 시시콜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눈부신 분홍! 그리고 그 투명함! 설탕을 녹인답시고 태워먹은 냄비만 다섯이다. 제로스는 만족스러움을 채 감추지 못하고 으스댔다. 승리는 그의 것, 오른손으로 거머쥐게 될 연인을 생각하면 다리에 힘이 풀렸다! 만들어진 사탕은 아주 잘 생겼다. 일반 구멍가게에서 파는 여느 박하사탕과는 견줄 수 없음이다.

『맛은?』
『시식으로 늑대 인간 서넛에게 먹여봤습니다. 맛있어서 꼴깍 죽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거품 물고 쓰러졌다고요. 얼마나 맛있었으면! 브이-』
뭔가 불길한데.
다루핀은 의자 등받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토닥토닥 두둘겼다.
『죽었어?』
『죽었어요.』
의심해서 미안하다. 너, 역시 마족 맞구나.
해왕은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사고나 치지 말아라.
역시 마족은 요리와는 거리가 먼 존재임이 확실했다.


★★★ 3월 5일 ★★★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음이다. 제로스는 무척이나 초조해져서 정신없이 발을 굴러댔다.
《맛은 그렇다치고 일단 사람 죽게 만들지는 말 것》
쌓은 경험이 많아 점쟁이 저리가라의 미래안을 가진 해왕 다루핀은 강조에 강조를 더했다.
자, 그리하여 시식 모르모트 앞으로 일개 군단 대령이오.
안 먹겠다 악을 쓰는 짐승 인간들이 뼈가 부러져라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제로스의 의지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굳건했다. 사랑스런 손가락으로 핑크 사탕 하나를 집어들었다.

『입 벌리세요, 하나도 안 무서워요. 아~』
수왕궁은 잠시 치과 병원으로 둔갑했다.
『우우!!』
『자, 착하죠? 금방 끝나요. 그러니까 크게 입 벌려요.』
강제로 턱을 뽑고 사탕을 입에 물렸다.
순간 컥- 하는 외마디 비명 소리 상쾌도 하다. 제로스는 움찔 떨었다.

『왜 죽어버리는 거지?! 너무 달아서 그런가?』
그래서 소금을 한 사발 추가시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염화 나트륨과 염화 칼슘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다. 식품과 맹독의 차이를 알게 뭐람. 어쨌든 허연 빛깔의 알갱이다. 탈탈 털어 한 푸대로 넣고 볼 일이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제로스님. 사탕이잖습니까. 입에 짜면 그게 사탕이겠어요?』
『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고민 끝에 다시 설탕을 푸대로 추가시키고자 했다.
여기서 제로스는 싱크대 서럽장을 열다 말고 잠시 주춤했다.
모양이 똑같은 통이 두 개가 놓여졌다.
하나는 설탕이 맞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세척제로 쓰이는 붕산이었다. 저번 대청소 뒤에 남은 세척제를 아무렇게나 집어넣은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었다. 그는 크게 당황했다.

『맛을 보면 되잖습니까.』
라고 해도 곤란했다. 인간의 혓바닥도 아니고 마족의 혓바닥이었다. 모래를 씹어도 천연의 닝닝한 맛은 느낄 수 없음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제로스라지만 맛의 분별력은 형편없었다. 통 속에 코를 박은 채 제로스는 절규했다.

『결정이 고운 걸 집어넣으면?』
『옳커니! 그럼 이거.』
하여 붕산이 푸대로 시럽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자, 사탕이 다시 나왔어요. 모두들 아~ 하고 입 크게 벌리세요.』
『우우!!』
당분간 수인들의 참살은 계속될 것 같다.


★★★ 3월 6일 ★★★

잠굼쇠를 걸어 문을 꼬옥 걸어닫는다. 남들에게 들키면 달갑지 않다.
제르가디스는 숨 죽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기웃거리는 사람... 없지? 없지?
그럼 되었다. 준비 동작으로 손을 싹싹 비비고 침대 밑으로 잘 숨겨두었던 보따리를 끌렀다. 어제 저녁에 일행들 모르게 이웃 마을로 달려가 마련한 귀중한 물건이었다.
《바스락》
그 작은 소리마저 신경쓰였다. 비닐 포장된 물건은 좌우로 움직이면서 그의 신경을 긁어대는 소음을 만들었다. 제르가디스는 엉겹결에 손을 떼었다. 비닐 포장부터 벗겨야 하는데... 그럼, 진정하고 다시 시작하십시다. 조심, 조심. 손톱을 잘 사용할지어다.
『여차.』
그렇게 해서 모습을 드러낸 건 어린애 주먹만한 투명한 빛깔의 고운 여의주... 성분은 과당. 그리고 포도당. 향료가 약간. 특별 주문으로 만든 대형 특대 사탕이었다.

그냥 특별한 이유도 없이 기쁜 때가 있는 법이다. 뭐가 그리 즐겁느냐 묻지 마라. 본인도 잘 모르고 있음이다. 사실 그는 자신이 웃고있는지조차 몰랐다. 거울을 봤다면 깜짝 놀랐을 거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탓도 있거니와 평소엔 버릇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탓이다.

빛나는 여의주를 앞에 놓고 잠시 깊게 심호흡했다. 준비하시고... 주머니에서 네모 반듯하게 잘 접혀진 손수건을 꺼냈다. 그걸 원래의 크기로 펴자 그 속으로 반짝이는 작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뾰족하고... 어라, 금속성 머리카락이다?
그랬다. 펜치로 잘라낸 철사 재질의 머리카락을 비누로 잘 씻어둔 거였다.
그걸로 뭘 하느냐고?
톡톡톡- 톡톡톡-
부서지기 쉬운 사탕에 글자를 새겨넣기엔 딱이다. 그 강도와 날카로움은 아주 적절했다.

