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한 달에 한 번씩 마술에 걸린다. 정말이니?
실수로 선인장 밟은 공룡 저리가라로 흉폭하게 날뛰는 리나 인버스도 일단 여자는 여자인지라 (웃음) 주기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아랫배를 잡곤하였다.
뭐, 지독하리만치 건강한 체질이었기에 냉동 코끼리 아무개처럼 툭 하면 건너뛰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모두가 자연의 섭리일찌니... 남의 피를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는지라 매달 자신의 피도 적당량 보았다.

그런데 그게 참 처치 곤란했다. 아멜리아와 같이 돌아다녔을 적에는 그나마「동지」가 있다는 생각에 다소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좌청룡, 이 아니라 좌마족 우쿼터엘프 앤드 키메라인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만사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원래 뒷처리를 아무리 잘 해도 여성 특유의 뒷거리 냄새는 잘 가시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하나는 마족, 둘은 엘프의 피를 가진 남자들이었다. 싫든 좋든 남들보다 백배는 섬세한지라 아무리 이쪽에서 기를 써봐도 알아차리는 건 도사들이었다.

리나는 매번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메두사에게 밟히기라도 한 것처럼 지근거리는 허리의 통증은 둘째다. 이들이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부담스럽다. 걷는 동작 하나하나가 신경쓰여 미칠 지경이다. 엉덩이는 괜찮은 건가. 혹시나 싶어 옷자락을 아래로 죽죽 잡아당긴다. 가우리가 헛기침만 해도 깜짝 놀라게 되는 일도 잦았다. 툭 하면 쉬었다 가자고 한마디 던지는 제르가디스가 이유 없이 얄밉다. 모르는 척, 그러면서도 다 안다고 속삭이는 남자들 틈바퀴에서 리나는 무단한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다.

게다가 마왕까지도 때려잡은 자신의 마력이 그날만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엔 말 그대로 대책 없었다. 화이어볼 한 방으로 도적을 때려잡는 로버즈 킬러 리나 인버스가 같잖은 종이 호랑이가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초보 마법인 라이팅도 버겁고 그나마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누가 시비를 걸어오기라도 하는 날엔 끝장이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오로지 주먹 하나 의지해서 싸워야 하는데 그 잘난 컨디션이라는 것도 바닥을 기니 하느님 맙소사다.

그러니 어쩔겨? 취미생활이자 부업인 도적 집단 후려갈기기도 훗날로 보류한 채 여관방에 죽치고 앉아 애꿎은 다리털이나 하나 둘 뽑아댈 수밖에.
『털은 뽑지마.』
『흥! 다리털 향기나 맡아볼련?』
한 달에 한 번.
마술에 걸린 리나는 묘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남자들 사이에서 나날이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해야만 했다.

『어때? 리나.』
배 아픈 건 많이 나았는고?
그날따라 격심한 생리통으로 안색마저 새파랗게 변한 리나를 향해 가우리가 넌지시 안부를 물어왔다. 리나는 두말없이 가우리의 정강이를 뻐엉 걷어찼다.
음음, 뜨거운 살구차를 앞에 두고 앉아있던 가우리와 제르가디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많이 나아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뭘 물어봐도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낑낑 앓는 소리만 내더니 지금은 잘도 움직인다. 눈밑이 거무틔틔하게 죽긴 했어도 구부정하게 굽히던 허리도 도로 펴고 있다. 억지로 먹게 한 약초 다린 물이 효과가 제법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이틀 정도 지나면 원래의 모습으로 말끔히 원상 복구될 수 있을 것이다. 잘 되었다.

진한 향기를 풍기는 살구차를 홀짝대던 제르가디스는 리나의 안색을 찬찬히 살핀 다음, 머리속으로 대충 지도를 그려보이며 다음 여행 일정을 신중하게 검토했다.
3일 정도는 여관 방에 죽치고 있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리나가 자기 일엔 신경쓰지 말라면서 바락바락 우겨 일정을 서두르게 된다면 상황은 좀 골치 아프게 바뀐다. 외진 장소에서 산적이라도 만나게 되면 큰일이기 때문에 가급적 인적이 많은 장소만 골라서 걸어야만 한다. 숲이 우거지거나 계곡이 깊다거나 하면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 어디까지나 안전, 또 안전하게...

