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지무지 오래 전 방명번호 1234 리퀘스트 품목으로 나갔던 글로 사전 약속과는 달리 12금입니다. 이제 이런 코멘트는 궁둥내 나도록 지겹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취향대로 알아서 읽는 멋진 센스를 보여주세요. 글의 시간대는 넥스트가 끝나고 곧장입니다.
2시즌이라 표기되었던 것을 1시즌으로 정정합니다. ※


노인은 제일 먼저 창가로 걸어가 덧문부터 내렸다. 손님의 짐을 챙겨주거나 침대 머리맡 등잔 기름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나중이었다. 방의 청소 상태를 구석구석 확인하고는「괜찮죠?」라며 눈짓으로 손님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마저 일절 생략,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태도였다. 게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말하는 내용도 끝내줬다. 보통은「욕실은 저쪽입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아래층으로 연락하세요.」라고 말하는 거 아니었던가?

『갑갑해도 한밤중엔 절대 창문을 열지 마세요, 손님.』
『어째서요.』
『마물이 들어옵니다.』

노인은 꼼꼼하게 창문의 상태를 확인했다. 벌어진 틈 없고 걸쇠는 튼튼했다. 시험삼아 문고리를 잡고 덜커덕 소리가 나도록 잡아당겨 보았다. 이상 없음이다. 마지막 점검으로 창틀 위로 매어달린 구리판을 섬세하게 어루만졌다. 못으로 그 표면을 긁어 투박하게 그림을 그려 넣은 쇠붙이였다. 똑바로 선 오각형에 두 개의 원이 교차되어 가로질렀다. 전통적으로 마물 퇴치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민간 부적이었다. 뭐, 내가 알기론 요괴 목에 목걸이처럼 걸어두었음에도 끄떡 안했다만서도... 그래도 오래된 믿음이라는 건 쉽게 변하진 않지.

노인이 강조에 강조를 더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하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이걸 치우지 마세요. 손님은 제법 실력 있어 뵈는 마도사라 그나마 덜 걱정입니다만, 예로부터 우리 마을엔 해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요.』
모르는 바 아니다. 이곳 쉬크라웃 지방은 민간 전설의 보고다. 길게 머리를 풀어헤친 미친 여자, 달빛 아래서 울부짖는 미친 늑대, 독약이 뒤섞인 죽음의 우물... 여기선 날고 긴다는 밤 도적도 멋대로 돌아다니지 않는다. 땅거미가 지면 그 즉시 인적이 끊기고 정적이 감돈다. 우거진 숲은 해가 저물기가 무섭게 요기를 내뿜는다. 달이 떠도 하늘은 어둡다. 부엉이가 구슬피 울면 검은 옷을 걸친 주술사들이 하나 둘 나타나 고양이 시체를 땅에다 파묻는다. 복잡한 주문을 외워가며 썩은 달걀을 깨뜨린다. 어둠의 주인이여 강림하소서, 푸른 도깨비 불 아래서 낄낄대는 기분 나쁜 웃음 소리는 능선을 타고 이웃 마을에까지 흘러 들었다고 한다.
겁 먹은 아이들 표정에 재미들린 어른들이 스산함을 뒤섞어 이야기를 과장한 탓도 있겠으나, 분명한 건 이 마을에서 올려다 본 저 하늘의 달은 괴이할 정도로 크게 보인다는 거다.

『이대로 아침까지 창문은 건들지 마세요.』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그렇게 대꾸하긴 했지만 노인의 말을 염두에 두거나 하진 않았다.
마물? 훗-
다섯 살 어린아이의 심술이 주머니 틈새로 튀어나왔다. 열지 말라고? 그럼 열고 보는 것이다. 노인이 물러나기가 무섭게 창문의 걸쇠를 도로 풀어버렸다. 위로 잡아 올리게끔 장치된 나무 덧문은 보란 듯이 활짝 열어두었다.

『후우.』
아직은 이른 봄. 밤 공기에 스며든 냉기는 집 없는 거지들을 얼려 죽이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집안에 자리잡은 사람이 느끼기엔 무척이나 신선했다. 마침 전경으로 별빛 가득한 하늘과 찌르도록 높은 나무들의 숲이 펼쳐졌다. 나쁘지 않다. 도시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비경이다. 가로등 켜진 거리들이 되려 어두컴컴하게 느껴지는 것과는 색다르다. 빛나는 검은 색이라는 것도 이 세상엔 분명 존재한다. 어두워서 오히려 눈부신 밤이었다. 암흑으로 삼켜진 만물은 서슬 퍼런 침묵으로 노래했다. 위대한 안식을, 그리고 평온을... 지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밤하늘이 산과 들마저 삼켜버렸다.
창틀로 몸을 기울였다. 공기는 축축하고 부드러웠다. 얼음의 표면처럼 매끄러웠다. 좋은 느낌이다. 손을 밖으로 뻗어봤다. 하얀 함박눈을 기다리듯... 암흑은 이에 화답했다. 나의 손바닥으로 뜨거운 입술이 내려왔다.

