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에 턱받침을 하고 앉아 그는 지긋이 웃었다.
할 일이라곤 난감해하는 여자를 골리는 것밖에 없다는 투로 리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기에 뭐랬어요, 후회하게 될 거라고 내 그랬죠?』
새우 볶음밥 속에서 기다란 머리카락을 집어 올린 리나 인버스는 여느 때완 달리 반박을 하지 못했다.
아아, 구역질이 절로 나오려 했다. 오만상을 찡그린 채 손을 뻗어 적당한 빈 그릇을 찾았다.
눈치 하나는 빨라 제로스는 얼른 물컵을 건네주었다.
퉤...
리나는 그 즉시 누렇게 물 찌꺼기가 낀 더러운 컵 안으로 입 안에 든 내용물을 고스란히 뱉어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삼킬 것과 삼키지 말아야 할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법.
리나는 어지럽게 흘러내린 앞머리를 귀밑으로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3일간이나 산행을 했다. 야생 곰도 아니건만 계곡물에서 생선을 잡고 가재를 잡아 구워먹었다. 사냥 솜씨들은 하나같이 일품이라 그동안 배를 곪은 적은 없었지만... 변변찮은 양념 하나 없이 불에 굽기만 한 물고기는 맛이 없었다. 입 안에 넣고 죽어라 씹고 있으면 이게 고무인지 진흙인지 구분이 안 갔다. 삼키려고 애쓰면 눈물이 나왔다.
옛 말에 이르기를 시장이 반찬이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다. 밍밍하고 맹숭맹숭한 맛을 강요받는 마당에「이것도 감지덕지 하시오」라고 말하면 화부터 나는 법, 리나는「나는 산짐승이 아니란 말이야~!」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열매는 철이 아니라서 지옥의 푸딩처럼 떫었다. 버섯은 퍽퍽했고, 잎사귀는 시큼했다. 한 마디로 배는 채웠으되 영양가는 없었다. 맛있는게 그렇게 먹고 싶을 수가 없었다. 단맛, 짠맛, 매운맛, 고소한 맛, 오묘한 맛... 물처럼 싱거운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눈물 질질 흘려가며 감상이라는 걸 하고 싶었더랬다.
만사 제쳐두고 마을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음식점부터 찾아 해맨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인간이 조리한, 진정한 음식이라는 걸 배 터지게 먹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참을 수 없구먼. 제대로 조리가 되어 훌륭하게 양념이 벤 음식이 나오기를 목이 빠져라 고대했더니 이렇게 배반을 때려도 되는 거냐!』
덮밥 위로 씌워진 계란 프라이는 질긴 가죽 같다. 뿌려진 소스는 찐떡찐떡했으며, 밥알 자체는 기름만 잔뜩 먹어 닝닝했다. 조리가 덜 된 새우는 뻣뻣했고, 곁들여진 야채는 폭삭 삭아 있었다. 설탕에 간장은 뒤범벅... 살인적이다. 밥 숟가락을 들고 음식을 요리조리 휘저어보던 리나는 이윽고 포기의 눈빛을 띄었다. 입속에 넣으라고 누군가 옆구리로 단검을 들이대지 않은 이상, 이런 개밥을 먹어야 할 의무 따위는 없다.

리나는 허탈감과 짜증을 담아 숟가락을 던졌다.
이건 범죄다. 양심이 있다면 이런 걸 돈을 내고 사먹으라고 할 수는 없다.
『화난다! 여기 음식점 맞아?!』

글세올시다. 여기서 제르가디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음식 메뉴판을 펼쳐보지도 않은 채 단단히 팔짱만 끼고 있던 소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번만큼은 리나가 실수한게 맞다. 아무리 화덕에 커다란 냄비가 걸려져 있었다고 해도 이 가게엔 들어와선 안 되는 거였다.
동의를 구하듯 맞은편 의자에 앉은 가우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우리 또한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매우 심각한 표정이다. 덧붙여 희미하게 이 앓는 소리까지.
무어라 딱 꼬집어「이게 잘못된 거야」라고 조리 있는 설명을 할 수 없음이 그저 통탄스럽다.
다만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오싹한 기운에 절로 아랫턱이 꽉 다물렸다.
카운터에 앉아 유리컵을 닦고 있는 주인장의 표정에서, 구석진 자리에 삼삼오오 둥글게 모여 앉아 카드를 돌리고 있는 술꾼들의 뒷 모습에서, 뿌옇게 흐려지는 담배 연기 속에서... 곧게 날이 선 악의가 느껴졌다.

