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잠깐 여기를 좀 보세요∼♬』

무엇이 갑자기 생각나서 저러는 걸까.
간식을 맛있게 먹다 말고 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스한 햇살 아래로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입을 즐겁게 하는 행위에 각자 열중하던 중이었다. 일행은 갑작스런 리나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차갑게 식힌 바닐라 푸딩 속으로 은제 스푼을 막 찔러 넣던 아멜리아가 찡그린 표정으로 숟가락을 빨았다. 테이블에서 머리를 들기가 싫었다. 하지만 안 들었다간 후환이 두렵다.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건포도를 넣은 과자를 입안에 넣던 제르가디스 역시 졸린 눈을 가늘게 떠보였다.
먹는 순간 만큼은 숨 쉬기도 아깝다고 주장하던 천하의 리나 인버스가 식탁에서 일어섰음이다. 분명 보통 일이 아니다.

『갑자기 왜 그래요, 리나 언니?』
『음핫핫, 백문이 불여일견. 자, 그럼 가우리?』
막 큼지막한 사과를 통째로 입안에 꾸셔 넣으려던 가우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남이 먹으려던 걸 잽싸게 중간에서 가로챘다. 이게 무슨 짓이냐 항의하는 소리가 제법 우렁찼다. 그래도 리나는 이를 깨끗하게 무시했다. 처량맞게 눈물 글썽여봤자 씨도 안 먹힌다. 대신 그녀는 이빨 자국 선명한 빨간 사과를 모두가 잘 보게끔 척 들어올렸다. 사과가 아니라 횃불이면 더도 말고 자유의 여신상이다.

『네, 이것은 사과입니다.』
리나는 대단한 진리라도 발견한 사람인양 선언했다.
『그렇군, 사과군. 그런데 그게 어때서.』
『어떻긴.』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제르에게 잠시 알밤을 먹인 뒤,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근처 시장에서 구입한 작은 나이프 하나를 꺼냈다.
룰루∼♬
흥겹게 콧노래를 불러가며 나이프 날을 곳추세웠다. 재주껏 옆으로 삭삭 돌려댔다. 역시 새 것이다. 날이 잘 들어서인지 서걱서걱 소리가 무척이나 경쾌했다. 길게 구불거리는 빨간 사과껍질은 순식간에 아래로 늘어져 땅바닥까지 이어졌다.

모두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우유를 넣은 홍차를 마시고 있던 제로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군요, 리나님. 농약이 묻어있을지도 모르니까 껍질을 깍아서 먹자... 이런 겁니까?』
리나는 대답 대신 장난스럽게 실실 웃었다.
찻잔 받침대를 돌아다니던 제로스의 새끼손가락이 꿈틀 움직였다.
『그런 건 아니고... 우훗훗, 바로 이걸 보여주고 싶었거든. 이얍!!』

아차하는 사이였다. 제르가디스는 앉은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뛰어올랐다. 가우리는 보기 흉하게 입을 벌린 그대로 바짝 얼어 붙었다.
리나가, 주머니 칼을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쥔 리나가, 그 흉칙한 걸 자기 목으로 힘껏 찔러 박았다.
앙칼지게 비명지르는 아멜리아를 뒤로하고 리나의 고개가 휘어졌다. 붉은 빛깔의 곱슬머리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금방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등이 구부러지면서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리나 언니! 안돼~!』
제로스의 한쪽 눈꺼풀이 슬그머니 올라가면서 자색의 눈동자에 서슬 퍼런 빛이 번쩍였다.
『리, 리나!』
그래도 게중에서 제일 먼저 정신을 수습한 사람은 제르가디스였다. 허들 경주하듯 테이블을 훌쩍 건너 뛰어 리나쪽으로 다가왔다. 힘 주어 품에 안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 어이!』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제르가디스의 팔을 잡았다. 눈을 힐끔 올려떴다.
그리고는... 용용 죽겠지 하며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으흐흐흐. 장난이야. 놀랐지롱.』

생각과 달리 제르가디스는 뺨을 일그러뜨리지도, 허탈하게 웃지도 않았다.
다만 힘줄이 돋아나게끔 주먹을 꽉 쥐고는 소녀의 턱을 후려갈겼다.
남자의 주먹이다. 거기다가 최대로 힘을 가해서 올려쳤으니 거의 날아가듯이 해서 넘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입술이 터졌다. 리나는 비명도 못지르고 넘어졌다. 입안으로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우?』
순식간에 부어오르는 뺨을 부여잡고 리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나 인버스? 미리 말해두지만 사과 따윈 죽어도 안해.』
제르가디스는 그렇게만 말하고 휘익 등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가 버렸다.

은제 스푼이 무슨 부적인양 꼭 손에 움켜쥐고 있던 아멜리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는 눈치다.
리나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나 진짜 맞았냐?」라며 당혹감을 표시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안스러움 반, 책망 반 시선을 던지던 아멜리아는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이 황급히 제르가디스 뒤를 따라 자리를 떴다.
결국 넘어진 리나를 붙잡아 일으킨 사람은 가우리였다.
『가우리! 나, 맞았어!』
그녀가 어린애처럼 울먹거렸다.
『응응. 맞아도 싸지.』
가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가우리! 너도 맞고 싶냐?!』
한 방울의 눈물이 그녀의 뺨 위로 또르르 굴러갔다.

아직까지도 테이블에 홀로 앉아 홍차 찻잔을 물끄러미 쥐고있던 제로스는 그제야 엿차 몸을 일으켰다.
땅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장난감 나이프는 이리저리 돌려볼 필요도 없는 물건이었다. 손잡이 옆으로 조그마한 비밀 단추가 달려 있었고, 그 단추를 누름과 동시에 칼날이 안으로 접혀 들어가게끔 장치가 되어 있었다. 흔하고 흔한 장난감이다. 제로스는 송충이 보듯 이마를 찡그리며 나이프를 간단하게 가루로 뭉개버렸다.

리나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 울음을 삭혔다.
등 뒤에 선 가우리는 멎적게 뒷통수를 긁어댔다.

제로스는 격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리나의 어깨를 눈여겨보다 말고 다리를 움직여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살그머니 어깨에 얹어놓았다. 그리고는 귓가를 간질이듯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이런 장난 꼭 필요한 겁니까? 원하신다면 저에게 말씀만 하세요. 저는요... 아주 간단하게 당신 목으로 커다란 구멍을 내버릴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장난으로 미리 연습같은 거 해보실 필요는 없어요. 쓸데없는 짓. 다시는 그런 장난 하지 말아요.』
『우와앙!! 난 그저 재미있으라고 한 것뿐이란 말이야!! 멍청아!!』
리나는 서글픔을 가득 담아 테이블에 엎드린 자세에서 엉엉 울어댔다.

하지만 때로 장난으로라도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기 마련.
씩씩대며 우거진 수풀 사이로 저 혼자 몰래 기어들어가 앉은 제르가디스나, 리나의 등뒤로 오도카니 서서 발가락을 꼼지락대던 가우리나... 다들 그만하면 엇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걸 그만 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