《의무》
그리하여 여의주 사탕은 의리 초코렛과 쌍을 이룬다.
물론 그 의무라는 글자 속에 들어간 뉘앙스는「친구에게 선물한다」라는 뜻보다는「협박받아 먹을 걸 바친다」라는 뜻에 가까웠지만, 본인이 개의치 않았으니 만사 형통이다.

음? 그나저나 잠깐만. 지금 깨달았는데 펼쳐진 보따리 숫자가 맞지 않는다. 핑크색 리본을 단 사탕 봉지는 분명 아멜리아 몫이다. 리본에「정의」라고 적혀져 있으니까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두 개의 사탕 봉지가 더 보였다. 하나는 박하 사탕 봉지이고 다른 하나는 레몬 사탕 봉지이다. 특별한 장식은 없고... 그렇다고 해도 의미심장하다.

『바람둥이! 도대체 여자에게 줄 사탕이 모두 몇 개인 거죠?!』
따라서 문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은 수신관 제로스가 뾰족한 눈썹으로 책망하고 나선 것도 일 리 있었다.


★★★ 3월 8일 ★★★

나름대로의 규칙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충실한 사람들이 있다. 뜨거운 스프가 나와도 홀쩍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지 않는다, 의뢰인이 먼저 배신하지 않는 이상 의뢰는 반드시 수행한다, 남의 침실에 들어갈 적엔 미리 노크부터 한다... 기타등등. 별 것 아닌 내용이지만 철저하게 지킨다. 그리고 그 규칙이 깨졌을 경우 묘하게 신경질적으로 변해 도끼눈을 부릅뜬다.

『문으로 들락날락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을 했더라, 제로스.』
『제르가디스씨. 오늘은 그냥 예외로 해주시면 안되요? 좀 급한데...』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가 모든 일의 예외로 여길 수 있는 건 리나 하나밖에 없다.
당연히 제르가디스는 으르렁거렸다.
『네가 마족임을 강조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급하고 자시고 예외는 없어. 내 방에서 무단으로 얼쩡거리지 말고 밖으로 다시 나가.』
제르가디스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래서 제로스는 급해졌다.
『질문 하나 하지요. 제가 이대로 밖으로 물러난 뒤에「실례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두 번 노크하면 그때는 문을 열어 주실 건가요?』
『뭐 하러?』
『이봐요.』

성질 같아서는 지팡이로 저 잘난 머리통을 확 휘갈겼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렇지만 꾹 참아야 한다. 제로스는 속으로 숫자를 마구 세었다. 이것은 격렬하게 화학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주문이다. 하나, 다섯, 여섯, 마흔 다섯! 빌어먹을. 열이 받친 나머지 주먹이 꾸욱 쥐어졌다. 그래도 스마일, 스마일. 저쪽은 스무 살도 넘지 않은 인간 총각이다. 이쪽은 천 년 이상을 살아온 마족이다. 자고로 어른은 너그러워야 한다.

『말 같은 소리. 그래, 어른이 어린애더러 이번 딱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하면서 손 벌릴 수 있는 거냐? 넌 가끔 진지하게 거울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그렇게 중얼거린 뒤, 가지고 있던 것 가운데 레몬 사탕 봉지를 골아잡아 제로스 손바닥 위로 그걸 휙 집어던졌다.

엉겹결에 허공을 가르는 사탕 봉지를 두손으로 낚아채긴 했다지만 제로스는 무척이나 놀랐다.
사, 사탕! 설마, 저치가 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
『오버하지 마!』
제르가디스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쿵 굴렀다.
『알았어?! 집으로 돌아가서 그걸 가공하겠다는 생각일랑 죽어도 하지 마. 넌 그저 포장이나 잘 해가지고 오는 거다. 알겠나. 정력제니 보약이니 최음제니 하는 걸 섞겠다는 포부일랑 아예 집어치워. 네놈의 환상적인 요리 솜씨를 내 누누히 잘 알고 있다. 넌 우유에 소금 넣는 것만으로도 독약을 만들고도 남을 놈이야. 그러니까! 명심해. 포장만 해, 포장만! 네놈이 준 사탕을 먹고 행여나 리나가 죽기라도 하면 넌 내 손에 이거다.』
그러면서 엄지손가락으로 목 긋는 시늉을 하는 제르가디스였다.


★★★ 3월 9일 ★★★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새는 모이를 많이 잡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점 하나를 간과하고 있다.
즉, 일찍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배가 더 고프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잠을 청하고 있으면 칼로리 소모는 기초 대사량 수준으로 급격하게 줄어든다. 그러나 눈 부비고 일어나 하품을 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열량 소비는 놀랍도록 증가하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긁고, 침대를 정리하고, 신발을 신고, 양치질을 하러 세면장을 향해 걸어가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 배꼽 시계의 알람이 빨리 울리게끔 종용을 한다.
꼬르륵.
하여 일찍 일어난 착한 어린이는 여느 늦잠꾸러기와는 달리 아침밥이 빨리 먹고 싶다며 한바탕 징얼거리기 마련이다.

『배 고프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얼굴 닦는 수건을 씹어먹을 수는 없음이다. 세면을 끝마친 가우리는 처량맞은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신사의 아침 맞이는 숙녀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다. 하여 리나가 몸단장을 끝마치고 아래로 내려오기 전까진 맘 잡고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지나가는 개미 관찰이나 해볼까? 검집에 낀 먼지를 나뭇잎으로 털어낼까? 머리카락이 갈라지진 않았나 하나하나 세어볼까... 그것도 아니라면 병든 닭 흉내를 내어보면 어떨까.

