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물이 하나 가득 담겨있는 대야로 얼굴을 내린다.
참방참방 물방울이 튀어올랐다.
가우리는 열심히 뺨을 문질러 간밤의 티끌을 벗겨냈다.

그만하면 아직은 이른 아침이었다. 사방이 훤히 밝아왔다고는 해도 뒷뜰로 자라난 이름 모를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은 채 마르지 않았다. 새벽이 온지도 모르고 단잠에 빠진 인간들의 수도 제법이다. 부지런한 아낙네들이 하품을 참아가며 식구들 깨울 채비를 서두르는 가운데 이불을 끌어안고 눈물겹게「10분만 더요!」를 애원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서서히 증가하는 중이다. 밤새 닫겼던 창문들이 활짝 열려지면서 달콤했던 지난밤의 편안함은 내일을 기약하며 환상의 세계 너머로 얌전히 물러났다. 뽀얀 안개에 섞여 군불을 지피는 희미한 연기가 지붕 위로 솟구쳤다.
따스한 그림이다. 평화스럽고, 조용하고... 언제나처럼 눈을 부비며 기지개를 켜는 사람들은 아늑한 침대를 뒤로 하고 슬리퍼를 찾아 엉금엉금 바닥으로 내려섰다.
하루의 시작이다.

슈욱, 슉슉.
덩달아 이곳 마을 여관 뒷뜰로도 누군가의 아침 의식이 한창이었다.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는 소년의 가냘픈 팔이 아름답게 둥근 궤적을 그렸다. 양손으로 가볍게 부둥켜 쥔 하얀 검날이 바람의 울음소리를 내며 공기를 깨끗하게 잘라내었다.
슈욱, 슉슉.
손목이 좌우로 꺽여질 적마다 한줄기 차갑고도 살벌한 기운이 좌우로 퍼져나갔다. 춤을 추는 듯한 동작으로 무릎을 굽힌 채 검을 잡은 팔을 수평으로 길게 뻗었다. 자유자재로 검날의 끝을 둥글게 회전시키며 존재하지도 않는 적을 희롱했다. 그의 허리가 재빠르게 옆으로 돌아갔다. 검을 쥔 오른손도 덩달아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허공을 찌른다.

『멋지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이었다. 물기로 젖은 수건을 목 뒤로 걸친 가우리는 감탄사를 섞어가며 제르가디스를 칭찬했다.

『...』
그런데 제르가디스는 일언지하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것도 아니건만 항상 그렇다. 가우리가 보내는 찬사를 그다지 달가워 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가 가우리에게 묘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목이 굵구나, 가우리. 가슴 근육도 크고. 장딴지도 탄탄하군.》
《당연하지. 내가 너보다 나이가 더 위잖아.》
《흥.》
그의 콧소리 속으로 가우리의 마음을 긁어대는 그 무엇인가가 분명 있었다. 잘난 척 하지 말라는 투의 싸늘한 눈초리... 가우리는 은근히 불안했다. 미움받을 짓을 한 기억이 없건만 때로 제르가디스는 악의를 담아 그를 지긋이 바라보곤 하였다.
《얼굴이 예쁘다고한게 마음에 안 들었나? 허리가 가냘퍼서 맵시 좋아보인다고 그랬던게 안 좋았던 걸까? 도대체 뭐가 문제지?》
제르가디스가 충분히 화를 낼만하다는 걸 둔치 가우리는 도무지 깨닫지를 못했다.

『우왓! 조심하라구. 하마터면 찔릴 뻔했잖냐. 갑자기 공격하는 건 반칙이야!』
순간 가우리는 정신이 확 들었다. 리나였다. 슬리퍼를 착용한 차림새로 어그적 걸음으로 뒤뜰로 나온 그녀가 앙칼지게 비명을 질렀다. 양치질을 하기 전에 시원한 아침 공기를 마시려다 벼락을 맞았다.

『호오, 리나.』
『제르가디스... 으르릉! 눈은 어디다 두고 있는 거얏!』
『그런 반응은 실례야. 내가 실수라도 할까봐서?』
허리 돌려 찌르기 시법을 연습하던 소년은 개구쟁이처럼 짖궂은 미소를 지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대한민국 만세 포즈를 취한 소녀가 오히려 바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소년은 누나의 치마폭을 훌렁 걷어올리듯 앞으로 한 걸음 진격, 연달아 찌르기 기술을 선보이며 허리를 교묘하게 비틀었다.
눈꼽 투성이의 리나 얼굴 위로 다시 한줄기 바람이 지나갔다. 이에 화답하듯 리나는 재빨리 뒷짐을 지고 상체를 뒤로 확 젖혔다.
『뭐야, 제르가디스. 아침부터 놀자고?』
『그럼 안돼? 놀자.』

모르겠다. 가우리는 멀거니 서서 그들이 뛰어 노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기만 했다.
칼 대신 검집을 집어 든 소년은 어디까지나 진지한 표정으로 리나의 몸 구석구석을 찔러댔다. 스치듯 내밀었다가 기교적으로 비틀어 옆으로 긋는다. 실전이라면 길죽한 자상을 남겼을 만한 공격법이었다. 이에 대응하는 리나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오른손으로 방어하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겉으로 봐선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다. 왼손으로 이미 조그만한 빛의 덩어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기회를 보다 희미하게 빛나는 주먹으로 제르가디스의 옆구리를 탄력있게 밀어붙였다. 가벼운 충격을 받은 제르가디스의 상체가 옆으로 휘어졌다. 기회는 이때다, 리나가 돌격했다. 제르가디스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주먹으로 찌르며 옆으로 밀어붙였다. 팔목 꺽어 목 조르기 기술이다.
『여어.』
『흐음.』
서로의 얼굴을 응시한 채 상대방의 급소 - 정확히 목 부위를 팔로 힘껏 감았다.

기분이 안 좋다.
지켜보고 있던 가우리는 약하게나마 어깨를 떨었다.

『왼쪽 방어가 생각보다 허술해, 제르가디스. 상대방이 암기를 던지기라도 하면 튕겨낼 수 있겠어? 공격도 좋지만 자기 몸 보호도 생각해야지.』
그녀가 제르가디스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턱턱 쳤다.
『리나. 넌 무릎을 굽히고 나서 다음 동작으로 들어가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하고 있어.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데 틈이 많다구.』
제르가디스는 리나의 허리 부위를 슬며시 쓰다듬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일에 열중했다.
리나는 세수를 하러 떠났고 제르가디스는 주변을 정리하며 간단한 체조로 아침 운동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뭘까. 가우리는 대야에 비추인 자기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저게 내 얼굴 맞아? 잔뜩 일그러졌고 눈빛은 부리부리하다. 눈썹은 코밑으로 내려와서는 갈매기처럼 구부러졌다. 콧잔등도 보기 흉하게 쭈굴쭈굴 주름이 잡혔다. 뭐니뭐니 해도 크게 벌려진 눈동자가... 끔찍하리만치 차가워져 있었다.
『잘못되었어.』
가우리는 손바닥을 똑바로 내려 대야 밑바닥을 짚었다. 물이 출렁거리자 상이 사라졌다.
경악과 곤혹이 섞인 신음을 토해내었다.
깨어지기 쉬운 얼굴의 근육이 아차 하는 사이에 자기 통제를 잃고 폭주한다.
언젠가부터 모르게 아침마다 그는 독(毒)이 오른 자신의 얼굴을 매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얇은 달팽이 껍질...
그 안으로 숨어 있는 건 흉칙하게 일그러진, 질투하는 남자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