가우리는 걱정을 가득 담아 리나를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곳은 여자애가 있어서는 안될 장소이다. 똑딱거리며 움직이는 벽시계의 유리창으로 희번득거리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반사되었다. 여기가 음식점이라고? 가우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밥을 먹기 위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눈빛은 저렇지 않다. 저들의 굶주린 시선이라는 건... 남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여자애를 다치게 하는 종류의 굶주림이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가우리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르가디스를 불렀다.
『어이?』
『알고 있다.』
제르가디스는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옆구리에 찬 검집으로 손을 내렸다.

그게 신호였다.
김 빠진 맥주를 홀짝거리던 건장한 몸집의 사내 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짜고짜 의자를 집어 제르가디스에게로 집어던졌다.
『성가셔.』
날아오는 의자를 발로 걷어차 당장 부수고 보았다. 곧이어 날아드는 빈 술병은 눈 감고 이마로 그냥 처리했다. 다행이 돌이 박힌 머리라 데미지는 거의 입지 않았다. 제르가디스가 앞머리를 만지며 자세를 가다듬는 동안 가우리는 바닥에 깔린 깨진 유리 파편을 발로 걷어찼다. 행여라도 실수로 병조각을 밟는 날엔 이불 대신 발바닥을 실로 꿰매야 한다. 그래서 이리저리 차는 동작은 급하고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이!』
내친 김에 주먹을 휘둘러대는 사내들의 얼굴도 같이 걷어차 주었다.
유리를 같이 치워주겠다고 나서지는 못할망정 징그럽게 방해만 하고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얼른 테이블 밑으로 쭈그리고 앉은 리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개밥을 먹으라고 한 것만으로도 서러워 죽겠는데 이번에는 몽둥이를 들고 때리려고까지? 어쩜.
『이봐? 나는 아직 이것도 사람 먹는 음식 맞느냐고 그러면서 거칠게 항의하지도 않았다구. 이제 막 주방장 나오라고 고함을 지르려는 판국이긴 했다지만... 아직은 안 했어! 안 했다고! 어이?!』

슬프게도 리나의 항의에 귀를 기울이는 작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쨍그렁 소리를 내며 이 빠진 접시가 굴러왔다.
당근 찌꺼기가 고스란히 붙어있는 접시를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니 어째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우리 그냥 밥 먹게 해주면 안 되는 건가요.
손가락으로 떨어진 피망을 찔러봤다. 소스가 묻어 끈적거렸다. 그러자 슬퍼졌다.

가게 구석으로 집어 던져진 사내가 우당탕탕 굉음을 내며 굴렀다.
「덤벼봐, 덤벼보라구. 이 개자식!」라며 욕하는 제르가디스의 외마디 고함소리가 귀를 찔렀다.

『꽤 소란스럽네요.』
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옆을 보았다. 어느 틈에 테이블 밑으로 자리를 옮긴 제로스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비싯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애시당초 생겨먹기를 만리장성이 날벼락을 맞고 와르르 무너져도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을 놈이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소동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한가롭게 콧잔등이나 긁고 있으면 보는 사람은 위장이 뒤틀릴 수밖에 없다. 어디 그뿐이랴, 이 빠진 접시와 포크를 주워다가 눈앞으로 나란히 늘어놓았다.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둥글게 말고는 리나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헤헤헤♡ 여보, 식사하세요.』
『너, 너, 너라는 마, 마족 녀석은~!! 이 와중에 소꿉장난이 나왓?!』
이 난리통에 소꿉장난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제로스는 누가 뭐래도 마족 맞다.