『제발. 그렇게 심심한 거냐, 가우리.』
아침 몸 풀기를 하러 나온 제르가디스는 양 무릎 사이로 얼굴을 처박은 자세로 꾸물거리고 앉은 가우리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웃음이 나오는 건 둘째다. 덩치 커다란 남정네가 죽상을 하고 있는 모양새는 사실 보기가 아주 안 좋다.

『여- 제르가디스.』
인기척에 병든 닭이 잠시 날개를 풀었다.
『정 뭐하면 나랑 대련이라도 할까, 가우리.』
『싫어. 배고파서 뛸 기운도 없어. 나중에 할래.』
『그거 유감이군. 간만에 실력 발휘를 해볼까 싶었는데... 많이 배고픈 거냐.』
『응.』
『그럼... 간에 기별도 안가겠지만... 사탕 먹을래?』
『응!』

가우리는 기뻐했다. 사탕? 좋은지고.
몰라서 하는 얘기다. 이 작은 것으로도 간에 기별은 간다.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의 호주머니 속으론 사탕이 한 두 개 필수로 들어가 있다. 작은 초코렛 바의 경우는 한끼 식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당분은 위대하다. 설탕이 듬뿍 들어간 한 잔의 커피는 오전의 피로를 잊게 해줄 수 있다. 사탕 하나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정말로 급할 적에 그것은 톡톡히 큰 효과를 나타낸다.

『(웅얼) 우에 사으타이야? (웬 사탕이야)?』
『응. 제로스가 어젯 밤에 맛을 봐달라고 해놓곤 놓고 갔어. 자기가 직접 만든 거래.』
『...』
『...』

제르가디스는 침묵했다.
가우리는 얼어붙었다.
『컥!!』
심각한 뉘앙스의 의성어를 뒤로 하고 사탕 데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어간다.


★★★ 3월 10일 ★★★

이것도 사탕 데이 이야길까나? 자, 그럼 시작해보자.
순수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공주님이라고 불리우던 적이 있었다.
『실례라고요. 지금도 전 어디까지나 순수해요.』
그러나 붉은 옷과 흰 옷을 세탁기 안에 같이 넣고 돌린 효과는 무시할 수 없음이다. 새하얗던 마음은 서서히 얼룩져 결국 분홍으로 변해버렸다. 뭐, 변하고 나서도 예쁜 빛깔이고 하니 나무랄 생각은 없다만서도... 아멜리아가 리나로부터 받은 영향이라는게 상당히 심각한 수준임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부정 못한다.
봐라, 정의를 위해 마족을 한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일치의 주저함이 없다. 궁정 마법사들이 알면 입으로 거품 물고 쓰러질 사태다. 세일룬의 제2왕위 계승권자의 방으로 당당하게 마족이 들락거리고 있음이다. 음, 마족이 아니라 어쩌면 설탕 단지 귀신인지도 모르겠다만.

『약속한 딸기 쿠키는?』
『그게 말예요,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쳐서 요즘 농촌에선 딸기 수확이 어렵대요. 대신 이거 준비했는데... 커피 무스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제로스 오빠.』
『아뇨아뇨아뇨, 그거도 좋아요~♡』

수신관 제로스에겐 나쁜 버릇이 하나 있었다. 과자를 주면 아무나 따라간다는... 달콤하고 부드러우면 두말할 가치도 없다. 당밀에 파리 달라붙듯 그는 어디에서고 따라왔다. 돼지 고기에 유황 가루를 버무려 에헤야디야 덩실덩실 춤 추지 않아도 되었다. 마물을 불러내기는 아주 쉬웠다. 코코아 차와 과자를 준비하고 가만히 숨 죽여 기다리라. 그러면 마물은 손을 내밀어 그대의 제물을 즐겨 받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손을 가진 잔혹한 보랏빛 광기가 온다.

『자, 아멜리아님. 그래서요?』
『잘 아시잖아요. 제로스 오빠.』
『당신의 소원...』
『납치당한 공주님을 구출하는 히로인이 되고 싶어요.』
커피 무스로 스푼을 집어넣으면서 제로스는 스산하게 미소지었다.
『알았습니다. 공주님 분부대로 합지요. 대신...』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는 건지 이미 알고 있어요.』
『기브 앤 테이크.』

아침 일찍 나타난 제로스는 우편 배달부 흉내를 내는 것으로 리나의 경계심을 풀어버렸다.
『편지 왔어요, 리나님.』
마족군의 편지 배달,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그 위대한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제로스는 별다른 군소리 없이 공짜로 그들에게 봉사했다.
제르가디스는 그런 제로스를 볼 적마다「우리들의 편지를 뜯어서 읽어보곤 동향을 감시하는 거야」라며 찜찜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연락하기 어려운 상황일 적에 제로스를 요긴히 활용할 수 있음을 부정하진 않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다. 제로스에게 간단한 안부 편지 배달을 부탁하는 건 이미 리나 일행에겐 일상적인 일이었다. 숨길 것도 없다. 정말로 중요한 건 다른 방편으로 전달한다. 제로스는 편할 적에나 이용해 먹는 일종의 배타 버전 무료 배포 소프트웨어였다.