『그래, 마법 주문을 사용하지 못하는 나는 해충이다 이거지. 도움을 쥐뿔도 안 되는데 큰소리만 치고... 가슴도 밋밋해서 섹시하지도 않고!!』
『말은 똑바로 해. 네가 섹시하지 않다는 말을 여기서 누가 했다고 그래.』
『시끄럿! 말로는 하지 않았어도 표정으론 그랬잖아.』
『그런 억지가 어딨냐? 심하잖아.』
『누가 억지부렸다는 거야, 누가! 심하긴 뭐가 심해! 난 해충이 아니야!』

자기 혼자 곰곰히 생각에 사로잡힌 소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 사실은 앙칼지게 노려보던 - 리나는 입을 한 자나 앞으로 내어밀며 불만을 토로했다.
싫다, 끔찍하다.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이 못 견딜 정도로 창피스럽다. 아무리 강해보았자 달팽이 껍질이다. 손에 쥐고 약간만 힘을 주면 파삭 소리내며 가루로 변해버리는, 그런 약해 빠진 달팽이 껍질이었다.
마왕을 때려 잡았다고? 흥이다. 리나는 암울하게 되뇌였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여자는 여자, 부정하고 싶어도 어느 한 순간만큼은 걸기적거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정중히 보호받고 뒤로 감추어진다. 소중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과는 약간 다르게... 뭐랄까. 리나는 스멀스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몸 안에 흐르는 여자의 피가... 더럽게만 느껴진다. 냄새 나고 불결하다.

『그래!! 제르가디스. 나는 여자고 자기는 남자다 이거냐?! 얄미운 놈.』
『어랍쇼, 얘가 왜 이래?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럼 니가 여자지 남자냐?』
『아냐 아냐, 나는 여자가 아니야!』
『얼씨구? 그럼 여자가 아니라 성별 불명의 공룡이냐?』

여관에 머물던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아가며 그들은 다퉜다. 리나는 적당한 단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저주하며 머리를 긁어댔다. 답답하다. 예리하게 콕 찝어서 말할 수 있으면 오죽 좋으랴만, 아쉽게도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부정.
아니라고 거부하고 싶은 욕구.
리나는 울부짓듯 소리질렀다.
검붉은 여자의 피... 연약한 달팽이 껍질.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

『젠장! 그런 의미가 아니란 말이다. 네가 남자가 아니듯, 난 여자가 아니야.』
『이봐? 내가 보기에 넌 여자가 맞고 나 역시 남자가 맞아. 저쪽에 앉아 계시는 잘난 마족 나으리와는 달리 완.벽.한. 남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건 큰 실례라구.』
약간은 기분이 상했는지 제르가디스가 무어라 한마디 톡 쏘아부쳤다.

얼레리오. 엉겹결에 화살을 맞은 제로스는 한쪽 눈썹을 활처럼 구부렸다. 잘난 마족 나으리와는 달리 완벽한 남자? 그렇다면 그 잘난 마족 나으리님은 남자도 아니라는 뜻이잖아!
심기가 불편해진 제로스는 인상을 팍 썼다.
『그런 실례되는...』
『입 다물어!』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하고 죽어야...』
『제발 잠자코 좀 있자!』

한바탕 퍼붓기엔 서로의 마음이 너무나 복잡했다.
테이블 위로 어색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가우리는 목덜미를 손으로 만지며 헛기침만 했다.
리나와 제르가디스는 서로를 외면한 채 허연 벽이나 응시했다.

연약한 달팽이 껍질.
퍼석 소리 나기 일보 직전까지 찌부러졌다.
네 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찻잔을 집어 들고 묵묵히 살구티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