투명한 돌멩이... 가 아닌 유리컵이 코앞에서 폭발하듯 깨져나갔다.
리나는 허겁지겁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 파편에 눈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했다.
동시에 그녀는 억제하지 못할 수준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음식점에선 오로지 밥만 팔도록 하라. 난투극 금지, 폭력 반대!
수저통이 넘어지면서 젓가락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리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상체를 굽혔다. 동시에 튼튼한 지붕 역할을 해주던 테이블이 뻥 하고 날아갔다.
「그동안 내 머리통을 지켜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테이블이 거꾸로 뒤집혔으니 무턱대고 같은 자리에 쪼그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오른쪽으로 재빨리 몸을 굴려 장소를 이동한 뒤, 엉덩이와 발목에 힘을 주어 벌떡 일어날 채비를 갖췄다. 그런데 아뿔싸, 이대로는「저를 죽여주세요」하고 빌어대는 형상이 될 판국이다. 여왕 폐하께 알현을 청하는 자세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있는 리나의 머리 위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혀를 깨물고 고개만 뒤로 젖혀 이를 피했다. 다음으로는 마룻바닥에 닿도록 상체를 눕힌 다음, 반동을 이용해 튼튼한 두 다리를 세차게 뻗어 적의 안면을 힘껏 걷어찼다.
『크억!』
부러진 이빨 수리는 내 책임이 아니라네.
리나는 투덜대며 벽쪽으로 빠르게 물러섰다.

『사람 성질나게. 이 자식들, 도대체 뭐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년간에 걸쳐 곳곳을 여행한 몸이다보니 척 하면 삼천리다.
이들은 모래 귀신 같은 존재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다가 운 나쁘게 굴러떨어진 개미를 한 입에 꿀꺽 잡아 먹는다. 사방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였거나 계곡이 깊어 외부와 쉽게 단절되는 곳에선 지금과 같은 모래 귀신 함정의 여부를 한 번씩 의심해봐야 한다. 토양이 척박해 농사만 짓는 것으론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가끔은 강도질을 겸업하는 산 마을 주민도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 먹는다. 상대가 남자라면 소지품을 모두 빼앗은 다음, 가차없이 살해해서 깊은 산속에 암매장 해버린다. 여자인 경우는 한층 더 고약한 짓을 당한다. 남자들에게 신나게 농락당한 뒤에 가사일이나 힘든 밭일에 동원되는 노예로 전락한다. 낮에는 쉬지도 못한 채 일하고 밤에는 침실 봉사... 그렇게 1년이면 호흡이 다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여자다!』
『닥쳐!』
팔꿈치를 단단히 세운 다음, 침을 뚝뚝 흘려가며 미친듯이 달겨드는 곰탱이 사내의 등짝을 힘껏 내리찍었다. 상대는 억 소리를 내뱉은 뒤에 그대로 자빠졌다.
숨결이 거칠어졌다. 마도사 복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대접받기는 난생 처음이다. 젓비린내 나는 어린애 취급도 불쾌하지만 이렇듯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곱절로 불쾌했다. 
징글징글한 눈빛이 해일처럼 쏟아졌다. 눈으로 옷을 벗기고 있다. 아니, 찢고 있다.
송충이 지나갔다. 하여 리나는 소리 질렀다.
『정도껏 하란 말이닷! 프리즈 애로우~!!』

물불 가리지 않고 일단 마법 주문 한 방을 거나하게 쏘아붙이긴 했는데...
그 즉시 후회스러움이 밀물처럼 가득 밀려왔다.
마도 기초 입문 교본 제1장 24절,
좁은 방안에서 마법을 사용하려면 자멸을 각오한 다음에야 하라.