리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멜리아로부터 날아온 편지를 받아들었다.
『호오~ 그런 것이더냐?』
구석에 앉아 아멜리아의 편지를 줄줄 읽어나가던 리나는 득도를 했다며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딱 때렸다. 제로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뭐가 그리 재미있길래 웃으시는 거예요?』
『뭐라고 적혔느냐고? 훗- 기대하시라. 아멜리아 작, 생의 찬가 옵션 버전!』
『컥!』
『도망가긴, 어딜! 자자, 어디 시작해 보실까용.』

제로스를 골려먹는 건 즐거웠다. 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편지에 적혀진 내용 그대로 따라했다. 랄라~ 노래는 재미 있다.
『나는 계란말이가 좋아요, 좋아요~♬ 아침 햇살에 하품하면 좋아요, 좋아요~♬ 방긋 웃는 아기가 좋아요, 방실 웃는 엄마가 좋아요, 좋아요~♬ 실실 웃는 수신관이 좋아요, 좋... 좋... 좋아요?!』
잘 따라 부르다 말고 순간 리나는 당황했다. 이거 뭐야.
『나도 리나님이 좋아요!!』
제로스는 리나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불과 몇 초 뒤에 자신의 몸이 찢어진 걸레마냥 끔찍한 형상으로 변할 거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당장의 행복에 미래의 처참함을 잊고 보는 수신관이었다.
몸이 세로 두 짝으로 찢어진다는 느낌따윈 개나 먹으라지. 반드시 그대의 공주님을 납치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 정의의 용사가 되어 구하러 오세요! 고맙소이다, 아멜리아 전하.


★★★ 3월 11일 ★★★

그것은 묘한 광경이었다. 가우리는 제르가디스의 앞으로 놓여진 후추통을 붙잡기 위해 리나의 어깨에 한쪽 팔을 기댄 채 개울가에서 헤엄치는 자세를 취했다. 가뜩이나 좁은 테이블, 가뜩이나 소란스러운 식탁에서의 그의 가슴 활짝 포즈는 곧 모두의 논란거리로 주목되었다. 포크를 쥐고 샐러드를 찍으려고 맘 먹고 있던 제르가디스는 갑자기 나타난 시거먼 그림자에 놀라 의자 채 뒤로 물러났고, 쥐고 있던 닭다리에 매콤 칠리 소스를 바르려고 리나는 엉겹결에 소스통을 거꾸로 뒤집었다.

『가우리 가브리에프군, 그 굵은 팔뚝으로 식탁을 횡단하는 건 반칙이야. 제르에게 후추통을 건네달라고 부탁하면 어디가 큰일 나?』
리나의 잔소리에 가우리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큰일 나.』
가우리는 평소 때와는 달리 눈빛을 차갑게 번득였다. 그리고는 힘들게 잡은 후추를 방금 서빙되어진 소시지 볶음 위로 뿌려댔다.

『이런... 며칠 전의 배탈 건으로 나에게 앙심을 품은 거냐, 가우리?』
제르가디스가 질문을 던지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동시에 가우리는 그답지 않게 버럭 고함질렀다.
『그건 단순한 배탈 수준이 아니었어! 너도 죽었다가 살아나봐! 제가르디스!』
『제.르.가.디.스.다.』
『하여간!』
해파리는 질기다. 중국집에서 나온 해파리 냉채를 재주껏 분쇄하려면 수십 번에 걸쳐 어금니를 잘근거려야 한다. 뭐? 그건 쫄깃거리는 거라고? 넘어가도록 하자. 미야의 어금니는 오징어를 씹다 두쪽이 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음이다. 믿든 안 믿든 질기다.
어쨌거나 여기서의 요점은 가우리가 질긴 해파리였기에 망정이었다는 거다. 제로스가 만든 음식을 먹고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제로스가 만든 수프 한 사발의 향기는 황금 용을 단번에 쓰러뜨리고도 남는다는 소문도 있다. 비록 작은 알갱이의 사탕이었다 해도... 짜고, 시고, 맵고, 쓰고, 떫었다. 그걸 입에 물었으되 살아남았다는 건 충분히 기적이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식사가 다 끝난 후, 제르가디스는 가우리를 끌고 뒷뜰로 갔다.
『가우리. 여기를 봐.』
『나 안 꽁했어.』
『그럼 사람 얼굴을 보고 말해.』
『괜찮아. 됐어.』
많이 화났나 보다.
민망하기도 하지... 제르가디스는 허리춤에서 사과 두 개를 꺼냈다. 가우리 하나, 나 하나.
『잘못했다. 내, 사과한다... 사과도 하고, 이 사과도 줄게. 가우리!』
그리고 다시 주머니를 뒤져 사탕 봉지 하나를 더 주었다.
『덤으로 사탕도 받아. 받아줄 거지? 이건 건너 가게에서 사온 거야. 제로스가 만든 거 아냐. 먹어도 탈 안나는 거야. 그러니까 그만 화 풀어.』

정에도 약하지만 먹을 거엔 더더욱 약하다. 가우리는 눈의 힘발을 스륵 풀었다.
『사과... 받을 거지?』
『응.』
『그 이후로 사탕은 질렸지? 두었다 나중에 먹고... 그건 그냥 넣어둬. 배도 부르니까 지금은 사과만 먹자.』
『응.』
그렇게 해서 가우리는 제르가디스의《사과》를 두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와삭, 와삭. 뒷뜰에 자리한 두 남자가 맛있게 사과를 베어먹는 소리는 잠시 동안 계속되었다.