사람은 문으로 노크하고 들어오는게 정상이다.
그러나 상대가 마물이라면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을 게다.
『이야~ 안녕하세요.』
그리하여 너는 밤에 뜨는 무지개와도 같다. 일곱 빛깔은 아니다. 검정과 보라색의 단 두 가지 빛으로만 이루어진 신기루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는 점에선 낮에 뜨는 무지개와 다를 바 하나 없다.
허무... 있어도 있지 않다.

『저기, 헤헤헤. 창문에서 조금만 비켜 서주시면 좋겠는데.』
『싫어. 그냥 거기서 헬륨 풍선인양 둥둥 떠있기나 하셔. 이 안으론 절대 못 들어오게 하고 싶으니까.』

어디에선가 가랑비가 내렸다. 나는 언덕 위로 박쥐 우산하나 쥐고 서있다. 우산 위로 구겨진 영혼의 파편들이 소복이 흩뿌려졌다. 그곳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 숨겨진 나만의 대지... 하늘에선 검은 비가 내렸다. 어깨는 검은 비에 젖었다. 힘 주어 날 잡는 너의 손... 오늘은 비가 내린다.
왜일까? 나는 뿌리치지 않았다. 괜찮다. 날 안으려 하는 제로스의 팔이 오늘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뺨으로 닿는 머리카락도 기꺼이 받아주겠다. 스치듯 내려앉아 살짝 빨아들이는 입술에서 싸늘한 계피 향기가 난다.
화답.
새파란 납빛의 시체와 입을 맞추고도 웃을 수 있는 건 아마도 내가 죽어버린 마녀이기 때문... 자지러져 낄낄대는 마녀의 웃음 소리는 천년 전의 그 날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이 마을의 능선을 넘을 것이다.
알고 있니? 제로스. 이 가슴 속으로 무거운 납덩이가 들어있단다. 세월에 찌들어 녹슬긴 했지만 여전히 무거운 금속이 가득 차있어. 그래서 아프고... 미치도록 답답한 거란다.

『제가 호호 바람을 불어드릴께요. 그러면 나을 거예요.』
여자의 옷깃 속으로 손을 집어 넣는 너는 의외로 덤덤하다. 그래서 나 또한 창피하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추를 푸는 손길은 내 연인의 것이 아니다. 그처럼 주저하지 않으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 작고 여린 심장을 보고자 하는 너는 조금도 떨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겁 먹어 움츠리거나 하지 않는다.
깊게 파여진 정 중앙의 계곡을 더듬어 주룩 흝어내리는 손가락. 그리고 나의 빈약한 가슴을 힘껏 잡았다. 아프도록 움켜쥐었다. 근육과 살을 탐하는 제로스의 손은 내 연인의 것과는 달리 그리 크지도 않고 아담하다. 색도 다르다. 달빛이 그대로 뚫고 지나갈 만큼 투명하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있다. 이미 기억하고 있는 그 남자의 손과 네 손이 서로 구별되게끔 많이 다르다는 거... 나에겐 아주 중요하다.

『괜찮죠?』
나의 연인은 많이 부끄러워하며「아프지 않게 할게」라고 다짐부터 했는데.
『키스하고 싶어요.』
지금의 그 말은 가우리와 너무나 똑같구나.
의외로 우린 아주 많이 닮았다. 눈 뜨고 키스하는 건 우리들밖에 없을 지도. 영혼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어도 서로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결코 눈 감을 수 없다. 입술을 눌러 좌우로 비벼보아도 별다른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혀로 휘감아도 맛을 느낄 수 없다. 호흡을 하지 않는 너... 그건 아주 기괴한 느낌. 심장 뛰지 않는 자와의 포응은 섬짓하다.