턱수염이 더부룩하게 돋아난 작자와 사이좋게 검을 마주대고 힘 겨루기를 하던 제르가디스가 윽 소리를 내며 재빨리 허리를 굽혔다. 그의 반사 속도가 빛보다 빨라 천만 다행이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꽝꽝 얼어붙는 것으로 그쳤으니 말이다.
제르가디스는 얼어붙은 자기 머리카락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올려다 보곤 그 즉시 폭발했다.
『이 녀석! 나중에「너의 희생을 잊지 않을게」라고 하는 걸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그랬지!』
『쳇, 그럴 수도 있지. 쪼잔하게 화 내긴.』
『이거 다 처리하고 나서 보자. 도망가기만 해봐!』
소년은 검날을 가로로 크게 휘둘러대는 것으로 자신의 솔직한 기분을 표현했다. 덕분에 날강도 셋이 가슴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넘어졌다. 기분이 좋을 적엔 적당히 상처만 입히고 기절시키는 수준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지금처럼 신경이 긁힌 상황에서는 얘기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피보라가 튀었다. 멀직히 튕겨나가는 검들과 함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살점도 같이 날아 올랐다. 몇 명은 손가락을 잃었다. 더러는 약간의 피부 조각만 겨우 달라붙은 채 완전히 동강난 손목을 부여잡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날 검을 움켜쥔 제르가디스의 움직임엔 일말의 머뭇거림이라는게 보이지 않았다. 확실하게 무덤을 파주겠다며 피에 젖은 검날이 다시 좌우로 날아다녔다.

그렇다고 달려가「살살 해라, 아들아」라고 말릴 짬은 없다.
리나는 하느님 맙소사 하는 심정으로 태클을 걸어오는 한 무더기의 사내들을 지켜봤다.
웃기지도 않게 이 모든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과장되게 보였다. 팔을 앞뒤로 휘두르며, 눈을 부릅뜨고, 어깨 근육을 풍선처럼 부풀리고 그녀를 잡으려 했다.
리나는 장검을 소지하고 있지 않다. 크고 무거운 검을 다루는 일엔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으이그 신음하며 단검을 꺼내들었다.
조그마한 여자가 조그마한 칼을 들었으니 누가 봐도 애교 만점이다.
젓가락으로 마왕을 때려 잡는 천하의 마도사라 할지언정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그다지 위협적으론 보이지 않을 것이다. 리나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음을 깨닫고 허공에 대고 칼날을 두어 번 탁탁 털었다.
단검에 에어로 봄 주문을 걸어 제1진을 튕겨버린다고 치자. 그렇다면 2차로 달겨들 수십 명의 남자들은 무슨 재주로 처리하지? 이빨로 물어뜯어? 손톱으로 할퀼까?

바람의 주문을 빨아들인 단검이 서슬 퍼런 기운을 내뿜으며 찌링 울음을 토해내었다.
에라 모르겠다. 우선은 단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그었다.
흐느껴 우는 여자 귀신의 울음을 흉내내며 주술이 단박에 튕겨나갔다. 효과는 탁월해 한 지점으로 일제히 몰려들던 사내 넷이 가슴에 큰 타박상을 입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음이 문제다. 인해전술엔 대응할 방법이 없다. 하나 둘도 아니고 여덟이나 된다. 순식간에 그녀는 시커먼 바윗덩이 같은 이들에게 깔려 더러운 마룻바닥으로 턱을 박았다.

눈앞으로 별똥별이 반짝였다. 아프다. 얼굴에서 턱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이까짓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이전에 당혹감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단검은 빼앗겼고 입은 틀어 막혔다. 묵직하게 타고 누르는 몸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순식간에 숨이 막혔다. 자칫하다간 압사당할 판국이다. 게다가 스멀스멀 등을 타고 엉덩이로 내려가는 손바닥이라니.
『꺄아악!!!』
여자의 비명이 나왔다는 점에선 할 말이 없다. 수치스러움과 창피함... 단단하고도 커다란 손이 허리를 끌어당기면서 가슴을 쥐었다. 셔츠의 깃이 떨어져 나가면서 단추가 튕겨올랐다.
강간당할 위기다. 급한 김에 발길질을 해보았다. 그런데 차이는게 하나도 없다. 젠장이다.