★★★ 3월 13일 ★★★

아직은 이른 저녁, 그래도 글을 쓰고 읽기엔 방안은 어두웠다. 눈이 침침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제르가디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등잔을 하나 밝혔다. 치익- 익숙한 소리와 함께 예의 기름 타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 그럼...』
원래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 위로는 어지럽게 펼쳐놓은 책들이랑 양피지 묶음 다발, 잉크와 펜이 두서없이 뒹굴고 있었다. 의자에 앉기 전, 그는 테이블에 손을 짚고 서서 방금 전까지 끄적거리고 있던 양피지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자신의 필체였음에도 무척이나 낯설었다.
생명의 서, 그것의 사본.
키메라 합성술에 관한 내용들이다. 세포와 세포 간의 세포물질을 상호 교환시킬 수 있는 세포 간 교량 형성, 급속한 세포의 융합, 두 개의 핵이 공존하는 커다란 모 세포의 창조, 세포질과 유도체... 융합 촉진제... 화학적 메스...
어쩌면 안경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순간적이나마 글자가 흐릿하게 보였으니까. 그러면 될까 싶어서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봤다. 아프도록 눌렀다. 여전히 글자들은 흔들려 보였다.

『적을 이기기 위해선 상대를 알아야 한다. 과연 그렇군요.』
『뭐야, 제로스.』
목소리는 침대 쪽에서 들려왔다. 하여간 쇠 귀에 경 읽기라는 말은 마족 귀로 인간 예의 범절 읊기로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문으로 들락거려라, 남의 방으로 들어갈 적엔 반드시 노크부터 해라, 사람다운 기척을 내고 접근해라 등등, 귓바퀴가 닳도록 떠든 내용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제로스는 저 좋은대로 잘 살고 있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침대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저 편한대로 싱글싱글 잘도 웃었다. 기분 좋다는 듯이 들썩들썩 몸도 움직였다.

『이 침대는 쿠션이 참 좋군요.』
『어린애처럼 먼지 피우지 마. 난 지금 머리 아퍼.』
그러면서 제르가디스는 반대편 벽을 손가락질 했다.
『날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 리나 방은 저쪽이야, 수신관. 장소가 틀렸지 않아?』
이에 제로스는 희극적으로 얼굴을 갸웃거리며 짐짓 고민하는 투의 제스츄어를 취했다.
『흐음, 제르가디스씨는 차갑네... 정말로 리나님 방으로 확 가버릴까.』
『됐다. 내가 잘못했다. 차라리 그냥 여기서 죽치고 있어라.』

며칠 전이다. 제로스가 슬리퍼에 납작하게 짓눌린 바퀴벌레 형상으로 변했던 건 말이다. 굴러다니는 검은 넝마를 직접 눈으로 봤던 제르가디스는 다시금 큰 소동이 벌어지길 원치 않았다. 당분간은 리나와 제로스를 떼어놓는 것이 더 좋았다. 한 번 화가 난 리나는 주위 사정 봐주지 않고 광적으로 날뛰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약간의 냉각 기간을 가지는 편이 모두에게 이로웠다. 수신관 잡겠다고 휘날린 주먹에 엉뚱하게 얻어맞고 기절한 경험도 있거니와... 하여 제르가디스는 두말 없이 제로스를 붙잡아 두고 리나에게 가지 못하게끔 조처했다.

제로스는 느긋하게 뒷통수를 긁어댔다.
『사실 오늘은 리나님이 아니라 제르가디스씨를 보러 온 거예요.』
『섬뜩한 소리! 누가 들으면 우리 둘이서 연애한다고 오해하겠다.』
『헤에~ 오해하면 안되요?』
『넌 바이라고 해도 나는 노멀이거든. 남자보단 여자가 더 좋아.』
『거짓말. 노멀이라는 사람이 남자에게 사탕을 줘요? 베에-』
역시나 따지러 왔군.
제르가디스는 펼쳐져 있던 책을 도로 덮고 잉크병 뚜껑도 닫아버렸다. 시시콜콜 자신의 행동을 제로스에게 설명할 의무따윈 없다. 그래도 제르가디스는 그래야겠다 생각을 했고... (뒤로 미루었다간 후환이 두렵다) 제로스를 향해 작정하고 돌아섰다.

『가우리에게 내 실수를 사과하기 위해 사탕을 줬다고 말한다면 넌 뭐라고 할테냐.』
『거짓말 하지 마, 이렇게요.』
『그럼 진실은 뭐라고 생각하나?』
제로스는 침대에 앉은 자세 그대로에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리나님 드리라고 가우리씨에게 사탕을 건네준 거죠? 거의 죽게끔 배탈난 경험이 있으니 가우리씨는 당분간 사탕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에게 받은 사탕은 계속해서 짐꾸러미 속에서 안전하게 잠을 자겠죠.』
완벽하다. 약간의 날짜가 지나고 난 다음에 문제의 3월 14일, 넌지시 이야기를 끄내 사탕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만 시켜주면 이야기는 종결된다. 가우리 짐꾸러미 속으로 든 사탕... 먹거리엔 귀신인 리나는 냄새를 맡을 것이고 당연히 오른손으로 낚아채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해피다.

- 웬 사탕이야? 가우리.
- 응? 무슨 사탕?
시일이 이미 지났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수중으로 사탕이 들어왔는지 가우리는 새까맣게 잊어먹을 것이 분명하다.
- 어머, 나 주려고 준비한 거지? 맞지?
- 응?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나에게 사탕이 있었어?
- 부끄러워 하긴~ 고마워, 가우리! 잘 먹겠어.
리나는 기뻐할 것이다. 완벽하다. 그녀가 좋아한다면 다른 건 필요 없다.