『나중에 화내는 거 아니죠.』
『정 걱정이 되면 아예 기억하지 못하게끔 만들어버려.』
차가운 마룻바닥으로 날 눕히고 그 위를 넌 이불처럼 덮는다. 팔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죄어놓고 손목으로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그래. 실험대 위로 올라가 주겠다. 그러니 배를 가르고 내장을 봐야 할 게다. 너는 그 냄새를 맡고 그 피를 맛보면 되는 거다.
위로 얹어진 그의 몸무게는 의자보다 더 가벼웠다. 나름대로의 배려? 글쎄. 무릎으로 몸의 균형을 잘 잡아서 최소한으로만 나를 눌렀다. 어쩌면 위 아래로 움직이기 쉬운 자세를 취한 것뿐일지도? 어쩌면.
『쉿. 이제 당신을 가질 거야.』
한쪽 허벅지를 받쳐 들었다. 이어 그가 몸을 숙였다. 너무 빨랐다. 메마른 나의 자궁 안으로 기꺼이 들어왔다. 그래도 괜찮아... 아픔은. 찢어지는 몸뚱이 따윈 거뜬하게 참을 수 있지. 정말로 견딜 수 없는 건 이런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러니까 괜찮아. 더 깊이 들어와도 넌 다시 빠져나갈 수 있다. 안심하고 힘을 내. 어두운 곳에 사는 너는 나처럼 밤 길에 갈 곳을 잃어버리고 서럽게 울지는 않을 거다. 내 몸은 비좁고... 어둡고... 건조하고... 작다.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다시 원위치로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으니까... 불안해 하면서 조급하게 비틀지 않아도 된다. 나는 누워있고 너는 엎드렸다. 그대로, 그대로. 여전히 두 눈 부릅뜨고 나는 천장을 본다. 너는 바닥을 본다. 이것은 의식... 그렇기에 거친 숨소리는 생략되었다.

『나는 말할 거야.』
녀석이 내 목을 거칠게 물어뜯는 걸 느껴가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을 잡아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야. 가우리는 아냐, 이 녀석이야. 그러니까 제로스를 잡아가. 나에게서 데려가. 제로스를 붙잡고 나를 협박해. 이 자를 무사히 돌려받고 싶으면 사일라그로 오라고 나에게 말해.
『말할 거야.』
그러면 난 웃어야지.
싫다고. 구하러 가지 않을 거라고. 내가 미쳤느냐고.
그래. 그리로 가지 않아도 되는 거다. 사일라그로는 가지 않는다. 짐 싸들고 반대 방향으로 여행을 떠날 거다. 바다를 볼때까지 무작정 대륙을 걸어서... 멀리. 아주 멀리 가버릴 것이다. 후회도 하지 않으리라. 울면서 이불을 씹어 삼키지 않아도 된다. 아픔도 없고, 더 이상 발걸음이 무겁거나 하지 않을 거다. 고통은 없다.
그러니까... 괜찮다. 이렇게 낯 선 남자의 다리가 휘감긴 벌거벗은 내 몸은 나쁘지 않다.

『제로스, 조용히 그러지만 말고 내 이름을 한 번 불러주겠니?』
털 하나 나지 않은 제로스의 맨 가슴으로 코를 파묻었다.
『죄송하지만 사람 모양을 취한 사념에게 붙일 마땅한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과거의 내 이름은 리나 인버스였으니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래, 지금은 아니지. 이제 나는 리나 인버스가 아니니까. 그녀가 내다 버린 조그마한 파편이니까.
후회라는 이름. 그게 내 이름.
맞아. 사실이야. 정말로 사랑한다는 건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버리는 거다. 알면서도 뿌리칠 수 없다. 깨닫고 나면 너무 늦어버려. 하는 수 없이 약해진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왜 그를 사랑해버렸을까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돌이킬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제로스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응시했다. 손바닥으로 뺨을 끌어안았다.
진심으로. 너는 그렇게 나를 위로한다.
『괜찮아요, 사일라그로 가지 않아도. 나는 강하니까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거예요. 명왕님이 날 헤치려 하면 수왕님도 화낼 거고... 그러니까 당신은 이대로 떠나도 괜찮아요. 사일라그로 날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되요. 괜찮아... 이젠 가세요. 당신의 쓰라린 고통, 나는 기쁘게 받았어요.』

고마워.
그래. 이젠 떠나도 되겠지.
안심이다. 이번에야말로 초록색 바다를 보러 가자.

『창문을 열지 마, 제로스. 내가 옷 입고 떠나간 뒤에도...』
『마물이 나타나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잖아. 그렇지?』

휘황찬란한 달밤.
그래도 내 그림자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생명이 얼어 죽는 맹렬한 추위. 그래서 내 심장은 되려 따뜻하게 느껴진다.
가자. 오랜만에 눈물이 말랐음이다.
꼭 닫긴 덧문을 뒤로 하고 사람이 걷지 않는 길을 그래서 나는 기꺼이 밟았다.