『얼레리 꼴레리, 보기 흉하게 잡혔대요. 리나님, 바보.』
『제로스. 부탁이니까 혼자서 히히덕거리며 웃지 좀 말앗!!』
『어머, 리나님도. 제가 언제 웃었다고 그러시는 건가요.』
『너... 웃고 있지 않았냐.』
『천만에요. 제가요?』

렛셔 데몬이 떼로 덤벼들어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을 적에도 가뿐하게 털어내고 도망치던 실력자다. 사람 수십 쯤이야 귀찮은 날파리나 마찬가지다.
리나는 숨을 죽였다. 마른 장작이 와지끈 부숴지는 굉음과 함께 코앞으로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불쑥 나타났다. 그것도 사람의 가슴을 꿰뚫고서였다. 폐와 심장이 찢긴 사내는 벌려진 입으로 붉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선홍색의 더러운 액체가 고스란히 리나에게로 쏟아졌다.
『자, 멍청하게 있지 말고 그만 일어나십시오.』
하얀 장갑은 그대로 리나의 목덜미를 붙잡고 으쌰 기합을 넣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에게 짓눌린 채 제자리에서 일어서기란 말 그대로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감히 불평할 수는 없다.
리나는 여전히 자기 멱살을 움켜쥐고 선 제로스와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팔에 팔찌처럼 꿰어진 시체를 흔들어 버리면서 그가 똑바로 리나를 쳐다보았다.
차갑고도 감정 없는 눈동자다.
리나는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는 충동과 싸우며 휘청거리는 무릎에 힘을 주었다.
그런 리나를 보며 제로스가 그르릉 목을 울려댔다.
『리나님? 날 봐요. 나는 웃고 있지 않아요. 그렇죠?』
여느 때처럼 입꼬리가 살짝 위로 말려 올라간 주제에 제로스는 그렇게 주장했다.
『아시겠습니까. 조금은 짜증이 났단 말입니다.』

그가 오른쪽 손바닥을 펼쳤다가 합, 소리 내어 다시 접었다.
동시에 식당 안에 자리하고 있던 모두가, 리나 일행을 제외한 모두가 끔찍한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며 소복히 무너졌다. 남자들의 눈과 코와 귀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보는 기능은 이미 상실했다. 고개를 젖히고 쓰러진 남자의 귀로부터 누런 물이 새어나왔다. 짖이겨진 뇌조각이 지나치게 익한 완두콩인양 뚝뚝 떨어졌다. 순식간에 음식점 바닥이 흘러나온 체액으로 가득 찼다.

리나는 긴장하여 뒤로 두어 발자국 정도 물러섰다.
검을 들고 있던 가우리나 제르가디스도 움찔해서 몸을 사렸다.
『자자, 끝났습니다.』
제로스가 박수를 두 번 쳤다. 언제 그랬느냐며 태평스러운 표정이었다.
『다 놀은 것 맞지요? 그러니까 빨리 갑시다. 난 지루해졌단 말입니다. 어서 어서, 일어나요.』

그만 놀고 빨리 가자... 라.
테이블보에 검을 문질러 피를 닦으면서 제르가디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역시 마족인 건가.』
그들은 자주 제로스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잊어 먹곤 했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 그 얄팍한 달팽이 껍질을 벗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내는 제로스와 마주하게 될 적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단치도 않은 착각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였다.
인간이 아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실을 곧잘 망각했다.

『허리 빠졌어요, 리나님? 제가 붙잡아 드리지요.』
『아냐, 나에게 손 대지 말아줘. 혼자 일어설 수 있으니까.』
리나는 황급히 대꾸했다.
여전히 웃는 모습의 제로스는 리나의 거절에도 아랑곳 없이 이웃 나라 왕자님처럼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인간의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새하얀 장갑이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동료이다.
그러나 내일은 그 손이 리나의 가슴에 구멍을 낼 수도 있었다.
그런 마족의 손 위로... 리나의 손이 두려움을 담아 무겁게 얹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