『어떤가요? 제 추론이?』
제로스는 진지하게 물어왔다.
『핑퐁이다.』
제르가디스는 쉽게 인정했다.
『정말 당신이란 분은 세상을 어렵게도 살고 계시네요.』
『상관 마라. 너에게 동정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제로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준비체조겸 두 팔을 휘휘 휘둘렀다.
『아뇨, 몰라서 그렇지... 동정을 받을 이유는 매우 많답니다. 불쌍도 하셔라... 자, 제르가디스씨! 잠자코 저에게 납치당해 주시길!』

단지 가우리에게 준 사탕에 대해 묻기 위해 제로스가 행차했을까?
설마, 그렇게 한가한 마족이 있을소냐. 제로스는 음침하게 미소지었다.
- 아멜리아님의 부탁이 있어서 그럽니다만... 제르가디스씨를 며칠 빌려가겠습니다.
- 공짜로는 안돼, 제로스.
- 알아요, 알아. 이렇게 허락 맡으러 왔잖아요, 리나님. 그럼?
- 금화 열 두개다. 상대가 너니까 싸게 해주는 거야, 알지?
- 고맙습니다~♡
- 데려가는 건 좋은데 몸에 상처내지 마.
- 그럼요, 리나님의 혈족에게 함부로 손댄 나머지 소멸하고 싶진 않아요.

제르가디스는 앙칼지게 비명 질렀다.
『리나 인버스!! 감히 날 금화 열 두 개에 팔아?!』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일단 공주님이 납치되어야 히로인이 구하러 온답시고 출동할 수 있으니까.


★★★ 3월 13일 ★★★

여기는 불특정 공간인 어딘지 모르는 으슥한 동굴.
왕자가 아니라 공주랜다. 그 부분에서부터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위는 녹아 용암이 되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제르가디스는 버럭 소리 질렀다.
『어째서!!』
『그림이 되잖습니까. 악마에게 잡혀간 아름다운 공주, 그리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마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정의의 용사. 자, 그러니까 제르가디스씨? 분장을 하셔야지요. 드레스도 이미 마련해 두었구요, 화장품 세트도 최고급으로 다 구비해 두었답니다. 얼랑 바지나 벗고 이리 오세요.』
『저, 저리가지 못할까?! 더 이상 가까이 오면 혀 깨물고 자결할테닷!』

배우는 끝장나게 앙탈을 부렸다. 그리하여 오늘의 분장사는 엉겹결에 뺨을 얻어맞았다. 냄새 고운 파우더 통을 들고 있다가 눈앞으로 별이 번쩍였다.
아이고오오오~ 아까운 진주 가루분을 절반이나 쏟고 말았다. 제로스는 울상지었다. 아무래도 이거 일이 쉽지 않게 생겼다.

『너무해! 이 아까운 걸!』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저리로 치워! 죄다 엎어버리기 전에!』
『왜 싫다는 겁니까. 예쁘게 만들어 주겠다는데!』
『멋있어지는 건 좋지만 예뻐지는 건 싫어! 난 여자가 아니야!』

제르가디스는 다시 한 번 더 힘 주어 제로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덕분에 제로스는 쥐고 있던 샤넬 립스틱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쉬피드 맙소사! 알다시피 화장품이라는 고가품이다. 가뜩이나 쥐꼬리만한 예산 걱정으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써보지도 못하고 납작하게 짓뭉개진 립스틱이라는 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는 남자라서 잘 몰랐다. 부러진 립스틱도 사용할 수 있다. 약한 불에 중탕으로 녹여 다시금 그릇에 넣고 굳히면 그럭저럭 써먹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때문에 제로스는 거금 8만 6천원을 일시에 날렸다고 생각했고... (8만 6천원을 슬레이어즈 세계의 금전적 가치관으로 환산하면 과연 얼마일까?) 따라서 무섭게 화를 냈다.

『리나님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죽는 시늉도 할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아멜리아님을 위해서는 치마 입고 화장을 할 수 없다는게 말이 됩니까?!』
『시끄러. 하여간 난 너희들 장난에 놀아나고픈 맘은 하나도 없어. 아멜리아에게도 나중에 한 마디 따끔하게 해둘 거다. 사람을 우롱해도 이럴 수는 없다. 난 지금 심각하게 불쾌하다구.』
『모르시는 말씀! 이 모든 건 장난이 아닙니다, 제르가디스씨.』
그렇다. 장난은 아니었다. 이쪽에서 분홍 치마 입고「살려주세용~」하면 하얀 망토 A가 들입다 나타나서는 온갖 개폼 다 잡고「구하러 왔소, 공주~ 이젠 울지 마시오~」이럴 거라 생각했는가?
『생각했는데.』
『만만하게 판단하셨네요.』

공주 배역을 맡은 사람은 약간의 불량품이긴 했다. 일단 성별이 남자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무대 소도구까지 대충대충 마련하라는 법은 없었다. 제로스는 다시금 특대 체리 케이크를 상납받았다. 기운은 펄펄 솟아올랐다. 그래서 동굴 입구로 한 타스의 브라스 데몬을 깔아놓았다. 마법 실력이 상당하다고 해도 12대 1의 승부다. 아멜리아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싸워야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큰 부상을 입고 죽을 수도 있다.

제르가디스는 입을 쩍 벌렸다.
『지금 뭐라고.』
『그러니까 빨리 공주 분장을 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공주가 이러고 있으면 브라스 데몬 녀석들이 기를 쓰고 아멜리아씨의 동굴 입장을 막아댈 거란 말예요? 하는 수 없죠. 히로인이 너무 일찍 들어오면 이야기가 틀려지니까...《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공주 어디 갔어요?》하면 큰일이잖습니까. 그렇죠? 결국 데몬들은 온 힘을 다해 아멜리아씨와 맞서 싸울 겁니다. 물론 제르가디스씨가 치마만 입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제로스는 약을 올리듯 분홍 드레스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이런! 당장 이리 내!』
신발을 벗고 하이힐 속으로 발을 꾸셔넣었다. 급하다, 급해! 진주분을 덥썩 잡아 뺨에다 마구 문질렀다. 립스틱? 아무거나 잡아서는 대충 북북- 아이새도우? 그것도 손가락으로 대충 북북- 패티코우트는 생략했다. 허전한 가슴? 휴지를 마구 집어넣고 부풀렸다. 거울을 볼 시간이 어디에 있을소냐. 아차하다간 아멜리아가 다친다. 허리끈을 질끈 졸라매면서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깡총깡총 뛰었다.

『제기랄! 공주는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아멜리아를 이리로 불러... 불... 어? 아멜리아?』
어느 틈엔가 하얀 그림자가 그 반대쪽에 서 있었다.
『패역무도한 괴물 악당이여! 정의의 용사가 드디어 도착했다! 네놈이 납치한 공주를 어디에 숨겼느냐! 하늘이 슬퍼하고 땅이 울부짖는다!』

제르가디스의 태도가 급변하기가 무섭게 제로스 또한 급히 괴물들을 치웠던 것 같다. 머리에 혹이 나고 눈두덩이가 퍼렇게 변색되긴 했어도 아멜리아는 무사히 도착했다. 숨소리가 다소 거칠긴 했어도 별 이상은 없었다. 핏자국도 없다. 기운은 멀쩡했다. 씩씩하게 외치며 제르가디스를 손가락질 했다.
『자, 색마 도깨비여! 아녀자를 희롱하는 자를... 으득! 용서할 수 없다! 윌 테슬라 아멜리아 세일룬이 심판을 내리겠다!』
『어이.』
『공주는 어디있느냐!』
『내가 공주다... 넌 믿지 않겠지만.』
거울을 들여다 보고 정성스럽게 화장할 것을. 제르가디스는 눈 감고 포기했다.
『천벌을 받을! 감히 정의의 용사를 속이려 하다니! 화이어~』
아무래도 올해엔 아멜리아가 받을 사탕이 없을 듯?


★★★ 3월 14일 ★★★

방금 목욕하고 나왔음을 증명해주는 젖은 머리결, 그리고 피부로 잦아든 은은한 비누 향기... 그야말로 촉촉한 느낌의 한 떨기 꽃송이였다. 누가 지금의 그녀를 보고「드래곤도 피해가는 재수 원단의 마도사」라 여길 것인가! 고민에 빠져 길게 속눈썹을 드리운 모습이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어 주었다. 어느 누구라도 날개짓하고 날아가 넌지시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도록 말이다.
슬퍼보이는 입술, 그리고 기운 잃은 목덜미... 비록 손수건을 들어 팽-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코를 푸는 건 좀 그랬다만서도...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어 소리 죽여 조용히 우는 여자만큼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건 없다.

『...』
제로스는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는 재주껏 거꾸로 매달렸다. 멀리서 보자면 달밤에 박쥐 한 마리가 잠시 쉬고 있구나 착각할 법도 했다. 박쥐 치고는 사이즈가 상당히 오버했지만 뭐, 멀리서 보면 그랬다는 얘기다.

붉은 빛깔을 지닌 중력은 마족을 세차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약간의 심란함 때문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춥지 않느냐 넌지시 물어보면서 리나의 어깨로 한쪽 손을 얹고 싶었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도 보아서는 안되는 것.
누구도 보아서는 안되는 것.

때마침 제르가디스도 자리를 피했다. 단 둘밖에 안 남았다. 뭐,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성질의 건 아니다. 여차하면 여러 명이서 무리지어 몰려다니곤 했지만 원래가 갈 곳을 딱히 정해놓지 않고 아무렇게나 떠돌아다니는 여행자들의 신분이었다. 만나고 헤어짐은 일상적인 일이다. 어제는, 오늘은, 그리고 내일. 그들은 흘러가는 대로 잘 살았다. 어쩌다 단 둘이서만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해도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인가는 마도사와 검사가 아닌, 여자와 남자가 되는 날이 있는 법이다.

『날씨 좋다~』
『엥? 금방에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걸, 리나.』
『내.가.좋.다.고.하.면.좋.은.거.야.불.만.있.나.가.우.리.』
『없어! 없어!』

협박 비슷하게 되었다만, 어쨌거나 요점은《네가 있어 나는 진정으로 행복하다》이다.
간사하기도 해라, 여자의 마음이여! 휴지로 만든 장미꽃일지언정 그게 내 님이 준 거라면 천금보다 더 귀함이다. 사금파리 조각도 그대의 손길에 닿아 정금보다 더 귀해질 수 있다. 싸구려 박하 사탕 또한... 여태껏 먹어보지 못한 드래곤 풀 코스 요리보다 더 강렬한 맛을 자랑하게 된다.
리나는 짜릿하다며 손에 쥔 사탕을 혀 밑으로 돌렸다.
『어째서 내 양말 틈바퀴로 사탕 봉지가 들어가 있었을까. 그것 참 요술이지.』
가우리는 영문을 몰랐다. 쨘~ 하고 어느새 나타난 사탕은 양말꾸러미 아래서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훗- 딴청부리긴. 뭐, 아무튼 다 좋아.』
『리나, 너 오늘따라 좋다는 말을 참 자주 한다?』
『그냥. 그럴 수도 있잖아?』

하여 리나는 꿈 꾸었다.
신마저 질투한다는 열 여섯 청춘...
손바닥 안으로 땀이 고였다.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다. 그렇다. 오늘은 그녀가 처녀로 지내는 마지막 날! 그게 김칫국이든 아니든, 리나는 그 벌거죽죽한 각오를 목구멍 안으로 꼴까닥 집어삼켰다. 가우리가 손만 내밀면 마도사는 여자로, 검사는 남자가 될 것이다.
리나는 별안간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이... 마지막.

『얼레? 갑자기 왜 그래? 뺨이 새빨개.』
『아무 것도 아냐.』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상대는 평범한 남자가 아닌, 말 그대로 쿼터 엘프! 벌거벗은 여자가 코 앞에서 멱을 감고 있어도 늘어져라 하품을 할 수 있는 천연덕스러움이 가증스럽다. 누드 사진이나 춘화를 봐도 절대적으로 멀쩡하다. 어른들만의 키스도 잘 모른다. 그야말로 뽀뽀만 할 줄 안다. 오늘 밤을 아무렇게나 보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도... 그가 열렬하게 호응해줄련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다.

『쥔장, 여기 방 하나.』
『뭐어? 하나? 어째서?!』
『노잣돈이 부족해. 하는 수 없잖아. 방 두 개를 빌리기엔 능력이 딸려.』
그렇게 말하기까진 결코 쉽지는 않았다. 여관 주인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짓지, 주방 아줌마는 헛기침 하지... 오늘 그들은 누가 봐도 마도사와 검사로는 보여지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였다. 리나는 새빨갛게 변해 발만 쳐다봤다.
합방이다.

『아, 피곤하다- 가우리? 내가 먼저 목욕할게.』
『응.』
소파 쪽으로 가서 두 다리 쭉 뻗고 앉은 가우리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리나는 욕실로 튀었다. 살이 다 떨렸다. 일부러 물소리 좍좍 내면서 샤워했다.
『가우리?』
수건만 감고 얼른 나왔다.
『다 됐어.』
난 준비 되었거든? 날 맘대로 해도 괜찮아.
『뭐해?』
나도 부끄러워. 하지만 고개 숙이지 마.
『가우리?』
『드르렁-』
『가우리?』
『음냐~』
그런 고로 밖으로 튀쳐나가 엉엉 울지 않으면 여자가 아닌 것이다.

『제로스!!』
『네, 넷! 저 말이옵니까.』
기척도 없이 대롱대롱 나무에 매달려 있던 제로스는 화들짝 놀랐다. 벼락같이 고함지르는 리나 덕분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덕분에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훔쳐보고 있음을? 숨조차 쉬지 않았는데? 제로스는 허겁지겁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색기가 없어? 매력이 없느냐구!!』
『아, 아니... 그러니까...』
『그래!! 나 가슴 작다!! 어쩔래!! 죽을래?!』
『지, 진정하세요.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시끄러!! 나라고 덜 자라고 싶었겠느냐구!!』
『그만해요. 당신은 지금 너무 흥분했어요.』
하는 수 없었다. 제로스는 살짝, 아주 살짝... 리나의 뺨을 톡 때렸다.

소파에 기대어 열심히 졸던 가우리는 어이가 없었다. 목이 부러져라 흔들며 제로스가 그를 깨웠다. 무슨 일? 가우리는 부지런히 눈을 부볐다. 여관방 지붕이 꺼지기라도 했던가, 아님 야산에 불이라도 났는가. 얼핏 보아하니 침대에 누워 자고 있어야 마땅한 리나까지 담요를 둘둘 뒤집어 쓴 채 도끼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이리 내려 오시지요.』
제로스는 힘 줘서 가우리를 끌어내렸다. 아차하는 사이에 바닥을 굴렀고, 이어 담요가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뭐가 뭔지, 셋은 무릎을 맞대고 좁은 방구석에 둥글게 앉았다.

『졸려. 리나... 넌 안 자? 오밤 중에 제로스까지 불러놓고 뭔 일이야?』
가우리의 질문에 제로스는 대답을 이렇게 했다.
『안녕하십니까. 전설의 고향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오늘의 이야기 제목은... 드라마 스페샬,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16세 소녀의 젊음의 열기... 각본 아무나, 해설 틈틈히. 음향 효과 전천후 리나 인버스.』
그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 가우리는 엉겹결에 하품을 삼켰다.
그걸 제로스는 힘 주어 노려보았다.
『참으십시오. 오늘 밤은 절대로 잠들면 안 됩니다, 가우리씨.』
『왜? 그냥 자면 안돼?』
『안 됩니다. 잠들면 죽습니다. 그러니 아무거나 재미있는 이야길 하십시다. 아무거나.』
『리나? 영문이나 좀 알자.』
『미안해. 오늘은 아주 특별한 밤이야.』

특별하다고? 뭐가?
눈은 자꾸만 감겼다. 가우리는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 졸린 눈을 비볐다.
『옛날 옛적에 담배를 먹는 호랑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 아니고요?』
『옆에서 훈수깔지 마, 제로스. 자, 가우리? 계속해.』
『호랑이는 호랑이, 나비는 나비... 나비라 착각한 호랑이... 우, 졸려.』
제로스는 손을 오무려 벽에다 나비 그림자를 만들었다.
팔랑팔랑... 그림자 나비가 리나의 머리 위로 올라가 앉았다.
『옛날 옛적에 예쁜 소녀가 살았습니다. 소녀가 살았습니다... 소녀가 살았습니다... 소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